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의 계엄 후 66일이 흘렀다. 시린 겨울, 두 달이 넘도록 시민들은 광장을 지키고 있다. 광장을 밝힌 색색의 무지개 불빛들은 선을 넘고 연결하며 투쟁의 현장 곳곳을 새롭게 밝히고 있다. '꿀벌'을 지키려 분주히 내달리는 '말벌 아저씨'처럼, 투쟁하는 이들의 곁으로 달려와 '동지'가 되었다. 남태령의 농민들 곁에서, 조선소의 하청 노동자들 곁에서, 불탄 공장 위를 지키는 여성 노동자들 곁에서, 이른 아침 지하철 역 장애인들 곁에서, 다시 어딘가 생을 걸고 분투하는 이들 곁에서, 새로운 광장을 밝히고 있다.
당신의 존엄이 곧 나의 존엄이라 여기며, 오늘도 거리에 나서는 '말벌 동지'들과 함께, 신년기획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산 저는 전직 군인이고 현직 사무 노동자입니다. 30대구요, 논바이너리입니다.
명지 저는 광장식으로 소개하자면 20대 무성애자 시스젠더 페미니스트 여성입니다. 대학원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은 저는 광장식으로 소개할 만한 정체성은 없고요. 놀랍게도 노조원이나 활동가나 상근자가 아닙니다(웃음). 요즘 말하는 그 '말벌 시민'입니다. (명지: 배우지망생이라는) 네, 배우 지망생, 처음으로 광장에서 밝힌 정체성은 그거였어요.
삿갓 저는 김삿갓입니다. 저도 제가 아직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저와 관련된 유일한 진실은 제가 고양이를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고양이 알러지 6등급이 있어서 고양이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그 사실 하나뿐입니다.
12월 3일 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떤 마음으로 광장에 나서게 되었나.
명지 3일 계엄령이 내렸을 때 저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어요. 택시를 타면 여의도까지 15분이 걸리는 곳에 살고 있는데, 당장 일을 팽개치고 나갈 수는 없어서 집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죠. 그날 새벽에 죄책감이 너무 심했어요. 그래서 다음날부터 노트북을 들고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후에는 여의도에서 이틀은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했죠.
저는 언제나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어떤 세상이 와야 하고 무엇을 보아야 하고 우리가 무엇에 더 주목해야 하는지를 얘기하는 것이 문학이라고도 생각해왔어요. 그런 문학들을 사랑해 왔는데 제가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진실이고, 진실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제가 사랑하는 문학이 말하는 것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건 제가 사랑한 것들을 배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현산 저는 그날 밤 10시 50분 경에 상황을 알게 됐어요. 당시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가서 혹 피해를 드릴까봐 가지 않았는데, 죄책감이 굉장히 컸어요. 그 소식을 들은 순간 망설이지 않고 뛰쳐나가는 사람들이 거기에 분명히 있었고, 그 분들이 먼저 간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희생이라는 게 있잖아요. 예상이 되잖아요. 무서울 텐데도 불구하고, 그걸 참지 않고 누르지 않고 뛰쳐나간 걸 아니까, 그분들이 저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인 걸 아니까 죄스러운 마음들이 컸어요. 그후로 5일 즈음부터 계속 집회에 나갔어요.
예은 저도 12월 4일에 처음 집회에 나갔는데, 그 후에 하루도 안 빠지지 않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어요. 3일 밤에는 택시를 타고 여의도에 가려고 했는데, 택시비가 5만 원 정도 나올 것 같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고민을 했었어요. 그렇게 택시비로 고민하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비참한 마음이었어요. 아침 첫차를 타고 화가 난 상태로 집을 나섰고, 9시 광화문에 기자회견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그게 민주노총의 기자회견이었죠. 그 후로는 계속 이렇게 연대를 하고 있어요.
대단한 마음 같은 건 없었어요.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 비겁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어린 시절에 힘이 없어서 부당한 어른들에게 소리 지르지 못했던 나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으니 나가겠다, 그런 마음이었어요.
삿갓 저는 3일 밤에 전북 익산에 있었어요. 바로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일단은 집에 있었는데, 누워서도 잠이 안 오고 무언가를 먹는 것조차도 굉장히 죄스러웠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더 있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내가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자고 밥 먹는 동안에 다른 시민들은 엄동설한에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가 부끄러웠죠. 이후에 인천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7일에 면접에 합격하고 나서는 바로 여의도에 가서 집회에 참여했어요. 그 이후로는 제가 토요일까지 일을 하는데, 퇴근해서 바로 집회에 가고, 함께 밤을 새우고 그렇게 참여해왔어요.
