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라의 실용주의와 튀르키예와의 긴밀한 관계는 여러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 결과 아흐메드 알샤라(Ahmed al-Sharaa)는 지하디스트 지도자에서 반군 정치인으로, 그리고 마침내 시리아 대통령으로 변모했다.
아흐메드 알샤라(Ahmed al-Sharaa) 시리아 대통령. 출처: 시리아 정부 공식 X
2019년 봄이었다. 러시아 공군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이 이들리브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긴급한 상황이었다.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 시리아 내전에서 활동해온 이슬람주의 무장·정치 조직) 지도자인 아부 무함마드 알졸라니(Abu Mohammed al-Jolani)는 이들리브 중심부에 있는 한 안전 가옥에서 측근들과 함께, 튀르키예인들을 포함한 일부 외국 손님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개인적인 이야기 몇 가지를 꺼내놓았다.
“어렸을 때, 나는 내 미래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그가 의도적으로 힘을 주며 천천히 말했다. “그 꿈에서 나는 다마스쿠스의 에미르(군주)가 되었다.”
졸라니는 그 꿈이 좋은 징조였으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신의 계시라고 말했다.
그는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와의 전쟁이 힘들겠지만 결국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살라피적 배경을 지닌 인물들을 포함해 그의 측근들은, 그가 그 비전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거의 5년이 지난 지금, 졸라니는 자신의 전투명을 버리고 시리아 아랍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한때 꿈에서 자신이 되기를 바랐던 바로 그 “에미르”가 된 것이다.
이제 본명인 아흐메드 알샤라를 사용하는 43세의 그는, 자신을 “지하드 테러리스트”에서 정치가로 빠르게 탈바꿈시켰다.
이라크에서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알카에다 같은 지하디스트 조직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그의 이력을 고려하면, 이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아사드 왕조를 축출한 이후, 샤라는 과거에 멀리했던 세계 지도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수염을 다듬었으며, 터번과 토브를 벗고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했다. 그러는 동시에 노골적인 이슬람주의 영향에서 벗어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튀르키예와 지역 당국자들, 시리아 소식통들, 전문가들, 심지어 시리아 정부 내부 인사들까지도 이 변화가 사실상 ‘원형 국가’였던 이들리브에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이 샤라의 인물을 재형성했다고 본다.
“튀르키예는 그의 변신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아직 HTS 지도자였던 시절 직접 만났던 한 튀르키예 당국자는 <미들 이스트 아이>에 이렇게 말했다.
첫 접촉
이 당국자에 따르면, 샤라에게는 변화를 택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앙카라가 사실상 유일한 생명선인 영토에 고립된 상황에서 튀르키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튀르키예와의 첫 본격적인 접촉은, 당시 자브하트 파타흐 알샴으로 알려졌던 그의 조직이 2017년 이들리브의 바브 알하와 국경 검문소를 장악한 이후 시작되었다. 이곳은 유엔 인도적 지원이 통과하는 핵심 통로였다.
튀르키예가 국경 폐쇄를 결정하자, 샤라는 이를 관리하기 위한 민간 행정기구를 설립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조직을 직접 통제에서 한발 떨어뜨렸다.
튀르키예는 이후에도 아흐라르 알샴이나 누르앗딘 장기 같은 경쟁 반군 조직들을 그에 맞서 지원했지만, 결국 샤라는 이들리브에서 지배적 세력으로 부상했고, 이는 튀르키예 정부로 하여금 기존 입장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시리아 문제를 담당하며 샤라에 반대하던 튀르키예 보안팀은, 그가 권력을 공고히 해가면서 점차 교체되었다.
튀르키예가 그와 접촉하려 했던 데에는 추가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스타나 과정(시리아 내전을 관리·조정하기 위해 2017년부터 시작된 국제 협상 틀. 러시아, 튀르키예, 이란이 참여)에 따라 튀르키예는 이들리브 주변에 관측 초소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를 위해서는 HTS와 실질적인 협력 메커니즘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샤라는 결국, 마지못해, 이들리브 문제는 단일 세력의 지배 아래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튀르키예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이 탄생했다.”
