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프 아부 사이프와 함께하는 대량 학살의 일기

죽음과 폭력질병에 맞서 전쟁터에서 진실을 전달하려는 사람들은 학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살인자들이 말하는 거짓말을 이겨내고 사실을 전달하려 한다이것이 바로 작가사진작가언론인이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쟁에서 침략자들의 표적이 되는 이유다.

2019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테프 아부 사이프(Atef Abu Saif)가 지난 10월부터 지속된 가자지구의 최근 공습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경험을 저서 '왼쪽을 보지 마대량학살의 일기(Don’t Look Left: A Diary of Genocide)'에 기록했다.

가자지구에서 태어난 사이프는 평생을 전쟁과 함께 살아왔다.

나는 전쟁 중에 태어났고사실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우리의 삶이다.”

사이프는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이미지와 살해당한 사랑하는 사람과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트라우마를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가자에서의 삶이 생존을 위한 타임아웃이라는 그의 말처럼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이 전쟁에서 우리 집처럼 죽임을 당하고 집이 파괴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타임아웃과 같다휴식그래서 그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다.”

대량 학살에 직면한 존재에 대한 이 우주적인 묘사는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다리와 손 하나를 잃은 조카 위삼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꿈 속에 있어우리의 모든 꿈은 끔찍해.”

<크리스 헤지스 보고서>의 새로운 독립 시리즈인 이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사이프와 헤지스는 실질적이고 강력한 대화를 통해 이러한 경험과 그 이면의 의미를 탐구한다이를 통해 대량 학살의 생생함과 그것이 희생자들에게 가한 피해를 포착하고자 한다사이프의 유창함과 취약성이 사실과 데이터만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비극의 무게를 드러낸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와 함께하는 대량 학살의 일기 | 크리스 헤지스 보고서

인터뷰 전문

크리스 헤지스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많은 팔레스타인 작가언론인사진작가들이 학살의 참상을 보고 느끼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이들은 결국 살인자들의 거짓말을 물리칠 것이다전시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은 저항의 행위이자 믿음의 행위다작가저널리스트사진작가들은 언젠가(언젠가는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이 글과 이미지가 공감과 이해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지혜를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한다이들은 사실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삶과 공동체의 질감신성함슬픔을 기록한다전쟁이 어떤 것인지죽음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견디는지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공포와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죽음이 어떤 것인지 세상에 알린다그들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어머니들의 슬픔의 통곡야만적인 산업 폭력에 맞선 매일의 투쟁오물질병굴욕공포를 이겨낸 인간성의 승리를 전달한다그렇기에 작가사진작가저널리스트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쟁의 침략자들이 말살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이들은 침략자들이 묻어두고 잊고 싶어 하는 악의 증인으로 서 있다팔레스타인 소설가 아테프 아부 사이프와 그의 15세 아들 야세르는 점령지 서안지구에 살고 있었고이스라엘이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을 때 아테프가 태어난 가자지구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고 있었다아테프는 이스라엘 점령군의 폭력에 낯선 사람이 아니다그는 작가들이 하는 일을 했다여기에는 12월 7일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공습으로 누나의 아파트에서 형제와 누나그의 네 자녀와 함께 사망한 교수이자 시인인 레파트 알라리르도 포함된다아테프는 85일 동안 주변의 공포를 묘사하며강렬하고 감동적인 작품인 '왼쪽을 보지 마학살 일기'를 썼다점령지 팔레스타인 라말라의 자택에서 가자지구의 대량 학살과 그의 저서에 대해 저와 얘기할 아테프 아부 사이프를 소개한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팔레스타인의 상황과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 공격의 피해자인 작가저널리스트예술가사진작가들의 역할에 대해 소개해 준 크리스에게 감사드린다. 67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전쟁은 멈추지 않았음을 기억하길 바란다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파 마을에서 쫓겨나 가자지구의 모래사장으로 보내져 난민 캠프에서 살다가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돌아가셨다이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작가지식인예술가화가그리고 팔레스타인 문화에 대한 전쟁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1967년 상원의원이었던 가산 카나파니를 시작으로 마제드 샤라르 등 수많은 팔레스타인 작가들을 기억할 수 있고물론 그 명단은 길다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전하려는 국제 언론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인 [레이첼코리(인권 활동가)처럼 팔레스타인인들도 항상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하다이 여성은 15년 전라파에서 살해당했다그래서 점령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달하거나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폭력과 악의 대상이 되고어쩌면 살해당할 수도 있다.