전장연 투쟁에 연대한 예은. 멜로디언1짱
퇴진 광장 이전에도 집회나 사회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을까.
예은 저는 진짜 경험이 없었어요. 다들 되게 오랫동안 운동권에 있었던 걸로 많이 오해를 하세요(웃음). 관심은 항상 있었는데 현장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과거에 저는 무브먼트 운동 말고(웃음) 스포츠 운동을 했었기 때문에, 훈련을 쉬는 날이 설날 당일하고 추석 당일 정도였어요. 물리적으로 집회에 나오기가 어려운 구조였죠. 요즘은 약간 한풀이 하듯이 모든 집회에 다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현산 제가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없었는데 화는 많았어요(웃음). 무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좌파적인 시각은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가족 전체의 분위기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구요.
삿갓 저는 박근혜 퇴진 시위에도 참여했던 경험이 있지만 무언가 사회운동 경험이 있다거나 활동가이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명지 저는 공립학교에 다니면서 전교조 선생님들께 굉장히 좋은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랐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국정 교과서 반대 대자보를 붙였었고, 3학년 때는 박근혜 퇴진 시위 할 때였는데 박근혜랑 최순실만 꼬리 자르게 하면 안 되고 관련자를 다 처벌해야 된다라는 삐라를 만들어서 전교에 뿌린 적도 있고요. 대학 면접을 일주일 앞두고도 '낙태죄' 폐지 시위에 나갔었고, 수능이 닷새 남았는데 광화문에 가서 박근혜 퇴진을 외쳤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학부 시절에는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해서 사회 활동을 거의 못했었어요. 과거의 저에게, 싸우고 있는 친구들에게 너무 부끄럽더라구요. 이번에도 바쁘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부끄러운 기억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어요. 언젠가의 내가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서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노트북을 들고 거리에서 밤을 새면서 일을 하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광장에서 무엇을 감각했을까. 어떤 변화와 희망을 발견했을까.
현산 한국사회에서 박근혜 탄핵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 미국사회에서 트럼프에 맞선던 많은 운동들 이후에 다시 트럼프가 재선된 상황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많이 불행하고 우울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퇴진 광장에서, 박근혜 탄핵 집회 때와는 다른 훨씬 더 열린 광장을 경험하면서 많이 힘을 얻었어요. 집회를 주최하는 비상행동도 '퇴진' 만이 아니라, '사회대개혁'이라는 과제를 이름에 내걸고 활동하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다양한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서로 어우러지는 과정들을 보고 경험하면서 마음에 큰 치유가 되었어요.
명지 저는 지금 광장의 자유 발언 문화가 너무나 좋다고 느껴요. 사람들이 정말 각자 자기 삶에 대한 얘기를 무척 많이 하고 있잖아요. 겪어볼 일 없는 삶, 혹은 만나볼 거라고 생각도 못 해봤던 삶들을 자유 발언으로 만나게 되죠.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공명하는 감각이 있다고 느껴지고요. 곳곳에서 투쟁하는 이들과도 닿아서, 이주노동자라든지 조선소 노동자라든지 농민분들이라든지 그동안 관계맺지 못했던 분들과 정말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저한테는 굉장히 긍정적인 경험으로 다가와요.
거제에서 조선하청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함께 새해를 맞이했을 때, 성중립 숙소를 만들어 주셨어요. 내가 되게 환대받고 있구나, 나의 존재로 환대받고 있고, 나의 어떤 부분만 떼어서 환대받고 떼어서 인정받는 게 아니고 나의 존재 그 전부를 환대받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구나, 나를 이렇게 계속해서 환대해 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몰랐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노동조합이 급속 앨라이화되고 있다고 얘기했더니, 누가 그러시더라고요. 노조는 갑자기 앨라이가 된 게 아니라 과거부터 그런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공공운수노조는 건물을 올리면서 아예 성중립 화장실을 지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나의 존재를 환대해 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을 모르고 있었다, 그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예은 전농분들,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 전장연의 투쟁들 등 남태령이나 여러 연대의 현장에 가보지 않았으면 정말 몰랐을 다양한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어요. 이렇게 함께 연대와 환대를 경험하는 것이 참 좋아요. 저는 조선하청 노동자들이 서울에 와 한화 본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하던 날에 참여를 했었는데, 이후에는 그분들이 제가 전장연 선전전에 연대하는 날에 함께 와주셨어요. 저는 세상이 다 썩었다 생각했고 인간들이 싫었는데,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나는 아직 사람이 좋구나, 이런 걸 깨달았던 것 같아요.