이 과정에 정통한 한 튀르키예 안보 소식통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2017년에 창설된 HTS는 과거의 일부 경쟁 세력들을 통합했고, 보다 시리아적인 정체성을 채택했으며, 다른 파벌들이 참여하는 평의회를 구성했다. 이를 통해 HTS는 필요에 따라 튀르키예와 협력하거나 대립할 수 있는 더 큰 정당성과 유연성을 확보했다.
그 직후, 이들리브를 위한 민간 행정기구인 이른바 ‘구원 정부’가 출범했다.
튀르키예는 보다 민간적이고 통치에 초점을 맞춘 구조가 정당성 문제를 완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방식으로 구성하면, 이를 시리아 혁명의 연속이자 방어적 투쟁, 그리고 민간인 보호로 규정할 수 있다.” 당시 한 회의에서 한 튀르키예 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튀르키예는 구원 정부를 하나의 모델로 지원했다.” 또 다른 안보 소식통은 이렇게 덧붙였다.
새로운 전략
국제위기그룹(ICG)의 선임 자문위원 다린 칼리파는, 샤라가 문을 열기로 한 결정과 튀르키예가 HTS와 접촉한 과정은 양측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던 시점에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튀르키예의 군사 배치에 대한 메시지를 바꾸기 시작했고, 어조도 누그러뜨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튀르키예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칼리파는 또 샤라가 튀르키예가 방향을 바꾸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앙카라와 모스크바 사이의 취약한 휴전이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튀르키예를 이야기할 때는 정보기관과 군대 같은 국가 기관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
⟪민중에 의해 변모하다: 시리아에서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의 권력 장악으로 가는 길⟫(Transformed by the People: Hayat Tahrir al-Sham’s Road to Power in Syria)의 공동 저자인 제롬 드레봉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과 관료 조직은 HTS를 좋아한 적이 없었고, 이를 테러 조직으로 취급하며 구성원들을 계속 체포했다. 정보 부서만이 HTS를 실용적으로 상대했다.”
드레봉에 따르면, 양측은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
튀르키예는 또 다른 대규모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이들리브가 반군 통제 아래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약 19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이는 튀르키예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앙카라는 외국인 전투원들로부터의 위협도 억제하고자 했다.
“양측은 최소한의 공통 이해에 도달했다” 드레봉은 이렇게 말했다.
2020년 초, 이란과 연계된 민병대와 러시아 공군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이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자, 튀르키예는 또 다른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튀르키예 정부는 시리아 정부군의 목표물 수백 곳을 타격했고, 주 전역에 1만 2천 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하면서 HTS와 실질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접촉은 HTS의 성격을 점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튀르키예의 영향력은 간접적이었지만 매우 강력했다.” 드레봉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가 중화기 철수나 공동 순찰 조직 같은 새로운 요구를 할 때마다, HTS는 마지못해라도 이를 이행해야 했다.”
HTS 내부에서는 이러한 양보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들은 샤라에게 그들을 주변으로 밀어내거나 숙청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HTS는 변해야 했고, 그런 타협을 거부하는 급진 세력들을 제거해야 했다.” 드레봉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이 튀르키예와의 접촉이 낳은 가장 큰 효과였다.”
지하디스트 분열 이후 더 기민해진 대응
지난해 12월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가 붕괴한 이후, 한 튀르키예 고위 당국자는 앙카라가 “접촉을 통해” HTS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서양협의회(Atlantic Council) 연구원이자 오랜 시리아 관찰자인 오메르 외즈키질지크는 이 전략을 “접촉을 통한 변화”라고 표현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테러 조직으로 지정된 지하디스트 조직이 이런 방식을 통해 합법적 행위자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샤라가 알카에다와 결별한 이후에도 충성을 유지해온 후라스 알딘(Hurras al-Din) 조직을 HTS가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샤라는 후라스 알딘과 맞선 이후 튀르키예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외즈키질지크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HTS가 알카에다와 진정으로 결별했다는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계기였다.”
