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폭력, 질병에 맞서 전쟁터에서 진실을 전달하려는 사람들은 학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살인자들이 말하는 거짓말을 이겨내고 사실을 전달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 사진작가, 언론인이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쟁에서 침략자들의 표적이 되는 이유다.
2019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테프 아부 사이프(Atef Abu Saif)가 지난 10월부터 지속된 가자지구의 최근 공습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경험을 저서 '왼쪽을 보지 마; 대량학살의 일기(Don’t Look Left: A Diary of Genocide)'에 기록했다.
가자지구에서 태어난 사이프는 평생을 전쟁과 함께 살아왔다.
“나는 전쟁 중에 태어났고, 사실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우리의 삶이다.”
사이프는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이미지와 살해당한 사랑하는 사람과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트라우마를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가자에서의 삶이 “생존을 위한 타임아웃”이라는 그의 말처럼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이 전쟁에서 우리 집처럼 죽임을 당하고 집이 파괴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타임아웃과 같다. 휴식. 그래서 그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다.”
대량 학살에 직면한 존재에 대한 이 우주적인 묘사는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다리와 손 하나를 잃은 조카 위삼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꿈 속에 있어. 우리의 모든 꿈은 끔찍해.”
<크리스 헤지스 보고서>의 새로운 독립 시리즈인 이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사이프와 헤지스는 실질적이고 강력한 대화를 통해 이러한 경험과 그 이면의 의미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대량 학살의 생생함과 그것이 희생자들에게 가한 피해를 포착하고자 한다. 사이프의 유창함과 취약성이 사실과 데이터만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비극의 무게를 드러낸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와 함께하는 대량 학살의 일기 | 크리스 헤지스 보고서
인터뷰 전문
크리스 헤지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많은 팔레스타인 작가, 언론인, 사진작가들이 학살의 참상을 보고 느끼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결국 살인자들의 거짓말을 물리칠 것이다. 전시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은 저항의 행위이자 믿음의 행위다. 작가, 저널리스트, 사진작가들은 언젠가(언젠가는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 글과 이미지가 공감과 이해,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지혜를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한다. 이들은 사실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삶과 공동체의 질감, 신성함, 슬픔을 기록한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죽음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견디는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공포와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죽음이 어떤 것인지 세상에 알린다. 그들은 아이들의 울음소리, 어머니들의 슬픔의 통곡, 야만적인 산업 폭력에 맞선 매일의 투쟁, 오물, 질병, 굴욕, 공포를 이겨낸 인간성의 승리를 전달한다. 그렇기에 작가, 사진작가, 저널리스트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쟁의 침략자들이 말살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침략자들이 묻어두고 잊고 싶어 하는 악의 증인으로 서 있다. 팔레스타인 소설가 아테프 아부 사이프와 그의 15세 아들 야세르는 점령지 서안지구에 살고 있었고, 이스라엘이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을 때 아테프가 태어난 가자지구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고 있었다. 아테프는 이스라엘 점령군의 폭력에 낯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작가들이 하는 일을 했다. 여기에는 12월 7일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공습으로 누나의 아파트에서 형제와 누나, 그의 네 자녀와 함께 사망한 교수이자 시인인 레파트 알라리르도 포함된다. 아테프는 85일 동안 주변의 공포를 묘사하며, 강렬하고 감동적인 작품인 '왼쪽을 보지 마: 학살 일기'를 썼다. 점령지 팔레스타인 라말라의 자택에서 가자지구의 대량 학살과 그의 저서에 대해 저와 얘기할 아테프 아부 사이프를 소개한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 공격의 피해자인 작가, 저널리스트, 예술가, 사진작가들의 역할에 대해 소개해 준 크리스에게 감사드린다. 67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전쟁은 멈추지 않았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파 마을에서 쫓겨나 가자지구의 모래사장으로 보내져 난민 캠프에서 살다가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이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작가, 지식인, 예술가, 화가,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화에 대한 전쟁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1967년 상원의원이었던 가산 카나파니를 시작으로 마제드 샤라르 등 수많은 팔레스타인 작가들을 기억할 수 있고, 물론 그 명단은 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전하려는 국제 언론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인 [레이첼] 코리(인권 활동가)처럼 팔레스타인인들도 항상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하다. 이 여성은 15년 전, 라파에서 살해당했다. 그래서 점령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달하거나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폭력과 악의 대상이 되고, 어쩌면 살해당할 수도 있다.