삿갓 광장에서 느낀 첫 감정은, 나와 같이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안도감이었어요. 한편으로는 그런데 나중에는 다시 서로를 잊고 모른척 하면 어쩌지라는 불안도 컸어요. 그래서 자유발언도 하고, 우리가 이 광장을 함께 기억하고, 서로를 잊지 말고, 모른 척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어요.
저는 광장의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제는 서로를 완전히 모른척할 수는 없겠구나,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의 삶에 더 연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컨대 이제 밥을 먹을 때도 예전 같으면 그냥 그냥 밥이거니 쌀이거니 하고 먹는 것인데, 남태령에 다녀온 이후에는 그곳에서 만났던 농민들, 또 다른 이들의 삶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우리가 서로에게 단순한 타인으로 남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연대 희망텐트에 참여한 현산. Studio R
어지럽고 어려운 마음들도 있었을 것 같다. 어떤 고민들이 있었나.
명지 광장에서 환대를 경험하는 한편, 퇴진 국면에서 트위터 등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진 혐오의 정서들에 대해서도 고민이 되었어요. 제가 트위터에 교차 페미니즘과 젠더학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공유가 많이 되었어요. 새롭게 알게 되어서 좋고 고맙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웃음). 그래도 저는 혐오의 말들보다는 연대의 말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어요. 혐오하는 말들은 계속 있어 왔고, 이번에도 퍼졌지만, 지금의 광장에서는 그것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커졌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동덕여대 시위 같은 경우에도 초반에는 시위의 순수성에 대한 이야기나, 외부 세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계속해서 있었죠. 하지만 민주동덕의 깃발을 들고 모든 곳에 연대하러 다니는 분들이 있었고,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에 민주 동덕에 연대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그래서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혐오를 받을까봐 무서워하면서도 연대하러 가는 젠더퀴어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을 환대하는 재학생들이 있었고요. 이런 목소리들이 계속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그런 혐오의 흐름에 이제 두려움보다는 우리가 함께 바꾸어갈 수 있다는 감각을 느껴요.
물론 우리가 혐오에 대해 계속 경계해야 하고 어떻게 해소해 나가야 할지 고민해야겠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여러 명이 모였을 때 안전하다는 것,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사람으로 존재할 때 모두 안전하고 존중받는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함께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히려 더 그런 갈라치기에 휩쓸리지 않을 힘들이 생겼다고 보고, 조금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예은 저도 온라인 등에서 혐오의 표현들을 종종 봐왔고 고민이 많이 되었어요. 저한테도 직접적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더 얘기하고 싶으면 만나자고 해요. 만나서 얘기하자, 근데 단 한 번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 적이 없거든요. 며칠 전에도 제게 갑자기 무슨 몽골만두를 먹은 걸로 시비를 걸길래, 제가 원래 연대는 글로벌한 거고, 글로벌한 세계에서 글로벌하게 음식도 먹고 사람도 좀 만나라, 더 이야기하고 싶으면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안 나오더라고요. 온라인상의 혐오가 정말 부질없다고 다시 느끼게 됐던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오히려 환대의 경험이 훨씬 많았고, 현실 공간으로 종종 이어지는 차별적인 이야기들도 현장에서는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바꾸어가려고 하는 경험들을 하고 있어서 저는 참 좋았어요.