언급한 것처럼 나는 1973년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태어났고내가 두 달이 되었을 때 1973년 전쟁이 시작된 것 같다그래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나도 전쟁 중에 태어났고 사실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아랍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제 소설 '정지된 삶'은 이렇게 시작된다소설의 주인공인 나임은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 중에 죽는다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인 우리의 삶이다우리가 사는 것은 생존을 위한 시간이다우리는 살아남지 못한다이 전쟁에서 우리 집처럼 죽임을 당하고 집이 파괴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다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타임아웃과 같다휴식 말이다그러니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다내가 처음 체포되었을 때를 기억한다그때 나는 9살이었다당시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베이루트 전쟁이 한창이던 1982년이었다이스라엘군이 우리 학교를 공격했다이스라엘 점령군 지하실에 왔을 때 엄마가 대위에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어머니는 그가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어쨌든 하루 정도 있다가 우리를 풀어줬다당시 우리는 학생 10명이었고 모두 같은 반 친구였다그러다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을 때 나도 내 또래의 젊은 남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다가 총을 세 번이나 맞았다동료 한 명은 실제로 나를 위해 무덤을 골랐고 무덤에 묻힐 예정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깨어나서 본 것이 영국인 외과 의사였던 게 기억난다그녀는 이스라엘이 500명을 학살한 병원에 있었다영국 병원가자 지구의 침례 병원이라고 불렀다나를 보고 의사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해줘서 12시간 동안 수술받았다그리고 살아났다어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이런 사실 때문에 당신이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고 느끼는 기분이 어떤지 나는 안다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그리고 분명히 기억나는 건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자를 방문 중이던 나와 함께 있던 내 아들 야세르를 지키려고 했던 순간이다그래서 그때마다 생각해야 했다그 애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내가 그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내가 그걸 놓쳤으니까그리고 물론무력감을 느꼈다많은 경우에 나는 그냥 이렇게 텐트 안에 앉아있었다이스라엘 헬리콥터나 드론에서 발사된 로켓이 날아와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나는 우리 인간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불행히도우리의 경우에는 우리의 운명을 통제하는 것은 이스라엘 군대다그들이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운명을 통제하고그들을 파괴하는 쪽이니까 말이다.

물론 가자지구에서는 살인과 암살파괴가 끊이지 않는다내가 50년 동안 직접 목격한 수백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외할아버지는 1967년 전쟁에서 돌아가셨는데처음 만났을 때 얘기하지 못했지만 나크바(Nakba,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의 대량 강제 이주와 그로 인한 고통을 의미)에서 부상을 입었다믿을 수 있겠나그때 그는 야파(Jaffa)에 있었다아마 16살 정도였고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당시 이스라엘 갱들이 우리 동네를 공격했을 때 부상을 입었다실제로 신문에 실렸고 당시 기사를 잘라서 가지고 있다. 1948년 4, 1948년 4월 초에 다리를 다쳤다그리고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점령한 1967년에 사망했다이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가 너무 많다항상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하며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하곤 한다나는 이스라엘 감옥에 있을 때 1차 인티파다에 5개월 또는 4개월 정도 갇혀 있었다.

크리스 헤지스당시 몇 살이었나아테프?

아테프 아부 사이프그 당시 18살이었다미국식으로 말하자면 고등학교를 막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었다어쨌든 나는 네게브에 있는 이스라엘 감옥으로 보내졌는데히브리어로 크치옷(Ktzi'ot)이라고 불렀고 우리는 안사르 3이라고 불렀다서사와 용어에 대한 투쟁도 항상 있었다어쨌든그때 나는 이스라엘에 있었고 내 형제 나임은 가자 중앙 감옥에 있었다그때 어머니는 42살 정도였고그날 우리를 방문하러 오셨다아침 9시에 나를 보러 오셨다나는 네게브 감옥으로 이송되지 않고 여전히 해변 근처에 있는 가자 구금소에 있었다비가 내리고 있었다. 1월이었지그때 엄마는 42살이었고병에 걸려 있었다어쨌든나중에 돌아가셨다그리고 오후에 또 다른 감옥에 있는 형을 방문해야 했다삶은 고통의 이야기다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항상 스스로에게 상기시키셨겠지그녀의 두 아들이 감옥에 있었고그녀는 그들을 방문하고 멀리서라도 그들을 보고 힘을 주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을사실어머니는 우리에게 형이 곧 풀려날 거라고 말할 때 우리보다 더 강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난다정말 놀라웠다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은 누구를 위해 세워진 게 아니야.” 무덤처럼 채워지면 끝이 아니라 어느 순간 떠나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불행히도 형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셔서 뵐 수 없었다평화와 전쟁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라면그녀가 오슬로 협정을 지지하며 시위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1993년 그들이 서명했을 때였다. 11월이었고 아라파트가 가자에 도착하기 전이었다어머니는 기쁘게 오슬로 협정을 지지하며 시위에 나섰어나는 그때 대학에 있었고, “엄마가 정치 활동가가 됐네.”라고 말했었다어머니는 아니나는 오슬로를 지지해내 아들이 풀려날 거니까.”라고 말했었다하지만 불행히도 어머니는 2년 뒤에 돌아가셨고 아들이 석방되는 것을 보지 못하셨다이 이야기는 평화 과정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우리의 삶은 자신만의 타임 아웃을 찾는 삶이다내 책 제목도 아랍어로 "생존을 위한 타임아웃"이다이 끔찍한 전쟁이나 집단 학살 속에서 타임 아웃을 찾는 것이다불행히도 똑같은 이야기를 내 손자에게도 해줄 수밖에 없다는 게 슬프다내 할머니가 야파(Jaffa)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말이다할머니의 빌라는 지금도 야파에 남아 있고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이 살고 있다나는 그 빌라를 몇 번 봤고기술자가 만든 구조도를 하나의 소설 표지에 넣었다어쨌든 할머니는 빌라를 떠나 모래 위를 걸어서 가자로 내려가야 했고해변에 있던 빌라에서 살다가 텐트에서 살아야 했다부유했던 그녀는 매우 가난하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미래에 내 손자에게 할머니가 내게 해준 이야기를 똑같이 해줘야 한다다른 선택지가 있겠는가이 삶을 살아가야 하고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왜냐하면 삶은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말이다삶은 모험이나 여정이 아니고연극도 아니다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역할을 하고 무대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그냥 우리가 만들어진 그대로다.

