발다이에서 ‘미국 문제’에 맞서다: 서아시아의 지정학적 전환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4차 발다이 클럽(Valdai club, 러시아 국제 전문가 모임중동 회의는 한복판에서 지정학적 벙커버스터 폭탄을 맞았다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트럼프 가자 리비에라 리조트 카지노를 건설한다고 직접 발표한 것이다.

2월 4~5일, 발다이 토론 클럽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제14회 중동 회의를 열었다. 출처: 발다이 토론 클럽

국제적 분노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기도 전에브릭스(BRICS)에서부터 아세안(ASEAN), 그리고 나크바 2.0’(Nakba,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대규모로 추방되고 학살당한 사건)으로 여기는 아랍 세계에 이르기까지심지어 트럼프의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유럽의 주요 동맹국들까지 혼란에 빠졌다발다이에 모인 학자들과 전문가들 또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두 명의 예외가 있었다테헤란대학교 교수 모하마드 마란디(Mohammad Marandi)와 전 영국 외교관 앨라스테어 크룩(Alastair Crooke)은 항상 서아시아에 대한 미묘한 분석을 내놓는 인물들이다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미국 제국이 퇴각을 강요받을수록 더욱 잔혹해지고 위험을 감수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마란디는 트럼프를 미국의 글로벌 쇠퇴를 위한 선물이라고 평가했다크룩은 오히려 네타냐후가 트럼프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인가아니면 그 반대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에서 보면트럼프는 자신이 기본적으로 경멸하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를 정확히 원하는 위치에 가두었다네타냐후는 트럼프에게 빚을 졌다.

트럼프는 엄청난 공약들을 쏟아냈고네타냐후는 이를 대성공이라 포장해 텔아비브의 전쟁광들에게 팔아넘길 수 있다그 덕에 네타냐후의 연정은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그러나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트럼프가 강요하는 휴전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를 따라야 하며이는 이론적으로 전쟁 종식을 향한 길로 이어진다네타냐후는 무한 전쟁(Infinite War)을 원하며, ‘()이스라엘(Eretz Israel)’의 무제한 확장과 병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미 확정된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트럼프는 한순간에 집단 학살(genocide),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그리고 가자지구의 비극을 싸구려 부동산 거래로 축소하는 작업을 정상화했다. “미국이 가자지구를 접수할 것이다”, “우리가 소유할 것이다”, “그 지역을 평탄화할 것이다라는 트럼프의 발언들은 충격적인 불법 외국 병합을 선언한 것일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낡은 제국주의적 레토릭을 극단적으로 강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완전한 광기’(sheer lunacy)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미국의 싱크탱크들은 이를 그렇게 규정할지 모르지만실상 이것은 일련의 패턴에 따른 것이다그 패턴이란그린란드를 사들이려 했던 것캐나다를 병합하려 했던 것(자원 기반 확대), 파나마 운하를 장악하려 했던 것멕시코만을 미국 만(Gulf of America)’으로 개명하려 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이는 제국의 실제적인 위협즉 러시아–중국 전략적 동맹을 직시하는 대신담론의 중심을 바꾸고 기존 서사를 전환하려는 시도다.

이번 가자 리비에라’ 프로젝트는 해골 무덤 위에 세워질 리조트가 될 것이다이는 단순한 공상적 계획이 아니라텔아비브의 집단학살 세력들과 트럼프의 억만장자 후원자들이 공동으로 구상한 프로젝트다미국 내 이스라엘 로비의 핵심 계층이 이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뉴욕 내부 소식통들에 따르면이 비전은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로부터 나온 것이다불과 1년 전쿠슈너는 이미 가자 해안이 가진 부동산적 가치를 극찬하며 투자 기회로 여겼다트럼프 2기 정부에서 비공식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쿠슈너는 지금 더욱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그는 가자 지구의 미국 승인 점령 가능성에 대한 트럼프의 주요 조언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과 이스라엘이 추방-건설-판매’ 논리를 현실 쇼의 형식으로 적용하고 있다마란디는 이를 미국-이스라엘 문제라고 부르며앙카라 연구소의 타하 오잔(Taha Ozhan)은 이스라엘 중심 질서와 미국 문제라고 규정했다.

글로벌 정권 교체’ 시대를 살아가며

발다이에서의 논의는 당연히 트럼프의 가자 폭탄 선언을 넘어서는 담론으로 확장되었다타하 오잔은 서아시아의 극한 스트레스 테스트에 집중했다그는 가자지구에서의 집단학살부터 아사드는 물러나야 한다라는 슬로건이 변질되어 양복을 입은 알카에다가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서아시아가 겪고 있는 위기를 분석했다오잔은 현재의 글로벌 혼란이 새로운 전쟁을 촉발할 수 있으며우리는 이제 지속 가능한 불안정성이 끝난 글로벌 정권 교체’ 과정에 들어섰다고 경고했다.

팔레스타인을 대표하여 참석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사회개발부 장관 아흐마드 마즈달라니(Ahmad Majdalani)의 발언은 크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간 관계 정상화가 서안지구 병합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문제를 언급하며, “다른 무슬림 국가들은 그저 방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즈달라니는 또한 오잔이 정의한 미국 문제에 대해 “BRICS가 효과적인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그러나 팔레스타인 내부 통합 문제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팔레스타인 없이 아브라함 협정이 성립될 수 없다는 기존의 논점을 반복하는 데 그쳤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 동양연구소(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회장 비탈리 나오움킨(Vitaly Naumkin)은 같은 연구소 소속 바실리 쿠즈네초프(Vasily Kuznetsov)와 공동 집필한 시리아 관련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들은 시리아의 오랜 지도자 바샤르 알아사드 실각이 이스라엘튀르키예걸프 왕정국들에게 기회의 창을 제공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이에 대한 미묘한 차이점을 강조했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특정 지역을 직접 통제하려는 것인가(그렇다면 어디를?), 아니면 광범위한 완충지대를 형성하려는 것인가?”