외즈키질지크는 튀르키예가 이 분열을 이해하고, 이들리브에서 교조주의자들과 실용주의자들을 분리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했다고 덧붙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샤라의 최측근인 샤이바니는 앙카라의 묵인 아래 튀르키예를 자유롭게 오가며 외국 관리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튀르키예 내부 인사들은 튀르키예 정부가 후라스 알딘에 관한 정보를 미국과 공유했고, 그 결과 미국이 해당 조직의 고위 지휘관들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믿고 있지만, 드레봉은 이 주장을 부인한다.
칼리파는 튀르키예가 HTS가 대외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는지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소수자에 대한 온건함과 관용을 장려했다고 강조했다.
“튀르키예는 그 누구보다 훨씬 큰 지렛대를 쥐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앙카라에게는 HTS가 기독교인 같은 소수자들과의 관계를 조정하고, 엄격한 이슬람주의 통치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튀르키예는 문제가 있는 집단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회를 인식한 샤라는 대외 접촉에서 유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수년간 그를 추적해온 한 시리아 소식통은 <미들 이스트 아이>에 이렇게 전했다.
“그는 이들리브에서 반대파에게는 가혹했지만, 동시에 3~4년에 걸쳐 구원 정부를 매개로 튀르키예를 통해 서방에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서방을 향한 접촉
2020년 무렵 샤라는 자신을 규율된 병사로 묘사하며, 자신은 단지 구원 정부의 ‘봉사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해 말이 되자 그는 튀르키예를 통해 서방 국가들과 간접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의 관리들은 인도적 지원 같은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그 또는 그의 대표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한 튀르키예 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접촉이 확대되자, 분석가들은 이들리브의 행정 체계를 아사드 통제 지역에서 악화되고 있는 통치 상황과 비교하는, 통치 중심의 보고서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튀르키예를 통해 이들리브를 방문했고, 국제적 관여 역시 점차 확대되었다.
2021년, 당시 여전히 졸라니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샤라는 PBS ‘프론트라인’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는 그가 처음으로 민간 복장을 하고 공개 석상에 등장한 사례였으며, 변화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드레봉에 따르면, 튀르키예는 이러한 전문가들의 방문이나 PBS 인터뷰를 직접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했다.
“이는 HTS가 단순히 국제 안보를 위협하는 알카에다 계열 조직이라는 인식을 깨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앙카라는 이를 세세하게 관리하지는 않았지만, 접촉이 가져올 이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2019년 최초로 이들리브 입국을 허가받은 전문가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칼리파는, 국제위기그룹(Crisis Group)을 위한 자신의 연구와 보도에 대해 튀르키예 정부가 개입하려 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여러 튀르키예 당국자들은, 샤라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이 그를 지하디스트 지휘관에서 이들리브의 민간인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둔 혁명적 인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외즈키질지크는 이들리브가 안정되자 HTS가 작지만 기능하는 국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도시 지역에서 경쟁 무장 조직들을 축출하고, 경찰력을 배치하며, 세금을 징수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치안이 보장되자 자금이 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이 조직 변모의 핵심 단계였다고 말했다.
한 고위 지역 당국자는 튀르키예 특사가 샤라에게 이렇게 조언했던 일을 회상했다. “당신은 외모가 좋다. 죽고 싶다면 잘생긴 순교자가 될 수 있겠지만, 살고 싶다면 시리아의 통치자가 될 수도 있다.”
드레봉은 샤라가 조직 내부의 급진 세력을 더 많이 통제할수록, 자신의 실용적 면모를 더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슬람이 정치적·사회적 역할을 한다고 믿는 이슬람주의자이지만, 명확한 이념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사상가라기보다는 행동가에 가깝다.”