크리스 헤지스: 10월 7일을 이야기하기 전에당신이 견뎌내고 기록한 첫 번째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 이야기를 하고 싶다당신이 쓴 이전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내가 알기로는 2018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교해 보고 싶다우선 당신이 쓴 첫 번째 책 이야기를 해보자그 책에서는 이스라엘이 감행한 쉼 없는 포격과 폭격살해를 하루하루 기록했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그렇다내가 말했듯이 나는 가자의 모든 전쟁을 겪었다하지만 이전의 공격에 대해서도 글을 썼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그 글들은 아직 가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희망하건대. 2014년 전쟁은 여름에 일어났고사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딱 이 시기에 시작됐다그때 전쟁은 매우 거대하고 매우 공격적이었다우리는 많은 이스라엘 공격을 경험했지만그때는 모든 것이 갑자기 일어났고 공격이 곳곳에서 일어났다이스라엘 군대가 오슬로 협정 이후 처음으로 가자를 침공했다그들은 남쪽에서우리가 가자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도시를 침공했다나는 매일 일어난 일을 기록했다왜냐하면 그때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번에도 마찬가지다두 전쟁을 비교해 볼 수 있겠지만때로는 전쟁을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진다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우리를 죽이려고 하니까 말이다.

때로는 죽음이 더 가까이 느껴지기도 하지만항상 우리를 잡으려는 것 같다. 2014년 전쟁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거대한 전쟁이었다우리는 그 전쟁을 목격했고경험했으며그 위험성을 느꼈다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많은 기억이 나는데그때 나는 더 많이 관여했고내가 태어난 난민 캠프인 자발리아(Jabalia)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그때 나는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줬던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다잔해 속에서 사람들을 구출했고종종 몸통 없는 머리나 손만 발견하곤 했다정말 끔찍했다많은 경우에 나는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특히 시체를 운반할 때 말이다한번은 샤워를 15번이나 12번이나 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그때는 이번 전쟁처럼 전기와 물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이번 전쟁은 전쟁이라기보다 가자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그래서 이번 전쟁은 집단 학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들은 물과 전기를 끊었다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언론조차 지금 말하지 않는다곧 전쟁이 300일이 될 거라고가자에서 전기와 물 없이 300일이 될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하지만 2014년 당시에는 어느 정도 정기적인 물 공급이 있었다며칠 동안 물이 끊기기도 했지만여전히 물이 있었다샤워를 12번 하고 나서그 가족 이름이 기억난다발라타(Balata) 가족이었다그들은 캠프의 묘지 근처에 살았고러시아인이었다.

