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부르고뉴식 기술관료주의

에른스트 윙거의 허무주의에 대한 성찰

내가 백합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래쪽 포도밭 길에서 가느다란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비탈을 더듬듯 올라왔다. 이어 정문 앞에서 자동차 한 대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올 예정은 없었지만 나는 문으로 내려갔다. … 그곳에는 거의 들리지 않는 벌레의 날갯짓처럼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강력한 자동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에는 신부르고뉴의 고위 귀족에게만 허용된 색상이 칠해져 있었고, 그 앞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마우레타니아인들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볼 때 사용하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브라크마르라고 밝혔다.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를 신부르고뉴 혈통의 귀족인 젊은 순미라 공(Prince of Sunmyra)이라고 소개했다.

에른스트 윙거가 1939년에 발표한 고전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이렇게 전환점을 맞는다.

1920년대 에른스트 윙거는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를 다룬 독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떠올랐다. 독일 최고의 무공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를 받은 윙거는 《강철 폭풍 속에서》(1920)에서 참호전의 경험을 생생하면서도 때로는 환각적인 언어로 그려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윙거는 기술적 근대성을 예언하는 민족주의적 사상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통적인 19세기 규범이 내세우던 모든 주장을 넘어 근대적 힘을 전면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동원》(Total Mobilization, 1930)과 《노동자》(The Worker, 1932)는 이 시기의 정점을 보여주는 저작이었다.

이처럼 근대를 긴박하고 지극히 동시대적인 시각으로 진단했던 저작들과 비교하면,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에 출간한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하나의 단절을 보여준다. 지식인 나치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이 윙거의 비전을 행동으로 옮긴다고 여겼겠지만, 윙거 자신은 제3제국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1930년대 초 그와 교류했던 하이데거나 슈미트 같은 인물들과 달리 윙거는 나치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행을 다니고 출간하지 않은 원고를 쓰면서 보덴호(Lake Constance)의 위버링겐(Überlingen)이라는 목가적인 지방 도시로 물러났다. 이 시기에 윙거는 현재가 아니라 여러 역사적 순간을 합성해 상상한 시대를 배경으로 《대리석 절벽 위에서》를 구상했다.

윙거는 강력한 전조등을 장착한 고성능 자동차가 저녁 무렵 포도밭의 은신처를 찾아오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는 1910년대 이후 어느 시기의 프랑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이다.

하지만 그 자동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제복과 문장을 갖춘 위계적인 귀족 질서의 구성원이다. 이들은 마우레타니아인이라는 전사 집단 특유의 몸짓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이름조차 프랑스 중세의 분위기를 풍긴다. 브라크마르는 짧은 검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문장은 신부르고뉴의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사라진 부르고뉴 공국(Principality of Burgundy)은 기사도적 명예와 세련된 중세풍을 상징하는 대명사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미래적이면서 동시에 중세적이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섞은 기묘한 문화적 칵테일이다. 이상한 조합이기는 하지만 낯설지는 않다. 봉건제와 공상과학을 결합한 이런 설정은 이후 20세기 내내 공상과학 작품에 영감을 주게 된다. 인공지능 알고리즘도 이런 조합에는 이미 충분히 학습돼 있다.

윙거의 책에서 우리는 머나먼 은하계가 아니라 보덴호 주변의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을 본뜬 듯한 지상의 공간에 있다. 윙거가 상상한 세계에서 서쪽에는 부르고뉴가 있고, 북쪽에는 끔찍한 오버푀르스터(Oberförster·수석 산림관)가 지배하는 숲이 있으며, 남쪽에는 알프스산맥이 있다.

그렇다면 호전적인 이 두 신부르고뉴인은 왜 저녁에 화자를 찾아온 것일까?

브라크마르와 순미라 공에게는 임무가 있다. 이들은 목가적인 세계를 전복과 파멸로 위협하는 음험한 세력인 오버푀르스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작전이 끔찍한 실패로 끝나면서 윙거의 짧은 소설은 참혹한 절정으로 치닫는다.

다음은 윌리엄 H. 레이(William H. Rey)가 당시와 가까운 시기에 쓴 훌륭한 서평의 간략한 설명이다.

소설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숲의 야만적인 악마 오버푀르스터가 문명을 붕괴시키는 모습을 목격하는 두 형제의 이야기다. 이들이 옛 질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기독교 사제 람프로스 신부(Pater Lampros)와 고귀한 순미라 공이 동지가 되고, 두 사람은 재앙이 닥치자, 자신을 희생한다. 람프로스는 수도원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목숨을 잃고, 순미라는 오버푀르스터의 권력을 무너뜨리려다 실패한 뒤 그의 인간 이하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브라크마르도 이 시도에 가담하지만, 그는 옛 질서를 수호하는 인물이 아니라 권력을 놓고 오버푀르스터와 경쟁하는 근대적 경쟁자다. 결국 오버푀르스터가 문명 지역 전체를 파괴하고 정복하면서 두 형제는 나라를 떠나야 한다.