현산 저는 이 광장 이전에는 제가 논바이너리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어요. 주변에 정말 친한 사람들 소수에게만 이야기를 했었죠. 제가 자유 발언을 처음 했던 게 남태령에서였는데 그때도 제 정체성에 대해서 얘기를 못 했어요. 조금 무서웠어요. SNS에서도 그렇고, 이 광장에서도 여전히 혐오의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트위터에서 자신을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저의 발언과 다른 몇 가지 발언을 인용하면서, '여자 자매들' 이렇게 지칭을 하는 거예요. '나는 여자 자매들만 끌고 갈 거야'라면서. 그걸 보고 너무 화가 났어요. 아니 내가 논바이너리인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가 발언을 안 하니까 이렇게 됐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에 나설 때에는 안전함과 분노 사이의 어떤 균형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지금도 제가 100%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렇지만 저의 분노가 안전함에 대한 감각보다 이만큼 더 커지면서 발언을 해야 되겠다, 나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그 후에 옵티칼 희망텐트에서 자유 발언을 하면서 제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했죠. 당시에 한 친구가 들었다고 하는데, 한 금속노조 조합원 분께서 논바이너리가 뭐야, 이렇게 질문하니, 다른 분이 남자라는 거야? 여자라는 거야? 다시 묻고, 어떤 분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대답을 하셨대요. 그랬더니, 그렇구나 하시더래요. 저는 그것이 지금 광장이 그만큼 안전해졌다라는 증거라고 느꼈어요. 낯설지만 묻고 답하고 함께 배워가고 인정하는 과정들을 경험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지금 이런 광장이 가능한 것은, 그 동안 수많은 이들이 싸우고 노력해 온 역사 덕분이라고 생각하고요.
광장 초기에, 약간 국가주의적인 발언들이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저는 고민이 있었어요. 저는 군인이었고, 국가주의자였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거의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것 같아요. 광장에서 나왔던 극우 집회의 상징이 된 태극기를 뺏어오자는 이야기를 비롯해 민족국가의 관점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여러 고민들이 들었죠. 국가가 우리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상황인데 국가를 위해서 우리가 광장에 나왔다는 식의 접근은 고민스러웠어요. 그런데 점차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국민'이 아니라 '시민'을 호명하자는 문제의식이나 담론들이 나누어지고 있어서 고민들이 많이 풀리고, 우리가 함께 바꾸어갈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예은 저는 개인적으로 '촛불행동'이라 불리는 단체의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조금 불편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가고 있는 지점에도 마음이 쓰여요. 제가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라는 깃발을 들고 다니는데, 그 단체에서 집회 때 풍선을 주구장창 그렇게 나눠주는 게 정말 화가 나요. 그렇게 풍선을 나눠주면 야생맘마먹음이들이 아프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퇴진 광장에서, 삿갓
광장을 밝힌 '무지갯빛' 물결과 평등을 향한 요구들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윤석열 퇴진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이, 차별과 혐오, 평등에 대한 고민들이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지 이야기하기보다는, 퇴진과 처벌에 대한 요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있다.
예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 결과가 윤석열이었다, 우리가 박근혜 때 그렇게 누구는 빼고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서 탄생한 결과가 결국 윤석열이었다, 그런 이야기 밖에는 사실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그 '나중에'를 밈으로 쓰지 말라고 정당의 지지자들이 말하기도 하는데요. 그 '나중에' 때문에 깊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저는 정말 많이 봤어요. 이번 광장의 의미는 과거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광장이 탄핵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 윤석열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작은 나라에 크고 작은 윤석열들이 너무나도 많다, 쏘 매니 리틀(so many little) 윤석열이 있다, 그런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저는.
명지 하나의 의제를 위해서 다른 의제는 묵살해도 좋다는 한국식 효율성 때문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고, 가장 중요한 하나의 의제에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꼽느라고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적자생존이라 이야기하고, 자본가들과 잘 사는 사람들만을 위한, 하나만을 위한 사회가 경제 발전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온 역사가 한국 현대사이기도 하고요.
저는 더 이상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문제의식들을 지금의 광장에서 공유하고 있다고 느껴요. 비상행동도 윤석열 퇴진뿐만이 아니라 사회대개혁까지 고민하고 있잖아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너무나 다른 삶 속에서 지금의 정국이 나에게 어떤 문제를 끼쳤고 내가 어떤 괴로움을 겪었고 그래서 왜 뛰쳐나왔는지를 나누는 게 저는 중요하다고 봐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삶 속에서 각기 다른 고통, 그거와 비슷한 맥락을 지닌 고통을 지녔는지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윤석열 퇴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광장이 더 다양한 삶의 모습과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산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정체성은 다만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교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의 정체성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요. 나의 존재는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사회적 권력을 가진 존재일 수 있죠.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피해자성만으로 이해하고 배타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내가 복합적인 존재이고, 타인도 복합적인 존재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 혐오를 부추기는 하나의 시대정신과 동시에 따라붙고 있는 저항의 정신이고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우리가 함께 만들고 있고, 만들 수 있다고 느껴요.