그 후 악몽에 시달렸고손이나 머리 없이 남은 머리카락을 봤던 기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그런 걸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밤에 잠에서 깨어날 때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그래서 전기에 손을 대고 싶었다만약 내가 살아 있다면전기에 손을 대고 나서 죽을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만약 내가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아니손대지 말자'라고 결심했다그 당시에는 말하기 싫지만다가오는 전쟁에 대한 리허설 같았다하나의 연습처럼 느껴졌다현재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나는 가자 언론사에 있었다이스라엘 군대가 나중에 암살한 벨랄 자달라는 그 언론사 책임자였고내가 책을 헌정한 사람이다우리는 2014년 전쟁과 현재 전쟁을 비교하려고 했다. 2014년 전쟁은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큰 전쟁이었으니까 말이다그때 벨랄은 이미 죽었고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우리는 '이 전쟁이 51일째즉 이전 전쟁의 길이만큼 지속되지 않으면이것은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물론우리는 그 전쟁이 51일 동안 계속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달래려고 했다텐트에 있을 때나의 고모할머니인 누르 할머니는 라마단을 여기서 보내야 할까?”라고 물었다그녀는 텐트에서 라마단을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누르는 어린 시절을 텐트에서 보냈고생의 마지막 몇 달을 텐트에서 보냈다마찬가지로 나의 장모도 1948년 아시클론의 마즈달 아스칼란에서 태어나 어머니에게 안겨 가자로 와서 처음 세 해를 텐트에서 보냈다안타깝게도 그녀는 텐트에서 사망했고나는 그녀에 대해 책에 언급했지만그녀가 돌아가신 후에야 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래서 고모할머니는 라마단을 여기서 보내야 할까?”라고 묻곤 했었다라마단이 끝난 후전화로 나에게 아텝우리는 여기서 이 전쟁의 첫 번째 기념일을 기억할까?”라고 물어본다이는 10월 7일이 다가오면 다시 전쟁의 기념일이 온다는 뜻이다오늘도 내 여동생 아시아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 전쟁의 첫 번째 기념일을 여기서 기억할 것 같아?”라면서 말이다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미안하다.

크리스 헤지스아니다원하시는 만큼 말씀해달라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레파트 알라리르(Refaat Alareer)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그는 물론 그의 여동생과 가족들과 함께 이스라엘군에 의해 추적당해 암살당한 것이 분명하다시작하기 전에 그에 대해 조금만 말씀해달라.

아테프 아부 사이프나는 레파트 알라리르를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프로젝트에서 알게 되었다이 프로젝트 제목은 2014년 전쟁 당시 뉴욕 타임스에 실린 내 기사 중 하나에서 따온 것이다매일 제목을 달고 있었다레파트 알라리르는 가자에서 매일 보고하고 있었다그는 단순하게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전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과장하지 않았고시인들이 할 법한 정치적인 글도 아니었다그냥 그가 목격한 일을 썼다이웃과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적으로 기록했다그의 기사 중 하나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언론에 나서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조차 있었다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레파트 알라리르의 암살은마치 가자 언론사 책임자인 벨랄 자달라의 암살과도 같다그는 가자에서 다섯여섯 가지 언어로 뉴스를 전달했다물론 그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팀이 했었다시인 살림 알나파와 같은 다른 시인들과도 마찬가지였다예술가작가사진작가 등그리고 제닌(Jenin)에서 암살당한 시린 아부 아클레도 기억한다진실을 숨기려는 싸움이다진실 자체를 공포로 몰아가서 아무도 진실에 손대지 못하게 하고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시보다 강한 것은 말이다많은 사람들이 전사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그들의 삶고통영혼고난을 전한 시인기자영화 제작자의 이름은 기억한다.

레파트 알라리르는 자신이 한 일을 믿었다그의 시에서 말했듯이, “내가 죽어야 한다면이라는 표현처럼진실은 하늘을 나는 연과 같은 것이다긴 하얀 꼬리가 달려서 가자 해변 어디서든 한 아이가 볼 수 있도록 말이다그래서 이것이 희망이라 생각한다진실은 결코 죽지 않는다전달자가 죽더라도진실은 죽지 않는다다른 용기 있는 사람이 그것을 전할 것이다우리는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고통을 전달해 준 예술가들과 시인들에게 매우 감사한다기억해야 한다이는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영국군도 팔레스타인 시인들을 감옥에 넣었다나자렛(Nazareth)의 위대한 시인들도 그 당시 감옥에 갇혔었다진실은 항상 그렇다항상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모든 억압자들모든 살인자들은 진실을 죽이려 한다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왜 네 동료 인간을 죽이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왜 가자에서 예를 들어 성 같은 것을 파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카스르 알바샤 궁전(Qasr al-Basha Palace)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가자에 들어왔을 때 사무실로 사용했던 곳이다터키인들도 군사 사무실로 사용했었고영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아무도 왜 그것을 파괴하는지 모른다그것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 말이다이미 점령했고그곳에 있었으면서 말이다.

