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창설 이후 가장 심각한 재정·정치 위기 가운데 하나에 직면한 유엔은, 세계 평화와 인권을 지키는 본래의 역할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네바 팔레 데 나시옹(Palace of Nations)에서는 유엔 예산 위기 속에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밤마다 전력을 차단하고 있다. 출처: Unsplash, Gavin Li
취리히 — 요즘 제네바의 팔레 데 나시옹(Palace of Nations)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전력이 차단된다는 안내문이다. 유엔 사무국이 자리 잡고 있고 매년 수천 건의 국제회의가 열리는 이곳은 이제 전기 비용과 보안 인력을 줄이기 위해 주말에도 문을 닫는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한동안 멈춰 있고, 본부 외부 조명과 난방도 줄어든 상태다.
여러 의미에서 싸늘한 분위기다.
유엔은 현재 안토니우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사무총장이 지난 1월 “임박한 재정 붕괴”라고 표현한 상황에 놓여 있다.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여러 유엔 기구에서 해고가 이어졌고, 지난해 5월 제네바에서는 인력 감축과 긴축에 항의하는 유엔 직원들의 시위도 벌어졌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유엔 관계자이자 현재 스위스 대표부 외교관은 “직원들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말했다. 업무는 그대로인데 예산이 크게 줄어들면서 많은 직원이 두세 명 몫의 일을 맡고 있다. 단기 계약이 일반화됐고, 장기적인 경력 전망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그는 설명했다.
독일과 스위스 언론에서 오랫동안 유엔을 취재해온 베테랑 기자 안드레아스 추마흐(Andreas Zumach)는 이것이 유엔 80년 역사에서 “최악의 예산 위기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제네바 인권이사회에서는 수어 통역이 축소되면서 청각장애인 대표와 참관인의 회의 접근성이 떨어졌다. 긴축의 가장 심각한 영향은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이 차드와 우크라이나 같은 국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데서 드러난다. 식량 배급도 줄어들어 케냐 등지의 난민들은 기존의 4분의 1 수준만 받고 있다.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늘 그렇듯 여성, 어린이, 환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 위기의 원인은 분명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역사적으로 유엔 최대 기부국이었던 미국은 수십억 달러의 분담금을 납부하지 않았고—의무 분담금만 해도 21억 9천만 달러에 이른다—인도주의 지원과 인권 관련 수십 개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도 중단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전체 유엔 예산의 약 80%를 차지하는 자발적 기여금에 의존한다. 트럼프는 세계보건기구, 유엔 인권이사회,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하며, 이를 모두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황이 배신처럼 느껴진다면, 미국의 유엔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이 기구만큼이나 오래됐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체계적인 약화는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기부터 본격화됐다. 그는 새로 가입한 국가들이 친소련 성향을 보인다고 판단하고, 자금 지원을 압박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의 이념적 동지였던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도 이에 따라 1985년 유네스코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유엔은 살아남았다. 긴축 속에서도 작동하는 법을 배웠다.
현재도 각 회원국이 기본 운영을 위해 납부하는 의무 분담금은 여전히 들어오고 있다. 이 금액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미납 금액의 95%는 미국이 부담해야 할 몫이다.
추마흐는 “유엔은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유엔은 193개 회원국의 집합이며, 특정 국가의 호의나 적대가 아니라 각국 정부의 협력 의지로 유지되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국가들에게 유엔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고, 식량 공급을 이어가는 기관”이라고 강조한다.
추마흐에 따르면, 미국은 재정적 영향력과 달리 실제 운영에서는 그만큼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것은 아니다. 1989년 채택된 아동권리협약은 유엔 모든 회원국이 비준했지만, 단 한 나라—미국—만이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 오타와 지뢰금지협약 등도 마찬가지다. 많은 경우 세계는 미국의 비준 없이, 때로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정을 추진해왔다. 미국이 서명하지 않은 조약이 너무 많아 하나의 패턴을 이룰 정도다. 그래서 유엔 회원국들은 수십 년 동안 미국과 함께가 아니라, 미국을 우회해 합의를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
정상부의 마비
전쟁과 집단학살, 세계적 권력 경쟁이 벌어지는 시점에서, 전쟁을 주도하거나 지원하는 국가들 가운데 다수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중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이라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2023년 10월 이후 유엔 내부에는 공포 분위기가 퍼졌고 고위 관계자들은 살해 위협까지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사무총장을 공격하고 동예루살렘의 유엔 난민기구 사무소를 강제로 철거한 일은 유엔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전례 없는 사건이다. 그는 안보리 회의장에서 목격되는 적대감의 수준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과거 동맹국들은 이제 적극적인 적대 세력이 됐다. 문제는 단지 재정이 아니라 이념의 붕괴다. 1945년 유엔 헌장에 담긴 평화 유지와 인권 보호 같은 가치가 공개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유엔 회의장은 현재 세계 정치의 퇴행을 그대로 반영한다.