《대리석 절벽 위에서》를 단순하게 해석하면 히틀러 독재를 그린 우화라고 볼 수 있다. 오버푀르스터는 총통(Führer), 즉 히틀러이거나 어쩌면 그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일 수 있다. 순미라 공은 독일 귀족 저항세력의 일원, 19447월 결국 운명을 맞았던 인물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할 뿐 아니라 설득력도 떨어진다. 오버푀르스터와 총통은 모두 사악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거의 없다. 오버푀르스터가 추진하는 파괴적인 계획의 핵심은 무엇보다 야생적이고 파괴적인 동물적 폭력을 해방하는 데 있다. 히틀러가 꿈꾼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히틀러보다 더 가학적인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오버푀르스터가 불러일으키는 원초적 폭력의 이미지와는 좀처럼 맞지 않는다.

윙거는 폭력에 관해서라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묘사한 전투 장면은 생생하고 때로는 외설적일 정도로 노골적이다. 서로 다른 시대가 뒤섞이는 부조화를 더 강화하듯 가장 폭력적인 장면에는 군견들이 등장한다. 윙거는 그중 한 품종이 악명 높은 쿠바의 노예 추적용 마스티프에서 교배됐다는 사실까지 굳이 알려준다.

윙거는 20세기에 특유한 공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폭력의 역사 전체를 불러내려는 듯하다. 화자와 그의 동료들이 오버푀르스터의 세력과 벌이는 전투에는 개들의 울부짖음과 짖는 소리가 뒤섞이고, 석궁과 중세의 공성무기가 등장하며, 시체의 가죽을 벗기고, 샴페인을 들이켜는 전사들이 조종했던 이름 모를 파괴 기계에 대한 기억까지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전설적인 로이 배티의 독백을 조금 연상시킨다.

나는 너희가 믿지 못할 것들을 봤다. 오리온의 어깨 너머에서 불타오르는 공격함을 봤다. 탄호이저 게이트(Tannhäuser Gate) 근처의 어둠 속에서 C-빔이 반짝이는 것도 봤다. 그 모든 순간은 빗속의 눈물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제 죽을 시간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 I've seen things

윙거의 중편소설을 폭력적인 요소들을 짜깁기한 작품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근대의 전사형 기술자, 폭력적인 비전가, 권력의 허무주의적 지휘관에 대한 대단히 독특한 심리적 초상을 담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결정적인 인물은 화자가 아니다. 화자는 종교와 자연사로 눈을 돌리며 자신의 폭력적인 과거를 극복하려 한다. 초월적인 자기희생을 선택하는 귀족 순미라 공도 아니다. 핵심 인물은 마우레타니아 전사이자 순미라 공의 동료인 브라크마르다. 이 짧은 소설에서 윙거가 진정한 심리적 깊이를 부여해 묘사한 유일한 인물이 브라크마르이며, 그는 모순과 양면성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윙거는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이전부터 브라크마르를 알고 있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하지만 그가 자주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언제나 잠깐씩만 만났다. 그는 키가 작고 피부가 검으며 깡마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가 다소 거친 성품을 타고났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마우레타니아인과 마찬가지로 재치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농담 삼아 호랑이 사냥꾼이라고 부르던 부류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이국적인 모험에 뛰어드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깊은 크레바스가 갈라진 산악지대를 스포츠 삼아 오르듯 위험을 찾아다녔다. 그는 평원을 경멸했다. 강인한 심장을 가진 그는 장애물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미덕에는 경멸이 함께 따라다녔다. 권력과 지배를 열렬히 추구하는 모든 사람처럼 그의 가장 광적인 꿈은 유토피아적 세계를 향했다.

그는 이 세상에는 언제나 두 종족, 즉 주인과 노예가 존재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서로 섞였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늙은 페타르디에(Petardier)의 제자였으며 스승처럼 두 종족을 다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조잡한 이론가가 그렇듯 그는 당대에 유행하는 학문을 먹고 살았으며 특히 고고학에 몰두했다. 그는 우리가 삽으로 땅을 파면 애초에 머릿속에 품고 있던 증거를 어김없이 찾아내게 된다는 사실을 의심할 만큼 섬세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이전의 많은 사람들처럼 인류 최초의 요람을 발견했다.