탱크들이 그곳에 있었고심지어 멀리서 포격하지도 않았다탱크들이 성의 역사적인 벽 앞에 서 있었다우리가 바샤 궁전(Basha Palace)이라고 부르는 그곳은 박물관이기도 했다거기에는 페니키아 항아리와 십자군의 검이 있었다여러 시대의 유물들이 있었다이슬람 유물도 있었고아무도 왜 저항도 없고 군대도 없는 역사적인 궁전 앞에서 서 있다가 그것을 파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심지어 미쳤다고 해도그곳에 앉아서 승자로서 커피를 즐기면 되지 않는가아니면 승자가 아닐 수도 있겠지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가정해 보자그곳에 앉아서 도시를 즐기면 되잖아가자 시내 한가운데서 말이다누구도 왜 파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병사들이 예술가의 작업실에 들어가서 그것을 파괴하는 걸 즐기는 영상도 있다도둑질을 즐긴다고 해도그것을 가져가서 숨기면 되지단순히 그림을 망치고 피 흘리는 색을 즐기지 않는다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항상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6, 7년 동안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야파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 집의 그림이 파괴되었을 때도 그랬고팔레스타인 신문의 그림이 파괴되었을 때도 그랬다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같은 고통을 반복한다나는 이런 일이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이 세상이 이 모든 고통과 긴 여정의 끝을 맺기를 희망한다.

크리스 헤지스정착민 식민지 프로젝트에서 그들은 점령지의 문화정체성역사를 파괴한다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거나 팔레스타인 원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요한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다왜 시인을 죽이지왜 레파트 알라리르를 죽였지그는 항상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사랑에 대해 쓰고 싶어했지만사랑을 찾지 못했다그는 딸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던 장난감에 대한 시를 쓸 수 없었다왜냐하면 라파 검문소에서 그 선물을 빼앗겼기 때문이다그래서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에 대해 쓸 수 없었다왜 박물관을 파괴할까나는 서사적인 싸움을 이해한다단지 물리적으로 우월할 뿐만 아니라서사적으로도 우월하고 싶어하고자신의 서사와 이야기가 이 지역을 압도하기를 원해서일 것이다그러나 도둑들도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지 않는가그러나 도둑들도 자신들이 침입한 집에서 좋은 것들을 가져가지 않는가그리고 역사적으로 식민지배자들도 원주민의 문화를 약간의 존중을 가지고 훔쳤었다또 한 명의 시인이 있다지금 우리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다나는 그를 전쟁 첫 달에 봤다그의 시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그는 매우 훌륭한 시인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150일 넘게 잔해 속에 있다우리의 상실감을 상상해 보라그의 아이를 만났을 당시 6살이었고우리는 생일을 함께 축하했었다.

다른 날에도, 21일에젊은 팔레스타인 시인 필라르(Pilar). 그의 이름은 [들리지 않음]이다내가 페이스북에 그의 이름을 썼다그는 집에서 죽었고매우 아름다운 시를 썼다아랍어로 썼다이제는 죽었지만그의 글을 읽으면 어떻게 그가 그 상황을 두려워했는지그의 여동생을 진정시키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그는 26살이었다그의 집은 중심지에 있었고나는 누세이라트(Nuseirat) 난민 캠프에 있다고 생각한다거기서 죽었다그래서 다시 말하지만이 전쟁은 인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이 장소의 역사와 장소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심지어 나무도 목표로 하고 있다정원에 구아바나 망고 같은 나무를 심으면완전히 자라기까지 30년이 걸린다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와서 그 나무를 뽑아가는 것이다내 여동생이 베이트 라히야(Beit Lahia)에서 집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그녀는 이제 46살인데그녀는 새집을 지을 시간이 없어라고 했다그녀와 남편은 결혼했을 때 20대였고, 25년 동안 집을 지었다그녀는 이제 새집을 지을 시간이 없어라고 말했다정원에 새로운 나무를 심을 시간도 없다이 전쟁은 가자에서 모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가자를 그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정치 정당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민병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특정 정당이나 사람캐릭터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그저 가자를 제거하고 가자에서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한다오늘이나 내일뿐만 아니라앞으로 수십 년 동안도 말이다그래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자를 떠나게 만들려고 한다.

크리스 헤지스쓰신 책을 조금 읽어보고 싶다놀라운 작품이다대량 학살의 상황과 공포를 잘 포착하고 있다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젊은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친구를 잃었다당신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지켜보는 것을 언급했다. “그들의 적외선 렌즈와 위성 사진들당신은 묻는다내 바구니에 있는 빵의 개수와 내 접시에 있는 팔라펠 볼의 개수를 셀 수 있을까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가족들그들의 집과 잔해매트리스옷 가방음식과 음료를 운반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슈퍼마켓환전소팔라펠 가게과일 가판대향수 가게과자 가게장난감 가게모두 불탔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피가 곳곳에 있었다아이들의 장난감 조각들슈퍼마켓에서 나온 캔들부서진 과일깨진 자전거들산산조각난 향수병들그곳은 마치 용에게 불타버린 마을을 그린 목탄 그림 같았다.” 물론가자에 대한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파괴는 그야말로 종말적이었다하지만 이 전쟁이 시작된 초반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처음부터 이 전쟁은 그 전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나?