언급한 것처럼 나는 1973년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태어났고, 내가 두 달이 되었을 때 1973년 전쟁이 시작된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나도 전쟁 중에 태어났고 사실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랍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제 소설 '정지된 삶'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임은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 중에 죽는다. 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인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생존을 위한 시간이다. 우리는 살아남지 못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 집처럼 죽임을 당하고 집이 파괴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타임아웃과 같다. 휴식 말이다. 그러니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다. 내가 처음 체포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그때 나는 9살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베이루트 전쟁이 한창이던 1982년이었다. 이스라엘군이 우리 학교를 공격했다. 이스라엘 점령군 지하실에 왔을 때 엄마가 대위에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어머니는 그가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쨌든 하루 정도 있다가 우리를 풀어줬다. 당시 우리는 학생 10명이었고 모두 같은 반 친구였다. 그러다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을 때 나도 내 또래의 젊은 남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다가 총을 세 번이나 맞았다. 동료 한 명은 실제로 나를 위해 무덤을 골랐고 무덤에 묻힐 예정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깨어나서 본 것이 영국인 외과 의사였던 게 기억난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500명을 학살한 병원에 있었다. 영국 병원, 가자 지구의 침례 병원이라고 불렀다. 나를 보고 의사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해줘서 12시간 동안 수술받았다. 그리고 살아났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당신이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고 느끼는 기분이 어떤지 나는 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기억나는 건,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자를 방문 중이던 나와 함께 있던 내 아들 야세르를 지키려고 했던 순간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생각해야 했다, 그 애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내가 그걸 놓쳤으니까. 그리고 물론, 무력감을 느꼈다. 많은 경우에 나는 그냥 이렇게 텐트 안에 앉아있었다. 이스라엘 헬리콥터나 드론에서 발사된 로켓이 날아와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인간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불행히도,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의 운명을 통제하는 것은 이스라엘 군대다. 그들이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운명을 통제하고, 그들을 파괴하는 쪽이니까 말이다.
물론 가자지구에서는 살인과 암살, 파괴가 끊이지 않는다. 내가 50년 동안 직접 목격한 수백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외할아버지는 1967년 전쟁에서 돌아가셨는데, 처음 만났을 때 얘기하지 못했지만 나크바(Nakba,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의 대량 강제 이주와 그로 인한 고통을 의미)에서 부상을 입었다, 믿을 수 있겠나? 그때 그는 야파(Jaffa)에 있었다. 아마 16살 정도였고,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당시 이스라엘 갱들이 우리 동네를 공격했을 때 부상을 입었다. 실제로 신문에 실렸고 당시 기사를 잘라서 가지고 있다. 1948년 4월, 1948년 4월 초에 다리를 다쳤다. 그리고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점령한 1967년에 사망했다. 이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가 너무 많다. 항상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하며,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하곤 한다. 나는 이스라엘 감옥에 있을 때 1차 인티파다에 5개월 또는 4개월 정도 갇혀 있었다.
크리스 헤지스: 당시 몇 살이었나, 아테프?
아테프 아부 사이프: 그 당시 18살이었다.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고등학교를 막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었다. 어쨌든 나는 네게브에 있는 이스라엘 감옥으로 보내졌는데, 히브리어로 크치옷(Ktzi'ot)이라고 불렀고 우리는 안사르 3이라고 불렀다. 서사와 용어에 대한 투쟁도 항상 있었다. 어쨌든, 그때 나는 이스라엘에 있었고 내 형제 나임은 가자 중앙 감옥에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42살 정도였고, 그날 우리를 방문하러 오셨다. 아침 9시에 나를 보러 오셨다. 나는 네게브 감옥으로 이송되지 않고 여전히 해변 근처에 있는 가자 구금소에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1월이었지. 그때 엄마는 42살이었고, 병에 걸려 있었다. 어쨌든, 나중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오후에 또 다른 감옥에 있는 형을 방문해야 했다. 삶은 고통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항상 스스로에게 상기시키셨겠지. 그녀의 두 아들이 감옥에 있었고, 그녀는 그들을 방문하고 멀리서라도 그들을 보고 힘을 주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을. 