타인의 존재에 대한 혐오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명지 서로가 서로를 같은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져요. 예를 들어 최근 다시 퍼져나온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라는 것은 남성에 대한 공포가 굴절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트랜스젠더에 대해 잘 모르면서 기표로만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트랜스 여성을 평생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남자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단순하게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되게 많아요. 살면서 진짜 트랜스젠더를 만나본 적이 없는 거죠. 그랬을 때 자신의 공포만으로 가짜 뉴스라든가 몇 개의 자극적인 보도들이 자극하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에 갇히지 않고, 나와 다른 존재들의 실제 삶을 직접 마주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예은 저도 어떤 타인의 존재를 실제로 경험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한강진 자유발언에서, 나의 젠더퀴어, 트랜스젠더 친구들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가, 한 번이라도 봤으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절대 혐오 발언을 할 수 없을 거다, 이런 말을 했어요. 혐오를 키우는 것들 중 하나는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자극적인 미디어로 생긴 환상, 그런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두려움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현산 남성에 대한 굴절된 공포라는 이야기에 공감해요. 그런 공포가 다만 막연하고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죠. 여성에 대한 실재하는 심각한 폭력들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 공포의 대상이 트랜스젠더나 또 다른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가 깊어요. 그걸 부추기는 미디어나 혐오 정치가 가리는, 현실의 존재들을 마주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트랜스젠더도 어떤 소수자 집단도 모두가 단일한 존재들이 아니잖아요. 그들 역시, 그런 실존하는 폭력에 피해를 입는 존재들이고요. 그 폭력에 맞서서 우리는 함께 싸울 수 있는 존재들이고요.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려는 여성들을 단순히 '혐오자'라고 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고민도 들어요. 혐오를 조장하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맞서야겠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다양한 사람들, 의문을 갖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트위터에서도 지난 한두 달 사이에, 트랜스젠더를 비롯해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공유하고 그것에 공감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당사자나 앨라이들의 트윗 등을 보고 생각을 바꾸고, 새롭게 배울 수 있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힘들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들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해야겠구나, 계속 말하고 대화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어렵더라도 우리가 계속 이야기를 하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누군가를 콕 찝어서 차별해도 된다는 게 합의된 세상에서는, 누구도 존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요. 이주민은 차별해도 돼, 장애인은 차별해도 괜찮아, 젠더퀴어는 차별해도 괜찮아라는 식으로 내가 누군가의 차별을 용인해 버린다면, 내가 차별받을 때도 반박할 수 없다, 각자가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을 해소하려면 결국은 우리가 함께 싸울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계속 나누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지금 이 광장에 오기 전까지는 솔직히 그런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광장에서, 현실에서 우리가 실제로 만나고 서로를 혐오하면 안 된다는 약속을 나누고 있는 광장이 생겼잖아요. 온라인은 혐오가 퍼지기에 너무 쉬운 환경이고, 현재 언론 지형도 실재하는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이해를 넓히기에는 한계가 많았죠. 그렇지만 광장의 경험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변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시민들 사이를 가르는 숱한 경계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무지갯빛 시민들은 광장의 담장을 넘어 투쟁의 현장 곳곳으로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남태령으로, 거제로, 구미로, 혜화역으로 이어지는 연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곳에 함께였을까.
명지 남태령에는 정말 저 사람들 어떻게든 밥을 먹여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갔어요. 사람들 밥 먹여주는 농민들이 밥을 못 먹고 있다는 거는 말이 안 되잖아요. 그곳에서 공권력이 불법이 아닌 걸 불법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어요. 농민들의 트랙터 유리가 다 깨져 있고, 추운 곳에 갇혀서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고요. 여기서 한 명이라도 더 줄면 안 되겠다,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겠다, 수가 줄어들면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더 모여들었고, 결국 길을 열었죠. 그 경험들이 거제로, 구미로 이어졌고요.