아테프 아부 사이프사실 전쟁이 시작될 때 나는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그해 여름 내내 수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그래서 가자를 방문하고 있었다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안타깝게도 전쟁 중인 올해 4월 중순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음식과 약이 부족해서였다어쨌든 아버지와 내 여동생들을 방문하고 있었고우리는 10월 7일 팔레스타인 유산을 기념할 예정이었다그날 아침 나는 해변에 갔고오랜만에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그러다 전쟁이 시작됐다그때 나는 매부에게 전화해서 물에서 나와야 해전쟁이야.”라고 말했다그때가 아침 6시 30분이었다그는 아니야그냥 또 다른 확전일 뿐이야.”라고 말했었다나는 매부를 물속에 두고 떠났다그는 나를 두고 가.”라고 했었다그는 해변 근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그래서 나는 동생 무함마드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그때 경찰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었다하지만 밤이 되자 상황이 매우 어두워졌다우리는 이것이 다른 유형의 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14년 전쟁 때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었다그때는 가자가 타겟이 되었고다음날은 자발리아라파칸 유니스 순이었다그러나 이번 전쟁은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10월 7일과 8전쟁 첫 이틀 동안 포격이 사방에서 일어났다어디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언론사에 머물러야 했다낮에는 어떤 구역에 있었는데떠날 수가 없어서 기자들 책상 사이에서 잠을 자야 했다처음부터 이 전쟁이 매우 힘든 전쟁이 될 것이라고 알았다이전 전쟁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긴 했지만주로 국경 근처나 북쪽동쪽 국경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었다그들은 자발리아 난민 캠프의 어떤 학교에 모였다우리는 군대가 자발리아에 들어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전쟁 중에도심지어 전쟁이 한 달이 지나도우리는 그들이 여기에 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왜냐하면 그건 대량 학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살인자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과밀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었다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에서 가자에서 쫓겨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전쟁이 시작된 지 2~3주 후에도 나는 그냥 또 다른 전쟁일 뿐이야.”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번 전쟁은 달랐다이번 전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나크바 전쟁과 비교할 만큼 충격적이다사람들이 강제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옛 전쟁과 같은 말들을 반복했다나도 모르게 내 아이에게 며칠 후면 돌아올 거야.”라고 말했다마치 내 할머니와 모든 노인들이 1948년에 아이들에게 했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내 기사에서나는 나크바와 다른 어떤 것도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나크바는 정치적 공격의 결과였고팔레스타인 국가나 존재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그래서 나는 나크바를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하지만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은 나크바였다. 1960년 전쟁도 생각나지 않았다. 1960년 전쟁 때는 서안지구의 절반이 요르단으로 쫓겨났고가자의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으로 쫓겨났다내 할아버지 이브라힘과 삼촌들도 자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떠나야 했고내 아버지와 할머니만 자발리아에 남았다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나는 팔레스타인 밖에서 난민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 전쟁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은 나크바다나크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정말 큰 재앙이었다나크바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매우 무거운 재앙이다그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1967년을 또 다른 나크바라고 부르지 않는다단지 음 하나를 바꿔서 낙사(Naksa)라고 불렀다. ‘패배를 의미한다.

전쟁이 시작된 지 2~3주 후아무도 우리가 쫓겨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나는 남쪽과 북쪽을 잇는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울었다수천 명의 사람들이여자들남자들아이들임신한 여성들이 검문소를 통과하고 있었다나는 내 아이와 함께 할머니아니 장모의 휠체어를 들고 있었다그녀는 나중에 돌아가셨다우리는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검문소를 건넜다그러면서 나는 난민 캠프에서 자란 70년대와 80년대에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떠올렸다남쪽 야파와 남쪽의 모든 마을에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백 번 들었다모든 이야기가 영화처럼 떠올랐다그런데 지금이 그 영화 속의 또 다른 장면이 되었다나는 이 큰 화면 속의 또 다른 장면이 되었다.