사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형이 곧 풀려날 거라고 말할 때 우리보다 더 강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난다, 정말 놀라웠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은 누구를 위해 세워진 게 아니야.” 무덤처럼 채워지면 끝이 아니라 어느 순간 떠나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불행히도 형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셔서 뵐 수 없었다. 평화와 전쟁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라면, 그녀가 오슬로 협정을 지지하며 시위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1993년 그들이 서명했을 때였다. 11월이었고 아라파트가 가자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어머니는 기쁘게 오슬로 협정을 지지하며 시위에 나섰어. 나는 그때 대학에 있었고, “와, 엄마가 정치 활동가가 됐네.”라고 말했었다. 어머니는 “아니, 나는 오슬로를 지지해, 내 아들이 풀려날 거니까.”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머니는 2년 뒤에 돌아가셨고 아들이 석방되는 것을 보지 못하셨다. 이 이야기는 평화 과정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자신만의 타임 아웃을 찾는 삶이다. 내 책 제목도 아랍어로 "생존을 위한 타임아웃"이다. 이 끔찍한 전쟁이나 집단 학살 속에서 타임 아웃을 찾는 것이다. 불행히도 똑같은 이야기를 내 손자에게도 해줄 수밖에 없다는 게 슬프다. 내 할머니가 야파(Jaffa)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말이다. 할머니의 빌라는 지금도 야파에 남아 있고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이 살고 있다. 나는 그 빌라를 몇 번 봤고, 기술자가 만든 구조도를 하나의 소설 표지에 넣었다. 어쨌든 할머니는 빌라를 떠나 모래 위를 걸어서 가자로 내려가야 했고, 해변에 있던 빌라에서 살다가 텐트에서 살아야 했다. 부유했던 그녀는 매우 가난하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미래에 내 손자에게 할머니가 내게 해준 이야기를 똑같이 해줘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겠는가? 이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말이다. 삶은 모험이나 여정이 아니고, 연극도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역할을 하고 무대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만들어진 그대로다.
크리스 헤지스: 10월 7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당신이 견뎌내고 기록한 첫 번째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이 쓴 이전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알기로는 2018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교해 보고 싶다. 우선 당신이 쓴 첫 번째 책 이야기를 해보자. 그 책에서는 이스라엘이 감행한 쉼 없는 포격과 폭격, 살해를 하루하루 기록했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 그렇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가자의 모든 전쟁을 겪었다. 하지만 이전의 공격에 대해서도 글을 썼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 그 글들은 아직 가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희망하건대. 2014년 전쟁은 여름에 일어났고, 사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딱 이 시기에 시작됐다. 그때 전쟁은 매우 거대하고 매우 공격적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스라엘 공격을 경험했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갑자기 일어났고 공격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 군대가 오슬로 협정 이후 처음으로 가자를 침공했다. 그들은 남쪽에서, 우리가 가자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도시를 침공했다. 나는 매일 일어난 일을 기록했다, 왜냐하면 그때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두 전쟁을 비교해 볼 수 있겠지만, 때로는 전쟁을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우리를 죽이려고 하니까 말이다.
때로는 죽음이 더 가까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항상 우리를 잡으려는 것 같다. 2014년 전쟁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거대한 전쟁이었다. 우리는 그 전쟁을 목격했고, 경험했으며, 그 위험성을 느꼈다.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많은 기억이 나는데, 그때 나는 더 많이 관여했고, 내가 태어난 난민 캠프인 자발리아(Jabalia)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줬던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잔해 속에서 사람들을 구출했고, 종종 몸통 없는 머리나 손만 발견하곤 했다. 정말 끔찍했다. 많은 경우에 나는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특히 시체를 운반할 때 말이다. 한번은 샤워를 15번이나 12번이나 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번 전쟁처럼 전기와 물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은 전쟁이라기보다 가자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이번 전쟁은 집단 학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물과 전기를 끊었다.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언론조차 지금 말하지 않는다. 곧 전쟁이 300일이 될 거라고, 가자에서 전기와 물 없이 300일이 될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4년 당시에는 어느 정도 정기적인 물 공급이 있었다. 며칠 동안 물이 끊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물이 있었다. 샤워를 12번 하고 나서, 그 가족 이름이 기억난다. 발라타(Balata) 가족이었다. 그들은 캠프의 묘지 근처에 살았고, 러시아인이었다.