튀르키예에 대해 그들은 앙카라가 쿠르드족에게 전략적 패배를 안기려 하고시리아-튀르키예 국경을 따라 완충지대를 조성하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고 분석했다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쿠르드족 지원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덧붙였다.

걸프 왕정국들은 주로 경제적 지렛대를 활용해 시리아에서 입지를 강화하려 할 것이다그러나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의 이해관계는 각기 다르며항상 일관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변수로 작용한다.

이란의 경우나오움킨과 쿠즈네초프는 현실적으로 새롭게 구성될 시리아 체제가 사회를 통합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평가하며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란은 시리아 내 영향력을 회복할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오움킨은 러시아의 시리아 내 군사기지 유지에 대해 러시아군은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이는 모스크바 내부에서도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주제다나오움킨이 러시아의 시리아 개입을 옹호하는 주된 이유는, “러시아가 시리아 북부에서 튀르키예의 팽창주의적 움직임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랑 열풍(Corridor-mania)’

최근 체결된 러시아-이란 전략적 파트너십은 발다이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지만마란디는 이란은 필요한 인프라를 매우 빠르게 구축하고 있으며이는 인도를 경제적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들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러시아-이란 협력의 핵심은 군사적 요소가 아니라 지정경제적 요소에 있으며특히 국제 북남 교통 회랑(INSTC, International North-South Transportation Corridor)에 집중되어 있다. INSTC는 유라시아 및 BRICS 경제 통합을 위한 핵심 연결망으로 작용하는 프로젝트다.

INSTC는 BRICS 핵심 회원국인 러시아이란인도 간 무역을 가속화하는 실질적 촉진제 역할을 하며이들 국가가 자국 통화로 결제를 확대하도록 만드는 기제다이는 바로 트럼프가 BRICS가 자체 통화를 개발하려 한다고 잘못된 주장으로 비난하게 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이미 러시아와 이란은 서방 제재 속에서도 루블과 리알로 활발히 무역을 진행하고 있다.

발다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정경제적 분석을 내놓은 인물은 바쿠 국제 정책 및 안보 네트워크(Baku International Policy and Security Network)의 디렉터 엘친 아가자노프(Elchin Aghajanov)였다그가 가져온 남캅카스의 신선한 공기는 서아시아를 뒤덮고 있는 암울한 지정학적 폭풍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아가자노프는 아제르바이잔의 주권을 강조하며서방의 지정학적 야망을 인정하는 한편 헤게모니에 맞설 필요성도 언급했다그는 아제르바이잔을 교통 회랑의 교차점으로 규정하며총 13개의 국제 교통 회랑이 교차하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그는 회랑 열풍(Corridor-mania)’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했다남캅카스는 역사적으로 유라시아의 핵심 지정경제적 중심지였다.

이 회랑 열풍은 TRACECA(유럽-코카서스-아시아 운송 회랑), 중국의 중앙 회랑(Middle Corridor)’, 카스피해 횡단 회랑(Trans-Caspian Corridor), 그리고 INSTC까지 포괄한다그러나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서방이 지원하는 잔게주르 회랑(Zangezur Corridor)’이다잔게주르 회랑은 이란 국경을 따라 아르메니아 영토 40km를 가로질러 건설될 계획이다이 회랑은 신(실크로드의 여러 지선과 연결되며신장(Xinjiang)과 중앙아시아에서 튀르키예 및 카스피해 횡단 회랑으로 이어지는 핵심 연결망으로 기능할 예정이다.

아가자노프는 잔게주르 회랑과 관련해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영토를 병합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그는 바쿠는 잔게주르 회랑이 이란-아르메니아 연결망을 통해 이란으로 직접 연결되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다이란은 강제 병합만 없으면 회랑 건설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이 경우 최선의 방안은 지하 터널 방식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아가자노프는 아제르바이잔-이란 연결망이 아라스 강(Aras River)을 따라 구축될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란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도 이를 강력히 지지했다고 밝혔다.

아가자노프는 아제르바이잔이 튀르키예와 파키스탄의 자연스러운 동맹국이지만같은 논리가 이란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현재 이란에는 1,300만 명 이상의 아제르바이잔계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를 자연스러운 전략적 파트너라고 정의했으며특히 극북(極北지역의 회랑 네트워크즉 북극해 항로(NSR, Northern Sea Route)를 높이 평가했다아가자노프는 뉴욕에서 중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르만스크(Murmansk)를 경유하는 길이다브라질에서 중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를 경유하는 길이다라고 설명하며러시아 북극 항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쟁의 개들이 짖어도, ‘회랑 열풍은 멈추지 않는다무엇보다도 서아시아는 트럼프의 황당한 가자 카지노 프로젝트 같은 허황된 비전을 먼저 매장해야 한다.

[출처In Valdai, confronting the “American problem” in West Asia

[번역이꽃맘

 
덧붙이는 말

페페 에스코바르(Pepe Escobar)는 더 크래들(The Cradle)의 칼럼니스트이자 아시아 타임즈(Asia Times)의 편집장이며 유라시아를 전문으로 하는 독립 지정학 분석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