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보니 역사였네

전노협 깃발을 가슴에 품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떠올리면 지금도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다첫 번째는 1990년 1월 22전노협 결성식장에서 펄럭이던 깃발이다결성식장 걸개에도 전노협의 깃발이 그려져 있다두 번째는 1995년 12월 3일 해산식에서의 전노협의 마지막 위원장의 모습이다검정 가죽 자켓을 입고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이라 새겨져 있는 파란색 깃발을 가슴에 품은 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던 전노협 마지막 위원장 양규헌그날의 기억을 양규헌은 이렇게 말한다.

“2부 기념식에서도 여전히 침통한 분위기가 이어졌다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동지들이 많았다 …(중략)... 모진 탄압과 회유에도 결코 내리지 않았던 전노협 깃발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곁에 자리하신 박창수 열사 어머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천천히 전노협 깃발을 차곡차곡 접어 나도 모르게 가슴에 꼭 안았다내 눈에서도 뜨거운 액체가 흘러 얼굴을 적셨다.” (273)

전노협 마지막 위원장 양규헌의 지난 삶의 여정에 관해서는 몇몇 언론 기사에서 인터뷰를 통해 다루어진 바가 있다하지만 보다 상세하고 자세한 이야기가 담길 만큼 지면이 넉넉하지는 않았다이번에 출간된 ⟪걷고 보니 역사였네⟫는 양규헌 위원장의 삶의 역정을 온전하게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이 책은 몇 년간 노동자역사 한내의 뉴스레터에 한 꼭지씩 실었던 글을 다듬어 묶었다.

⟪걷고 보니 역사였네⟫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성장>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1952년생 필자가 보냈던 유년 시절과 청년 노동자가 되어 민주노조운동에 입문하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을 담았다. 2부 <역사 속으로>는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부터 시작해 전노협 결성과 그 가운데서 그의 활동과 전노협 위원장 당선이후 전노협의 조직발전논쟁을 거쳐 민주노총의 출범과 그에 뒤이은 두 번째 구속그리고 구속 기간에 맞게 된 아버지의 죽음까지의 시간을 담았다. 3부 <돌아보며다시 걷는다>는 민주노총 출범 후 예상치 못했던 구속과 다시 노동운동 활동의 의지를 다지고 여러 조직과 단체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인간 양규헌이 역사에서 겪은 것들

⟪걷고 보니 역사였네⟫에서 그려지는 양규헌 위원장 자신의 모습은 투사의 그것과는 다르다그보다는 미숙하고 거친 한 젊은 노동자의 모습에 가깝다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써도 될 텐데 어린 시절의 실수잘못을 다 털어놓는다아버지한테 매 맞은 일학교에서 잘린 일버스에서 여학생들 도시락 뺏어 먹던 일 같은 것들이 그것들이다그런 잘못은 비단 어린 시절에만 해당되지 않는다군대도 다녀오고 회사 생활을 하며 1979년에 결혼한 양규헌 위원장은 45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자신의 잘못을 적시한다.

결혼 후 45년 동안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인생의 복잡미묘한 역할이 있지만나의 의무와 책임은 실종되었다내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운동 세계로만 질주하며 활동의 정당성만 앞세운 당당함은 이기적이었다상처 받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내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는 죄책감이 앞선다.” (105)

양 위원장의 이런 인간적 면모가 책에는 담겨 있다말하자면 이 책은 위인전이 아니다. ‘위대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싸우고 몸부림쳤던 한 개인의 고민한계의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우리가 함께 건너온 지난 세월의 한국 노동운동에는 운동의 한계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분투하고 그 투쟁 가운데서 스스로도 변화시켜 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그리고 양 위원장도 그 중 한 명이다.

그 운동의 시간동안에는 양 위원장의 주변에서 먼저 떠나간 사람들도 많다어린 시절 먼저 떠나가신 어머니도 있었지만 아버지와의 이별도 인상적이다양 위원장이 민주노총 출범 후 구속되어 구치소에 있는 동안 돌아가셨기 때문이다그래서 얼마 동안 외출을 하고 장례를 치르신 것이다그리고 출소한 1997년부터 3부에 담겨 있는데, 3부에는 유난히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이었지만 뉴라이트 노동연합 대표를 맡았던 권용목수배 때 수행을 맡았고 전노협 해산 후 백서 작업을 책임졌던 김종배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이었던 한경석첫 비정규직 열사였던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이용석 열사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류기혁 열사노동자역사 한내 이승원 사무처장그리고 2021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신 백기완 선생님.

한내 2층 서고로 가는 계단에 사진이 걸려 있다김진균김종배이승원이정원그리고 백기완나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고인이 된 이 사진들을 보는 것이 싫다그러나 떼자고 하지는 못한다한내의 숨결이고 역사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마주해야 한다역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역사도 마주하며 고통 속에 담긴 의미도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390)

이 책은 이 같이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가만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대목들이 있다노조 위원장으로 첫 당선된 후 아버지의 반응 같은 이야기도 그런 대목 중 하나이다.