예은 남태령 소식을 들었을때 바로 가야 한다 생각했고, 당연하게 갔어요. 그리고 계속 지키고 있었죠. 백남기 농민분 이야기도 생각이 났고요. 내가 일단은 가서 다만 머릿수만이라도 채워주고 싶다고. 우리는 시민이라서 경찰이 잘 못 건드릴 거니까 그렇게만이라도 하자, 그런 마음이었어요. 연대의 현장은 내가 진입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함께할 수 있는 곳이구나, 어 되네, 우리가 가서 차벽도 열리고 길이 열리네, 민주노총만 길을 열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나도 길을 열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전장연 투쟁에도 연대를 하게 되었고, 조선하청 노동자들 투쟁에도 함께하게 되었고, 그렇게 되었죠.
연대를 다니게 되면서 전태일 열사의 유서에 있는 '너는 나의 나다, 친구여'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나에게 저 사람들의 일부가 있는 거고, 저 사람에게도 나의 일부가 있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다 나의 일이다라 생각하고 더 연대를 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정말 아는 사람 얘기가 되어버린 거잖아요. 저 이제 정말 가족 같아졌거든요. 동지들과 하루에 한 30번씩 잔소리를 주고받을 만큼. 전장연 같은 경우도 과거에는 저 사람들이 저렇게 어렵게 싸우고 있구나 걱정된다, 이 정도였는데 이제는 내가 거기서 끌려나갔던 당사자가 됐고, 내가 안 나가면은 저 사람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 경찰이나 직원에 의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끌려가고 목이 졸릴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는 게 더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계속 나가게 되었어요. 이제 저에게는 정말 저의 일이 된거죠.
조선하청 노동자들과 한화 본사 앞에서 밤을 새운 날 명지.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
광장에서의, 연대의 현장에서의 경험들은 '말벌 동지'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스스로 어떤 변화를 감각하고 있을까.
현산 정말 커다란 변화가 있었어요. 사실 트럼프가 다시 당선된 이후에 무척 우울했어요. 일상생활이 어려운 정도로 절망감이 컸어요. 우리가 아무리 싸워도 과거로 돌아가고, 무언가를 바꿀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고요. 그런데 퇴진 광장에 나가고, 남태령에 가고, 전장연의 투쟁에 연대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만드는 커다란 힘을 감각하면서 마음이 달라졌어요.
더 이상 우울하지 않고요. 사실 희망을 봤다기보다는, 싸울 수 있게 됐다에 가까운 것 같아요. 섣불리 그냥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구요. 사실 인간은 꽃처럼 아름답기도 하지만 되게 끔찍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못하고 파편화된 채로 처박혀 머물지 않고, 시민사회의 일부로, 시민의 의무로 함께할 수 있다, 함께해야한다는 감각을 깨닫게 되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스스로 굉장히 달라졌고 많이 긍정적인 사람이 됐어요.
명지 저에게는 남태령의 경험과 함께, 거제에서 조선하청 노동자들을 만났을 때 경험한 환대, 한화 본사 앞에서의 노숙 농성이 되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조선하청 노동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농성을 시작하는데 사람이 그 안에 있는데도 텐트를 흔들고 뭉개고 결국 한 분이 응급실에 실려 가시기도 했죠. 그 자리를 함께 지키면서 밤을 새웠고 결국 다음날에는 농성 천막을 설치할 수 있었어요.
그 경험이 저한테 되게 중요했어요. 내가 거기 가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 내가 머릿수를 보태는 것만으로도 내 동지를 지킬 수 있다, 나를 환대해주고 나를 환영해주고 내가 오기를 기다려줬던 사람들을 내가 지킬 수 있다라는 감각을 저는 하나오션 앞에서 느꼈던 것 같고, 그래서 그 뒤로 누가 나를 부른다, 내가 와주기를 바란다면 최대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조선하청 노동자들과 함께 한화 본사 앞 농성장에서 '무지개 조선소'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 현장에서는 매일 평등 수칙 담당자를 정하고, 평등 수칙을 함께 읽고 약속하고, 서로 문제제기를 하면 토론하고 개선하려 노력하는 과정들이 이어지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돼요. 서로 다른 흐름 다른 결 다른 맥락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덜 상처 주고 잘 회복하면서 함께할 수 있을까를 요새 좀 많이 고민해 보게 되었고요.
저는 상처라는 건 내지 않는 것보다 잘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갈수록 더 많이 해요. 남태령에서도 '딸들'이라고 했을 때, 저희가 딸이 아니라 말했고 그에 대해,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게 어떤 상처로 남지 않게 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할 때, 어떤 상처는 사실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건데 그러니까 나와 같은 사람하고만 있을래, 나는 혼자 있을래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불가피한 상처들을 잘 회복할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 볼래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현장들이 저에게 굉장히 많은 영감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 같아요.