크리스 헤지스책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15살인 어린 아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사방에 시체가 있었다아들에게 보지 말라고 했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어떤 움직임어떤 몸짓어떤 신호를 보이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출판사와 논쟁을 벌이다가 군인이 탱크 위에 앉아있다고 해서 책 제목을 '탱크 위의 커피'라고 지을 뻔했던 기억이 난다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시신 위에서 슬퍼하고 있는데 어떻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지 모르겠다다른 군인들은 16살 소녀를 조준하고 있었고언제든지 쏠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래서 책 이름을 그렇게 지을 뻔했지만탱크나 드론을 제목에 넣지 않기로 했다출판사와 다른 제목에 대해 논의해야 했다그렇게 시신들을 밟고 지나가면서 또 다른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그래서 아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했다두리번거리다 군인이 흰 티셔츠에 안경 쓰고 긴 머리청바지바지 입은 젊은 남자 이리 와라고 부르면 위험할 수 있었다사진을 찍거나 영화 장면처럼 보면 비슷한 사람을 여럿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운이 나쁜 사람은 군인의 왼쪽에 있다가 총에 맞을 수 있다믿을 수 있겠는가그래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움직이지 않고고개를 돌리지 않고똑바로 보고 지나가는 거다.

올림픽이 열리는 지금 파리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을 상상해 보라결승선을 통과하면 내가 해냈다내가 살아남았다내가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느낌이 들것이다그런데 검문소를 통과한 후에 찍은 사진이 몇 장 있다그때 우리는 우리가 난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나는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태어났고다시 난민이 되었다장모님도 난민이 되었다그 선을 넘자마자 우리는 태양 너머빛 너머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둠 속에 있었다사실 거기에 다리가 있는데가자지구에서 가장 긴 거리의 이름을 딴 살라 알 딘 다리라고 부른다이 다리를 건넌 것을 후회한다다시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

크리스 헤지스책에서 읽었는데자발리아에 있는 집에 대해 쓴 부분을 보았다거리에 작은 변화를 줄 때마다 왜 항상 가자로 돌아왔는지유럽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도 평생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쓰셨다그 집은 이제 파괴되었지만 말이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나는 항상 해외에서 살 기회가 있었지만 원하지 않았다뉴욕을 좋아하긴 하지만물론 뉴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다. 9/11 이후 바로 뉴욕을 방문했다그리고 로마도 좋아한다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많은 곳을 사랑한다팔레스타인도 사랑한다만약 나 같은 사람들이 모두 가자를 떠난다면 누가 남아 있을까 생각했다그래서 인재 유출을 막고 싶었다많은 아랍 작가들처럼 런던이나 파리, LA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며 고국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이탈리아에 가서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영원히 해외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왜냐하면진심으로가자는 정말 아름답다정말 아름다운 해안 도시다우리는 가자에서의 마신 커피 맛을 기억한다어떤 커피도 가자에서의 커피 맛을 따라올 수 없다물론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만모든 사람이 자신의 엄마 요리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가자가 좋다내가 속한 곳이고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이웃들과 할머니에게서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그들의 이야기고통사랑유머를 다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항상 느꼈다그래서 내 집이 파괴되었을 때 난 울었다인간이니까 당연하다그러나 내 소설 속 캐릭터들이 불쌍했다그들이 소설에서 나와 그 장소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그들이 평생 살아온 골목들은 파괴되었고그들이 살았던 집도 사라졌다내가 자랐던 자파 동네는 자파에서 온 난민들이 살던 곳이었다이제 그 골목도 사라졌고집들도 사라졌다.

그래서 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그 집을 찾지 못할 것 같다나는 집 밖에 앉아서 계단을 보며 이야기를 떠올렸다계단에서 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상상했다전쟁이 끝난 후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아내는 유일한 언니를 잃었고어머니도 잃었다그리고 지금까지 매일 밤 눈물을 흘린다왜냐하면 언니와 그의 남편아이들의 유해를 찾아 묻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전쟁 7~8일째부터 지금까지 잔해 아래에 묻혀 있다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건 묘지를 찾아가서 슬퍼할 수 있는 장소다우리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이 더 많이 울고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도할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개인적인 차원에서 진짜 전쟁은 전쟁이 끝난 후 시작될 것이다모두가 마찬가지다그들의 집도 파괴되었기 때문에 머물 곳이 없다북쪽 사람들은 다시 텐트를 메고 북쪽으로 돌아가서 잔해 옆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전쟁의 목적은 가자에서의 삶을 제거하는 것이다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고미래를 없애는 것이다과거와의 전쟁만이 아니라미래와의 전쟁이기도 하다미래가 오지 않게가자 사람들에게 미래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크리스 헤지스말씀하신 대로 건물이 폭격당해 처형과 그 남편을 잃었고딸과 손자의 시신은 이미 수습했다고 쓰셨다알려진 유일한 생존자는 중환자실로 이송된 다른 딸 중 한 명인 위삼뿐이었다위삼은 두 다리와 오른손이 모두 절단된 상태로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바로 전날 그녀의 예술대학 졸업식이었다그녀는 남은 여생을 다리 없이 한 손으로 살아가야 한다병원에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간신히 깨어났고, 30분이 지나자 꿈이지?”라고 물었다고 했다당신은 우리 모두 꿈속이야라고 대답했다그리고 그녀는 내 꿈은 끔찍해요왜죠?”라고 했고 당신은 꿈은 다 무서워.”라고 답했다. 10분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이모부거짓말하지 마세요제 꿈에는 다리가 없어요진짜예요그렇죠난 다리가 없어요.”, “하지만 꿈이라고 하셨잖아요저는 이 꿈이 싫어요이모부.”, 그리고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떠나야 했다긴 10분 동안나는 지난 며칠 동안의 끔찍함에 압도되어 울고 또 울었다병원을 나와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문득 생각했다우리는 이 도시를 전쟁 영화 세트장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다시 그녀를 찾아갔을 때 진통제나 진정제가 없어서 고통에 시달리는 그녀는 당신에게 치명적인 주사를 놓아달라고 요청하고 알라께서 용서해 주실 거라고 말했다당신은 하지만 알라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위삼이라고 대답했다그리고 그녀는 내가 대신 물어볼게요라고 대답했다위삼과 그 순간에 대해 더 얘기해달라.