그가 발굴 결과를 발표한 모임에 우리도 참석했다. 그는 머나먼 사막에서 기묘한 고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광활한 평원 위에는 거대한 반암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기둥들은 오랜 풍화를 견디며 요새나 바위섬처럼 서 있었다. 브라크마르는 이 기둥들을 타고 올라가 높은 고원에서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과 태양신전의 폐허를 발견했다. 그는 그 규모와 특징을 설명한 뒤 그 땅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는 눈이 닿는 곳까지 목동과 농부들이 가축 떼와 함께 살아가는, 푸르고 무성한 초원을 묘사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

그는 오래전에 말라버린 강 위로 보랏빛 갑판을 가진 배들이 항해하게 했다. 우리는 백 개의 노가 벌레처럼 규칙적으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심벌즈가 부딪치는 소리와 불운한 갤리선 노예들을 후려치는 채찍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이미지야말로 브라크마르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꿈을 구체적인 현실로 그려내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대단히 위험한 부류였다.

윙거 자신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 대목은 뼈아플 정도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실제로 윙거 자신도 구체적으로 꿈꾸는사람이었다. 그리고 윙거는 여기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다.

브라크마르와 오버푀르스터의 생각과 행동에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는데도 브라크마르가 이 싸움에서 그에게 맞서려 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단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목표가 같고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도 같다는 뜻으로 혼동하는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 차이는 오버푀르스터가 마리나(Marina), 즉 호숫가의 목가적인 도시 문명을 야수들로 채우려 했던 반면, 브라크마르는 그곳을 노예와 포로 군대를 공급하는 땅으로 보았다는 데 있었다. 근본적으로 이는 마우레타니아인들 사이의 내부 갈등이었으며 여기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완성된 허무주의와 통제되지 않는 무정부 상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만 말해두면 충분하다.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인간의 정착지가 황무지가 될지 원시림이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이 정도면 오버푀르스터를 히틀러나 스탈린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배제할 수 있다. 야수들이 날뛰는 원시림의 무정부 상태는 두 사람 가운데 누구의 이상도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브라크마르에 더 가까웠고, 같은 세대의 다른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윙거가 말하려는 핵심일 것이다.

브라크마르는 완성된 허무주의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지성은 차갑고 뿌리가 없었으며 유토피아에 매혹됐다. 같은 부류의 모든 사람처럼 그는 삶을 시계장치의 작동으로 바라봤고, 따라서 그의 눈에 폭력과 공포는 삶이라는 시계를 움직이는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동시에 그는 제2의 인공적 자연이라는 관념에 빠져들었으며 인간이 만든 꽃의 향기와 모조된 감각적 쾌락에 취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창조는 질식했고, 장난감의 기계장치처럼 다시 조립됐다. 그의 이마에는 서리꽃이 피어났다. 그를 바라보면 누구나 그의 스승이 남긴 심오한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막이 자란다. 자기 내면에 사막을 품은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

그리고 윙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우리를 브라크마르에게 점점 더 가까이 데려간다. 우리가 이 인물을 느낄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브라크마르에게 어느 정도 연민을 느꼈다. 그가 두려움을 몰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인간이 돌에 가까워질수록 용기를 인정받을 이유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를 끌어당긴 것은 미묘한 고통, 즉 구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의 쓰라림이었다. 그는 헛된 분노에 사로잡힌 아이가 화단을 짓밟듯 세상에 복수하려 했다. 그는 자신조차 아끼지 않았고 차가운 대담함으로 공포의 미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향이라는 감각을 잃으면 모험으로 가득한 먼 세계를 찾아 떠난다.

브라크마르는 자신의 사고를 삶에 맞춰 만들었고 사상도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진정한 생명력이 없는 증류물과 같았다. 어떤 음식에든 풍미를 더해주는 풍성함이라는 감미로운 요소가 없었다. 그의 논리에서는 단 하나의 결함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모든 계획은 메말라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균열 하나가 종의 울림을 앗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에게 권력은 생각 속에서 지나치게 많이 드러났고, 그란데차(grandezza), 즉 타고난 디신볼튀르(disinvolture)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버푀르스터를 따라갈 수 없었다. 오버푀르스터는 오래된 사냥 재킷을 입듯 권력을 걸쳤고, 그 재킷은 흙과 피에 젖을수록 그의 몸에 더욱 편안하게 맞았다.

난해한 어휘는 윙거가 독자를 현재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역사적 파스티슈를 구성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궁금한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디신볼튀르(disinvolture)’는 프랑스어 désinvolture와 이탈리아어 disinvoltura에서 유래했다. 거리낌없이 자유롭고 구애받지 않는 태도를 뜻하는 명사로, 때로는 경박하거나 무심한 태도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귀족적인 여유를 뜻한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는 윙거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이상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온갖 역사적 장식에도 불구하고 윙거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브라크마르에 대한 묘사에서다. “브라크마르는 자신의 사고를 삶에 맞춰 만들었고 사상도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막스 베버의 철창(iron cage)’이든,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라는 진부한 표현이든 그런 상투적인 개념을 넘어 권력의 성격을 그려낸 초상이다.