선거에서 대우전자부품노동조합 위원장에 당선되었고활동의 범위가 자연스럽게 넓혀졌다노조 위원장이 되면서 안양집 옥탑방에서 밤늦게까지 조합 간부들지역 동지들과 토론하고 회의를 하니까 아버지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신 모양이다아내를 불러서 저놈이 요즘 뭘 하냐?’고 물으셨다고 한다아내가 노조 위원장 한다고 대답하자 아버지 눈초리는 그때부터 싸늘했다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매우 온화해지셨다는 것을 감각으로 느꼈다아버지가 생각이 바뀌신 걸까아니면 자식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신 걸까갸웃했는데 금세 그 궁금증은 풀렸다그때 아버지는 나가시던 복덕방에서 오는 영감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신 모양이다. ‘아들 하나 있는 게 평생 속을 썩인다’ 복덕방 노인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그 아들이 노조 일을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셨단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있던 노인이 무릎을 치면서 양 영감은 왜 그렇게 무식하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요즘 노조 위원장 하면 1년에 집이 3채 생기는 횡재를 하는 것이며 출세한 건데 그걸 걱정하면 어떡하느냐고.” (134)

어용노조 위원장은 출세길이라는 걸 당시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나보다그리고 감옥에서 술을 만들어 먹는 이야기도 무척 재밌다.

요구르트와 빵은 술의 재료로 훌륭하다빵을 잘게 부숴 빵 속에 들어 있는 크림을 걷어낸 다음 이틀 정도 말린다그다음 구하기 쉽지 않지만 작은 통에 빵부스러기를 넣고 요구르트를 부어서 밀폐시킨 뒤 3일 정도 지나면 부룩부룩’ 소리가 난다저녁 취침시간에 한 공기를 퍼서 뺑기통(화장실창가에서 마시면 달달한 맛에 금세 취기가 오른다.” (298~299)

노동자 자기 역사 쓰기

전노협이 해산된 후 남은 자산과 자료들을 모아 정리해 ⟪전노협 백서⟫가 간행되었다그 즈음 함께 해산됐던 여러 지역 노조협의회도 ⟪내사랑 마창노련⟫, 부노협 백서⟫, 전북노련 10년사⟫ 처럼 기록물을 남겼다그 이후 민주노조운동 내에서는 노동자 자기 역사 쓰기라는 말이 돌았고그래서 노동조합사나 투쟁 백서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따져보자면 노동자 자기 역사 쓰기라는 말은 두 가지 용법으로 나누어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하나의 용법은 노동자가 삶과 운동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가는 실천적 맥락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와 같은 말의 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50~70년대까지 어용화된 한국 노동조합들은 존재는 했지만 역사를 썼다거나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고그저 군부독재 정권과 기업의 졸개에 지나지 않았으며외려 노동자가 역사를 쓰는 것을 방해하고 저지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 자기 역사 쓰기의 다른 용법은 노동자와 조직이 그야말로 문자영상구술 등 여러 형태로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과 행했던 실천을 역사 자료로 생산해내는 것이다그건 경험에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반성과 평가를 거쳐 새로운 전망과 의지를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이젠 예전에 비해서는 상당히 많이 기록되고 책으로 묶여져 나오고 영상으로도 유통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다예컨대 전노협이 그렇다. 2천 명 이상이 구속되고 5천 명 이상이 해고되면서 지켜낸 전노협 5년은 그 자체로 이미 역사가 되었고 그 기록 또한 비교적 온전하게 남겨져 있다그런데 전노협은 이미 그 깃발을 내린지 오래건만 여전히 수시로 호출되곤 한다. ‘전노협 때는 그러지 않았다’ ‘전노협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노협은 정말 해산되었나 싶게 자주많이 이야기되곤 한다어쩌면 아직도 이 시대를 굴려가는 힘은 전노협의 기백, 1990년대의 기운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그것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재성유효성이 아닐까.

투쟁 정신과 실천적 의미운동적 성과가 없는 노동조합노동운동의 기록은 그 아무리 그 양이 많다 하더라도 한낱 폐지 취급 받기 일쑤다반대로 아무리 그 투쟁과 조직이 의미가 있더라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쉽게 그 기억이 휘발될 뿐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망각되고 마는 법이다그래서 우리는 우리 투쟁을경험을기억을 잘 기록하고 남기고 역사화해야 한다.

회고(回考), 역사적 개인이 쓰는 개인의 역사

윤석열의 폭력 내란과 그에 뒤이은 노동자민중의 투쟁 과정에서 광장과 대로가 폭력 경찰에 의해 막혔다.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처럼 민주노총금속노조 등이 길을 열었고 20, 30대 시민 노동자들과 LGBT+ 동지들 등이 박수를 보냈다남태령과 한남동 사이의 시간동안이들이 민주노조운동에 궁금한 게 많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강고한 대오를 조직할 수 있었을까?’ 같은 질문이랄까. (그 반대로도 궁금한 게 많은 게 사실일 거다.)