아테프 아부 사이프나는 책을 쓰고 나서 한 번도 읽지 않았다모로코 카이로오만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책 일부를 읽지 말라는 조건만 달았다카타르에서는 운 좋게도 카타르 정부와 소통해서 그녀를 카타르로 옮겨 몇 차례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다. 8월 15일에 인공 사지 준비를 위해 몇 차례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아내가 뉴스를 보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러나 나는 위삼이 살아남았어믿을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그녀는 가족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형제자매가 없어서 유일한 언니와 그녀의 아이들남편을 잃은 상태였다위삼은 집에 있을 때 폭탄이 터졌고다리와 손 없이 옆집으로 던져졌다그들은 그녀를 병원으로 옮겼고그녀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침대에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었다나중에 카이로 병원에서 그녀가 다리와 손이 절단된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믿지 않거나 믿고 싶지 않은 꿈이다나도 매일 밤 아내가 울면서 이것이 악몽일 뿐이라면 어떨까?”라고 묻는 상황이다. 300일이 지난 지금도 아내는 이것이 꿈이라면 어떨까?”라고 말한다아내는 아테프휴대폰을 잡으면 가족에게 전화할 사람이 있잖아요하지만 내가 휴대폰을 잡으면 아무도 없어요.” 그녀의 언니하나뿐인 언니형부어린이가 아닌 두 아이, 25살과 28살인 그녀의 언니의 아들들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온 가족이다그들 모두 그녀의 전부였다아버지도 살아 계시지만 매우 노인이다그래서 그녀는 당신이 휴대폰을 들고 전화할 번호를 찾으면 나는 전화할 번호를 찾지 못해요.”라고 말한다위삼이 그날 나에게 했던 말이 계속 떠오른다만약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나는 가끔 이 모든 이야기가 내가 만든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이 든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내가 자발리아에서 아버지를 떠났을 때그는 나와 함께 라파와 남쪽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말했다, “아테프들어봐나는 평생을 여기서 살았고만약 알라가 내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여기서 죽을 거야나는 어디서든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실제로 그곳에서 돌아가셨는데빵 한 조각 찾아 먹지 못해서 죽었다. 10일 동안 그는 동물에게 먹이는 씨앗을 먹고 있었다아무튼남쪽으로 차를 몰기 전에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나는 알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지만그는 나를 위해 해주지 않았다나는 단지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왠지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지금까지도나는 종종 생각한다이게 내가 국가와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면 어쩌지내가 작가로서 모든 작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이것이 내가 만든 허구의 우주 중 하나일 뿐이라면 좋겠다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든 대화도 사실은 내가 이야기하기 위해 만든 이 허구의 우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크리스 헤지스감사드린다아테프아테프 아부 사이프와 그의 책 "왼쪽을 보지 마대량 학살의 일기"에 대해 이야기했다쇼를 제작한 소피아디에고토마스맥스에게도 감사드린다. ChrisHedges.substack.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A Diary of Genocide w/ Atef Abu Saif | The Chris Hedges Report (substack.com)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로, 15년 동안 뉴욕타임스의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중동 지국장과 발칸 지국장을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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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의 <Don’t Look Left: A Diary of Genocide>는 <집단학살 일기: 가자에서 보낸 85일>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6월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크리스 헤지스의 서문과 저자와 이탈리아판 편집자와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어 이 기사와도 짝을 이룰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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