삿갓 물리적으로는 힘들어서 병을 얻었고요. 연휴에 입원을 했다가 오늘 퇴원했어요. 그렇지만 내적인 자산으로는, 저희 엄마에게 제가 커밍아웃을 했는데, 아 그렇구나,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일을 하러 거기로 갔는데, 집회를 다니느라 고생이고, 이러면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는 다른 얘기로 넘어가시는 거예요. 저희 가정 안에서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많이 기뻤습니다. 제 삶 속의 작은 변화입니다.
저는 희망의 시대에는 희망의 노래를, 절망의 시대에는 또 절망의 노래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삶의 작은 변화들, 광장의 변화들을 보면서, 커다란 광장에서 사람들이 즐겁고 힘이 나는 순간에도, 좁아진 광장에서 사람들이 지치고 힘을 잃은 순간에도, 계속 서로를 기억하고 모른 척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그렇게 함께 존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저는 계속 광장에 나가려고 합니다.
'동지'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우리'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한 해, 어떤 바람들을 마음에 품고 있을까.
현산 개인적인 새해의 소망은 제가 글을 쓰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이 글을 제때 완성할 수 있기를 좀 바라요.
더 커다란 이야기를 나누자면, 세계의 평화를 바랍니다.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자유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혐오의 시대에, 서로를 파편화시키지 않고, 연대를 이어갈 수 있는 노력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덜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혐오도 결국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고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요. 구체적으로는 주4일제,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징병제 철폐와 군인권 문제의 개선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고요. 인권과 평등에 대한 교육들이 공교육 과정 안에서 더 잘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삿갓 우리 서로를 서로 모른 척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저는 윤석열 퇴진 이전에는 자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내란 사태와 광장을 계기로 이제 타자 중심적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존재 덕분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한다고 보는 거예요. 타자라는 것은 나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돌봐야 하는 것이죠. 지금의 광장을 계기로 사람들이 타자와 나의 존재에 대해 함께 고민을 나누고 서로 모른 척하지 않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할 텐데요. 우선은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이 떠올라요. 저만 해도, 제가 얼마전에 인천에 정착을 했는데, 이곳에는 가족들이 없어요. 연휴에 응급실에 가고 입원을 했는데, 가족들이 올 수 없었고 달려와준 친구는 병원에서 요구하는 보호자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고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돌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이 꼭 제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명지 얼마전 신년 거리 차례에서 발언을 했었는데요, 제가 과거에 썼던 대자보의 내용을 인용했었어요.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슬픔 속에 자랐습니다. 너의 성공과 행복에만 몰두하라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에 깔린 목숨들을 봅니다. 수학여행 떠난 또래들이 죽고 물대포에 맞은 농민이 죽었습니다. 곳곳에서 일하던 또래가 여수에서 실습하던 학생이 죽었습니다. 성별 정정 수술을 빌미로 강제 전역당한 여성이 죽고 연극을 만들던 퀴어가 죽었습니다. 그저 일상을 누리려던 또래들은 이태원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택시기사의 분신 자살은 주목조차 받지 못했고 악성 민원 끝에 새내기 교사를 숨지게 한 자는 여전히 익명 속에 있습니다. 투쟁하는 장애인들은 폭력과 모욕과 죽음 속에 놓여 있습니다. 매일 들려오는 여성 살해 소식은 그 수를 꼽을 수조차 없습니다. 셀 수 없는 죽음과 폭력에 둘러싸여 무력해지면 매일의 귀가는 그저 요행으로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슬픔을 종결하라 요구합니다. 언제까지 슬퍼할 셈이냐고 네가 조심하고 노력해서 잘 사는 게 최우선이라고 채근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거리 차례가 그렇게 돌아가신 분들을, 이 나라와 이 사회가 계속해서 잊어버리라고 명령하는 죽음들을 잊지 않기 위한 의식인 것 같기도 하다, 올해는 누구도 나중으로 밀리지 않고 누구도 외롭게 투쟁하지 않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누구도 나중으로 밀리지 않는 세상, 그게 제가 바라는 사회이고요.
개인적인 새해 소망은 올해는 제발 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으면 좋겠고요, 투쟁을 일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지속가능하도록 서로를 계속 연결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