결국 윙거가 자기 자신에 관해 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권력의 허무주의를 꿰뚫어 본 이 묘사는 그의 지적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1차 세계대전과 그 후 오랫동안 윙거는 브라크마르라는 인물상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대리석 절벽 위에서》에 이르러 윙거는 그곳에서 빠져나갈 길을 상상하려 한다.

오버푀르스터와 그의 끔찍한 무리에게 붙잡힌 브라크마르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후 이야기는 화자와 그의 형제가 이어간다. 이들은 의무의 부름에 응해 브라크마르와 순미라 공을 따라 전투에 나선다. 오버푀르스터가 풀어놓은 피에 굶주린 악마 같은 군견들의 폭력 앞에서 이들 역시 패배한다. 하지만 윙거에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윌리엄 H. 레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 화자와 그의 형제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생명의 힘이 현실의 유일한 차원도 아니며, 결코 가장 높은 차원도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이들은 자연의 원초적인 풍요 속에서 무한한 생명력의 혼돈에 법칙과 질서를 부여하는 정신적 구조를 발견한다. 18세기 자연학자 린네(Linnaeus)언어라는 원수봉을 들고 동식물 세계의 혼돈으로 들어가는존경받는 안내자이자 모범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린네의 영향을 받은 형제는 정원에서 자발적인 생명력과 정신적 질서가 이상적으로 결합한 모습을 본다. 섬세한 꽃의 형태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기억해 보라. “내가 백합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래쪽 포도밭 길에서 가느다란 푸른빛이 번쩍였다.” 이들은 감각적인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성한 비밀을 동시에 발견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통찰에는 그에 상응하는 윤리가 필요하다.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을 기록한 작품이다. 폭력적인 에너지를 끌어안는 니체적 태도가 좋은 삶의 모든 가능성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위험으로 드러난다. 그 위협에 대한 해답은 자유와 책임, 대지의 힘과 정신의 힘을 결합하는 인본주의적 이상이다.

그러나 윙거는 단순히 윤리적 주의주의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오버푀르스터의 힘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가 폭력과 파괴를 통해 거둔 승리도 우연이 아니다. 허무주의의 부상에는 역사적 조건이 존재한다.

허무주의가 부상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 사라지고 종교적 토대가 약화했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에서는 합리주의와 과학적 비판의 영향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 오버푀르스터와 브라크마르 가운데 어느 누구도 문화적 위기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두 사람은 도덕적·정신적 가치의 쇠퇴가 만들어낸 기존 상황을 이용할 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명의 적과 정치나 군사의 영역에서 싸우는 것만으로는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다. … 자유주의도, 윙거는 자유주의를, 허무주의를 역사적으로 준비한 사상으로 본다, 보수주의도, 이미 사회적·도덕적 기반을 잃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적 위기의 해법이 될 수 없다. 힘은 공포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어서 허무주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윙거를 절망에서 구해내는 것은 정신적 각성에 대한 희망만이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상상하는 방식이다. 결정적으로 윙거는 아마도 슈펭글러(Spengler)의 영향을 받아 역사를 순환하는 과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레이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윙거는 문화가 쇠퇴하는 과정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적 필연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순환적 역사관은 체념과 희망을 기묘하게 결합한다. 문명의 위기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체념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추가 왕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국면일 뿐이며 이후 재생의 시기가 찾아온다는 점에서는 희망을 품는다. … 이제 역사도 자연처럼 현상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역사적 격변은 신성한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신성한 질서는 언제나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오버푀르스터의 승리가 역사적 사건에 불과할 뿐 형이상학적 결론은 아니라는 뜻이다. … 재앙과 공포의 한복판에서 마리나의 기독교 공동체는 신에게 도움을 구한다. 윙거는 이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제시한다. 다시 태어난 이들의 신앙은 영원한 질서에 기초한 새로운 문명의 씨앗으로 등장한다.

윙거의 사고 과정을 분석한 레이의 글은 많은 것을 밝혀주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다. 결국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때때로 아름다운 작품이기는 하지만 현실도피의 한 형태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인상적인 것은 윙거가 자신이 벗어나려 했던 세력들을 그려낸 방식이다. 우리가 읽고 또 읽어야 할 것은 권력을 거칠게 숭배하는 광신자들, 자신에게 유리한 고고학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자들, 메마른 유토피아를 설계하면서 인간이 만든 꽃의 황홀한 향기로 자신의 미묘한 고통을 달래는 자들을 향한 그의 경고다.

[출처] Chartbook 472 Neo-Burgundian technocracy: Ernst Jünger’s reckoning with nihilism.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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