그 후 악몽에 시달렸고, 손이나 머리 없이 남은 머리카락을 봤던 기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 걸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밤에 잠에서 깨어날 때,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기에 손을 대고 싶었다. 만약 내가 살아 있다면, 전기에 손을 대고 나서 죽을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만약 내가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니, 손대지 말자'라고 결심했다. 그 당시에는 말하기 싫지만, 다가오는 전쟁에 대한 리허설 같았다. 하나의 연습처럼 느껴졌다. 현재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가자 언론사에 있었다. 이스라엘 군대가 나중에 암살한 벨랄 자달라는 그 언론사 책임자였고, 내가 책을 헌정한 사람이다. 우리는 2014년 전쟁과 현재 전쟁을 비교하려고 했다. 2014년 전쟁은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큰 전쟁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벨랄은 이미 죽었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우리는 '이 전쟁이 51일째, 즉 이전 전쟁의 길이만큼 지속되지 않으면, 이것은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물론, 우리는 그 전쟁이 51일 동안 계속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달래려고 했다. 텐트에 있을 때, 나의 고모할머니인 누르 할머니는 “라마단을 여기서 보내야 할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텐트에서 라마단을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누르는 어린 시절을 텐트에서 보냈고, 생의 마지막 몇 달을 텐트에서 보냈다. 마찬가지로 나의 장모도 1948년 아시클론의 마즈달 아스칼란에서 태어나 어머니에게 안겨 가자로 와서 처음 세 해를 텐트에서 보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텐트에서 사망했고, 나는 그녀에 대해 책에 언급했지만, 그녀가 돌아가신 후에야 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모할머니는 “라마단을 여기서 보내야 할까?”라고 묻곤 했었다. 라마단이 끝난 후, 전화로 나에게 “아텝, 우리는 여기서 이 전쟁의 첫 번째 기념일을 기억할까?”라고 물어본다. 이는 10월 7일이 다가오면 다시 전쟁의 기념일이 온다는 뜻이다. 오늘도 내 여동생 아시아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 전쟁의 첫 번째 기념일을 여기서 기억할 것 같아?”라면서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미안하다.
크리스 헤지스: 아니다. 원하시는 만큼 말씀해달라.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레파트 알라리르(Refaat Alareer)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물론 그의 여동생과 가족들과 함께 이스라엘군에 의해 추적당해 암살당한 것이 분명하다. 시작하기 전에 그에 대해 조금만 말씀해달라.
아테프 아부 사이프: 나는 레파트 알라리르를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 프로젝트에서 알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 제목은 2014년 전쟁 당시 뉴욕 타임스에 실린 내 기사 중 하나에서 따온 것이다. 매일 제목을 달고 있었다. 레파트 알라리르는 가자에서 매일 보고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하게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전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과장하지 않았고, 시인들이 할 법한 정치적인 글도 아니었다. 그냥 그가 목격한 일을 썼다. 이웃과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적으로 기록했다. 그의 기사 중 하나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언론에 나서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조차 있었다.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레파트 알라리르의 암살은, 마치 가자 언론사 책임자인 벨랄 자달라의 암살과도 같다. 그는 가자에서 다섯, 여섯 가지 언어로 뉴스를 전달했다, 물론 그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팀이 했었다. 시인 살림 알나파와 같은 다른 시인들과도 마찬가지였다. 예술가, 작가, 사진작가 등, 그리고 제닌(Jenin)에서 암살당한 시린 아부 아클레도 기억한다. 진실을 숨기려는 싸움이다, 진실 자체를 공포로 몰아가서 아무도 진실에 손대지 못하게 하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시보다 강한 것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사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삶, 고통, 영혼, 고난을 전한 시인, 기자, 영화 제작자의 이름은 기억한다.
레파트 알라리르는 자신이 한 일을 믿었다. 그의 시에서 말했듯이, “내가 죽어야 한다면”이라는 표현처럼, 진실은 하늘을 나는 연과 같은 것이다. 긴 하얀 꼬리가 달려서 가자 해변 어디서든 한 아이가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희망이라 생각한다. 진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전달자가 죽더라도, 진실은 죽지 않는다. 다른 용기 있는 사람이 그것을 전할 것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고통을 전달해 준 예술가들과 시인들에게 매우 감사한다. 기억해야 한다, 이는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영국군도 팔레스타인 시인들을 감옥에 넣었다. 나자렛(Nazareth)의 위대한 시인들도 그 당시 감옥에 갇혔었다. 진실은 항상 그렇다. 항상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억압자들, 모든 살인자들은 진실을 죽이려 한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왜 네 동료 인간을 죽이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왜 가자에서 예를 들어 성 같은 것을 파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카스르 알바샤 궁전(Qasr al-Basha Palace)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가자에 들어왔을 때 사무실로 사용했던 곳이다. 터키인들도 군사 사무실로 사용했었고,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왜 그것을 파괴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 말이다. 이미 점령했고, 그곳에 있었으면서 말이다.