러시아의 분산된 시선
2022년에 이르러 튀르키예와 샤라 모두 새로운 전환점에 도달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시리아 내 러시아의 군사적 존재를 급격히 약화시켰고, 이는 힘의 균형을 바꾸었다.
그해 말, 사르민의 한 주택에서 열린 대화에서 샤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모든 매듭이 풀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혁명은 2015년 이전의 경로로 되돌아갈 것이다.”
실제로 사태는 그렇게 전개되는 듯 보였다.
그 무렵 튀르키예는 이미 이들리브에서 HTS의 통제 아래 설립된 군사학교에 투자하고 있었다. 교재들이 번역되고, 훈련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으며, 정식 교육과정이 마련되었다.
이 군사학교는 아프가니스탄, 말리, 체첸 출신 전투원들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운영되었고, 매우 활발히 가동되었다. 반면 시리아 북부의 튀르키예 지원 반군 조직들은 여전히 군사학교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2023년에 이르러서야 하나를 설립하게 되었다.
한 튀르키예 당국자는 일부 영국 측 접촉 인사들 역시 샤라와 HTS와의 접촉에 나서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결국 조너선 파월의 역할로 이어졌다. 당시 분쟁 해결 비정부기구 인터미디에이트(Inter Mediate)의 이사장이었고, 현재는 영국 총리의 국가안보보좌관인 그는 2023년에 여러 차례의 방문과 워크숍을 조직해 HTS가 스스로를 개혁하도록 돕는 데 관여했다.
미국의 전 시리아 대사 로버트 포드 역시 지난해 한 정책 포럼에서 이러한 접촉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HTS가 역량을 확대하고 통제력을 강화해가면서, 샤라는 추가 영토를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공세를 개시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앙카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튀르키예 당국자들은 이를 거부하며, 그러한 행동이 러시아를 자극하고 또 다른 인도적 재앙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외즈키질지크는 다마스쿠스와의 화해 노력이 실패하고, 러시아 당국자들이 점점 적대적인 발언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결국 튀르키예가 거부권을 철회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러시아의 시리아 특사 알렉산드르 라브렌티예프는 튀르키예가 시리아에서 “점령 세력처럼 행동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튀르키예 정부가 자국 군대 철수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지 않는 한, 다마스쿠스가 대화에 나서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후 열린 아스타나 회담 역시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러시아는 튀르키예군 철수 일정표를 요구했고, 이는 앙카라로 하여금 입장을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당시 튀르키예의 관점은, HTS가 알레포 서부 농촌 지역을 장악하고 도시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외즈키질지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도시마다 순식간에 샤라의 군대에 함락되는, 그 작전의 번개 같은 속도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그와 함께 있었던 한 시리아 소식통은 샤라의 도취 상태를 이렇게 전했다.
“혁명을 다시 불붙인 알레포 작전이 진전되면서, 캅탄 알자발과 그 주변 마을들이 차례로 점령되자 샤라는 극도로 기뻐했다. 작전실에서 그는 알레포 중심부를 향해 진격하는 부대들과 무전으로 대화했다. 한때 서부 전선에서 공세가 멈췄지만, 위구르인 일부를 포함한 전투원들이 오래된 물길 터널을 통해 침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알레포가 함락되었다. 샤라는 환희에 찼다. 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마가 함락되자 그는 혁명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작전실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들어 올리고 기쁨에 차 외쳤다. ‘다마스쿠스의 사람들이여, 증언하라! 역사가 여기에서 쓰이고 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감정을 드러낸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출처] Syria: How Turkey helped engineer Ahmed al-Sharaa's rise to power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라깁 소일루(Ragip Soylu)는 미들 이스트 아이(MEE)의 튀르키예 지국장으로, 앙카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레벤트 케말(Levent Kemal)은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기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