어쩌면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옛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세대 전승을 하는 건 인류의 오래된 지혜의 재생산 방식이다그러나 지배 계급은 문자를 독점하면서 역사를 창조했고그것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신화미신문학으로 취급하며 역사에서 배제시켰다독일의 랑케(Ranke)로 대표되는 실증사학이 내건 사료 없이 역사 없다는 테제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노동자 민중을 비롯해 여성성소수자피지배계급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디아스포라소수민족 등은 끊임 없이 말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정체성과 역사를 지켜왔다신화면 어떻고 문학이면 어떠하며 역사 취급을 못 받으면 또 어떠냐이야기가 거듭되면 그것도 주문처럼 힘이 생기고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민주노조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노동자운동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옛날엔 어땠지?’를 되돌아볼 수 밖에 없게 되는데그럴 때 필요한 것이 선배의 지혜’ 같은 것이다.

예컨대 죽은 윤석열의 망령처럼 아직 민주노총이 떨구어내지 못한 회계 공시’ 문제 같은 것 말이다며칠 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회계 공시 거부하자는 안건이 부결되고 말았다몇 푼 되지도 않는 세액 공제액을 빌미 삼아조합원을 설득하고 투쟁을 결의하는 것을 방기한 채국가에 노조의 속살을 다 보여주겠다는 비자주적 태도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사실 과거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나 1990년대 노태우 정권 때도 노동조합에 업무조사가 들어왔었다그러나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노동조합의 자주성은 투쟁 없이 지켜지지 않는다양규헌의 입을 빌어 당시를 돌아보자.

신군부는 노동조합 예산지침을 내려 노조 활동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노동부는 노동조합 업무조사의 칼을 빼들었다… 간부대의원들과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경과보고를 한 뒤 정권의 의도된 탄압으로 규정하고 조합원 토론을 통해 사안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수습하는데 3개월 이상이 걸렸다.” (116~118)

“‘노동조합이 조합비로 노조를 운영하는데 근로감독관이 무슨 자격으로 조사를 하냐너희는 기본적인 양심도 못 갖춘 놈들이냐고 몰아세웠다그러면서 회의실 문 다 잠가저런 놈들은 다 죽여버리든지 같이 죽든지 해야 한다고 하자 바깥에서 회의실 문을 잠가버렸다… 근로감독관들은 창문을 뜯고 도망치고 있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준비한 달걀 수십 판과 밀가루로 근로감독관들이 타고 온 차를 완전히 도배했다고 한다이 사건으로 대우전자부품은 물론 지역에서도 업무조사는 중단됐지만대우전자부품노조 여성부장을 구속됐고여성부원 4명은 불구속됐다.” (170~171)

바로 곁에서 이런 옛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일러줄 선배선대들이 차츰 우리 곁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다모두가 은퇴하고 떠나면 우리는 누구에게 옛 경험을 물어야 하나챗지피티(chatGPT) 같은 에이아이(AI)에 물어야 하나인공지능이 형이 되고 언니가 되고 선배가 되어줄 것인가?

펜을 들자당신의 역사 후대의 자산

선배 활동가 양규헌이 들려주는 개인의 역사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역사적 개인의 무게가 실린후배들이 활동의 경구로 새길 만한 문장들이 있다가령 이런 것들이다.

“‘빨갱이라는 말의 위력은 인간관계의리조차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동자를 분열시키는데 최고의 명약이며 노동조합 내부를 교란하는 결정적 수단이자 언어였다.” (137)

노동조합은 수동적이고 형식적으로 조합원의 요구를 관철하는 대리기구가 아니라 요구를 조직하여 투쟁하는 투쟁조직이다따라서 노동자들은 며칠 간의 교육보다 하루의 파업(투쟁)으로 노동자의식이 급격히 성장한다.” (141)

한 역사적 개인의 경험은 그 자신의 것만은 아니다예컨대 양규헌은 자연인 양규헌이 아니라 전노협그리고 그가 몸담고 활동했던 조직만나서 함께했던 사람들과 어깨 걸고 활동했던 시간과 경험의 총체이다다시 말해 그가 살아온 일생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이 책의 제목처럼 걷고 보니 역사였던 것이다따라서 그 시간 동안의 경험과 교훈을 후배들과 함께 나누고 그 평생을 공동의 자산으로 남겨야 할 책임은 역사적 개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이기도 하다.

노동자역사 한내에서는 노동자 자기 역사 쓰기를 강조하면서 선배 노동운동가들이 자기 개인의 삶을 정리하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세 분이 매주 모임을 가지면서 각자의 삶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양규헌의 ⟪걷고 보니 역사였네⟫는 노동자 자기 역사 쓰기’ 책 작업의 첫 성과물로 묶여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펼쳐볼 1980~1990년대 뜨겁게 살았던 다른 많은 역사적 개인들은 저마다의 역사 쓰기 작업에 매진하기를 당부드리고 싶다일종의 회고록 쓰기 운동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운동적 삶과 지난 시간을 정돈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역사의 갈피에 자기만의 무늬를 가진 나뭇잎 한 장을 끼워넣어 주기를그것이 뒷날 역사를 들쳐볼 사람이 무릎을 치게 만들 표식이 되기를.

[도서구매] 

온라인서점(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928246)

노동자역사 한내(031-976-9744)

덧붙이는 말

양돌규는 노동자역사 한내의 운영위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