오늘날 강대국 간 지정학적 긴장은 안보리를 사실상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상임이사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거부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안보리 개혁은 유엔 헌장을 수정해야 가능하지만, 그 개정에는 바로 그 특권을 가진 국가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의 필리프 볼로피옹(Philippe Bolopion) 사무총장은 <월드 리포트 2026>에서 “세계 인권 체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 내부의 변화
그럼에도 유엔은 과거에도 강대국을 우회해 행동할 방법을 찾아왔다. 현재 국가 지도자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있는 국제형사재판 역시 거부권을 가진 강대국들의 반대 속에서 유엔 체제 안에서 구상되고 만들어졌다. 시민사회 단체의 지지를 받은 국제적 연대가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Kofi Annan)은 오래전부터 안보리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는 이미 1997년에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현재도 개혁 논의는 진행되고 있지만,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 정도로 점진적이다. 예를 들어 최근 안보리 거부권이 행사될 때마다 총회에서 이를 논의하도록 한 조치는 큰 외교적 노력의 결과지만, 실제 변화는 제한적이다.
추마흐는 지금 유엔에 필요한 것은 더 적극적인 사무총장과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들의 강한 연대라고 말한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조직이 처한 위기를 반복해서 분명하게 언급해왔지만, 점점 더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무총장의 역할이 본질적으로 “총장이라기보다 비서에 가깝다”고 표현하며, 그 권한은 결국 이를 행사하는 개인의 역량에 크게 좌우된다고 지적했다.
유엔을 이끌었던 인물들 가운데 트뤼그베 리(Trygve Lie)와 코피 아난은 “강대국 정부에 직접 맞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고 추마흐는 말한다. 2027년 구테흐스를 대신할 후보로 거론되는 칠레 전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와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 라파엘 그로시(Rafael Grossi) 역시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강대국들이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한편 유럽은 오랫동안 다자주의 질서를 충실히 지키는 관리자를 자처해왔지만, 실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추마흐는 이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유럽 정부들은 오랫동안 미국의 힘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중동 문제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늘 눈치를 본다”고 그는 말한다.
추마흐는 “유럽은 잘못되게도 유엔을 세계의 먼 지역들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신 유럽이 미국의 하위 파트너가 아니라 독자적인 주체로서 국제 정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유럽이 군사 강국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인다.
앞으로 무엇이 남았나
지난해 9월 트럼프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했다. 대부분의 평가에 따르면, 그 연설은 조롱과 불만으로 가득 찬 발언이었다. 그는 기후 변화를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기”라고 주장했고, 과거 뉴욕 유엔 본부 개보수 계획이 무산된 것을 비판했다. 유럽 국가들의 이민 정책을 비난하는 와중에도, 그는 “약속했던 대리석 바닥조차 깔리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국제기구를 약화시키거나 방해하려는 시도는 미국 우파가 수십 년 동안 추진해 온 프로젝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실행 속도와 규모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크다. 만약 유엔이 재정과 본래의 역할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제네바나 뉴욕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트럼프가 구상한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 같은 대안적 틀이 이미 대기하고 있다. 유엔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기능을 잃어가는 방식으로 붕괴된다면, 그 빈자리는 더 배타적인 체제들이 채울 가능성이 크다.
유엔은 지난해 80주년을 맞았다. 이 기구가 100년을 넘길 수 있을지는, 각국 정부가 자신들이 내세우는 가치에 실제로 비용을 지불할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 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스위스 등지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은 여전히 이 분야에서 일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는 유엔이 지닌 가치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신호다.
이 기구는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세계적 평화의 틀이다. 이는 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öld)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유엔은 인류를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 제네바의 불은 오후 5시에 꺼지고 있다. 누군가는 다시 그 불을 켜야 한다.
[출처] Can the United Nations Survive Without the US?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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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콜리(Alice Kohli)는 물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교육받았다.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다양한 언론사와 비정부기구에서 일했으며, 탐사보도 분야를 전문으로 한다. 또한 고등학교 물리 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