탱크들이 그곳에 있었고, 심지어 멀리서 포격하지도 않았다. 탱크들이 성의 역사적인 벽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바샤 궁전(Basha Palace)이라고 부르는 그곳은 박물관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페니키아 항아리와 십자군의 검이 있었다. 여러 시대의 유물들이 있었다. 이슬람 유물도 있었고, 아무도 왜 저항도 없고 군대도 없는 역사적인 궁전 앞에서 서 있다가 그것을 파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미쳤다고 해도, 그곳에 앉아서 승자로서 커피를 즐기면 되지 않는가. 아니면 승자가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곳에 앉아서 도시를 즐기면 되잖아. 가자 시내 한가운데서 말이다. 누구도 왜 파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 예술가의 작업실에 들어가서 그것을 파괴하는 걸 즐기는 영상도 있다. 도둑질을 즐긴다고 해도, 그것을 가져가서 숨기면 되지. 단순히 그림을 망치고 피 흘리는 색을 즐기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항상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6, 7년 동안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야파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 집의 그림이 파괴되었을 때도 그랬고, 팔레스타인 신문의 그림이 파괴되었을 때도 그랬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같은 고통을 반복한다. 나는 이런 일이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세상이 이 모든 고통과 긴 여정의 끝을 맺기를 희망한다.
크리스 헤지스: 정착민 식민지 프로젝트에서 그들은 점령지의 문화, 정체성, 역사를 파괴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거나 팔레스타인 원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요한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다. 왜 시인을 죽이지? 왜 레파트 알라리르를 죽였지? 그는 항상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 사랑에 대해 쓰고 싶어했지만, 사랑을 찾지 못했다. 그는 딸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던 장난감에 대한 시를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라파 검문소에서 그 선물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에 대해 쓸 수 없었다. 왜 박물관을 파괴할까? 나는 서사적인 싸움을 이해한다. 단지 물리적으로 우월할 뿐만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우월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서사와 이야기가 이 지역을 압도하기를 원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도둑들도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지 않는가. 그러나 도둑들도 자신들이 침입한 집에서 좋은 것들을 가져가지 않는가. 그리고 역사적으로 식민지배자들도 원주민의 문화를 약간의 존중을 가지고 훔쳤었다. 또 한 명의 시인이 있다. 지금 우리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다. 나는 그를 전쟁 첫 달에 봤다. 그의 시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150일 넘게 잔해 속에 있다. 우리의 상실감을 상상해 보라. 그의 아이를 만났을 당시 6살이었고, 우리는 생일을 함께 축하했었다.
다른 날에도, 21일에, 젊은 팔레스타인 시인 필라르(Pilar). 그의 이름은 [들리지 않음]이다. 내가 페이스북에 그의 이름을 썼다. 그는 집에서 죽었고, 매우 아름다운 시를 썼다. 아랍어로 썼다. 이제는 죽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어떻게 그가 그 상황을 두려워했는지, 그의 여동생을 진정시키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26살이었다. 그의 집은 중심지에 있었고, 나는 누세이라트(Nuseirat) 난민 캠프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죽었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 전쟁은 인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장소의 역사와 장소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심지어 나무도 목표로 하고 있다. 정원에 구아바나 망고 같은 나무를 심으면, 완전히 자라기까지 30년이 걸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와서 그 나무를 뽑아가는 것이다. 내 여동생이 베이트 라히야(Beit Lahia)에서 집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제 46살인데, 그녀는 “새집을 지을 시간이 없어”라고 했다. 그녀와 남편은 결혼했을 때 20대였고, 25년 동안 집을 지었다. 그녀는 “이제 새집을 지을 시간이 없어”라고 말했다. 정원에 새로운 나무를 심을 시간도 없다. 이 전쟁은 가자에서 모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자를 그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정치 정당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민병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특정 정당이나 사람, 캐릭터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자를 제거하고 가자에서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한다. 오늘이나 내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 동안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자를 떠나게 만들려고 한다.
크리스 헤지스: 쓰신 책을 조금 읽어보고 싶다. 놀라운 작품이다. 대량 학살의 상황과 공포를 잘 포착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젊은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친구를 잃었다. 당신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지켜보는 것을 언급했다. “그들의 적외선 렌즈와 위성 사진들. 당신은 묻는다, 내 바구니에 있는 빵의 개수와 내 접시에 있는 팔라펠 볼의 개수를 셀 수 있을까?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가족들, 그들의 집과 잔해, 매트리스, 옷 가방, 음식과 음료를 운반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슈퍼마켓, 환전소, 팔라펠 가게, 과일 가판대, 향수 가게, 과자 가게, 장난감 가게, 모두 불탔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피가 곳곳에 있었다, 아이들의 장난감 조각들, 슈퍼마켓에서 나온 캔들, 부서진 과일, 깨진 자전거들, 산산조각난 향수병들, 그곳은 마치 용에게 불타버린 마을을 그린 목탄 그림 같았다.” 물론, 가자에 대한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파괴는 그야말로 종말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시작된 초반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 처음부터 이 전쟁은 그 전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나?
아테프 아부 사이프: 사실 전쟁이 시작될 때 나는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내내 수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가자를 방문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안타깝게도 전쟁 중인 올해 4월 중순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음식과 약이 부족해서였다. 어쨌든 아버지와 내 여동생들을 방문하고 있었고, 우리는 10월 7일 팔레스타인 유산을 기념할 예정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해변에 갔고, 오랜만에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그러다 전쟁이 시작됐다. 그때 나는 매부에게 전화해서 “물에서 나와야 해. 전쟁이야.”라고 말했다. 그때가 아침 6시 30분이었다. 그는 “아니야, 그냥 또 다른 확전일 뿐이야.”라고 말했었다. 나는 매부를 물속에 두고 떠났다. 그는 “가, 가, 나를 두고 가.”라고 했었다. 그는 해변 근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동생 무함마드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 그때 경찰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상황이 매우 어두워졌다. 우리는 이것이 다른 유형의 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14년 전쟁 때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었다. 그때는 가자가 타겟이 되었고, 다음날은 자발리아, 라파, 칸 유니스 순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10월 7일과 8일, 전쟁 첫 이틀 동안 포격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어디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언론사에 머물러야 했다. 낮에는 어떤 구역에 있었는데, 떠날 수가 없어서 기자들 책상 사이에서 잠을 자야 했다. 처음부터 이 전쟁이 매우 힘든 전쟁이 될 것이라고 알았다. 이전 전쟁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주로 국경 근처나 북쪽, 동쪽 국경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발리아 난민 캠프의 어떤 학교에 모였다. 우리는 군대가 자발리아에 들어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전쟁 중에도, 심지어 전쟁이 한 달이 지나도, 우리는 그들이 여기에 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건 대량 학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인자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과밀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에서 가자에서 쫓겨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지 2~3주 후에도 나는 “그냥 또 다른 전쟁일 뿐이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달랐다. 이번 전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나크바 전쟁과 비교할 만큼 충격적이다. 사람들이 강제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 전쟁과 같은 말들을 반복했다. 나도 모르게 내 아이에게 “며칠 후면 돌아올 거야.”라고 말했다. 마치 내 할머니와 모든 노인들이 1948년에 아이들에게 했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내 기사에서, 나는 나크바와 다른 어떤 것도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나크바는 정치적 공격의 결과였고, 팔레스타인 국가나 존재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나는 나크바를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은 나크바였다. 1960년 전쟁도 생각나지 않았다. 1960년 전쟁 때는 서안지구의 절반이 요르단으로 쫓겨났고, 가자의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으로 쫓겨났다. 내 할아버지 이브라힘과 삼촌들도 자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떠나야 했고, 내 아버지와 할머니만 자발리아에 남았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팔레스타인 밖에서 난민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 전쟁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은 나크바다. 나크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정말 큰 재앙이었다. 나크바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매우 무거운 재앙이다. 그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1967년을 또 다른 나크바라고 부르지 않는다. 단지 음 하나를 바꿔서 낙사(Naksa)라고 불렀다. ‘패배’를 의미한다.
전쟁이 시작된 지 2~3주 후, 아무도 우리가 쫓겨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나는 남쪽과 북쪽을 잇는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울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여자들, 남자들, 아이들, 임신한 여성들이 검문소를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내 아이와 함께 할머니, 아니 장모의 휠체어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검문소를 건넜다. 그러면서 나는 난민 캠프에서 자란 70년대와 80년대에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떠올렸다. 남쪽 야파와 남쪽의 모든 마을에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백 번 들었다. 모든 이야기가 영화처럼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이 그 영화 속의 또 다른 장면이 되었다. 나는 이 큰 화면 속의 또 다른 장면이 되었다.
크리스 헤지스: 책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15살인 어린 아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사방에 시체가 있었다. 아들에게 보지 말라고 했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 어떤 움직임, 어떤 몸짓, 어떤 신호를 보이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출판사와 논쟁을 벌이다가 군인이 탱크 위에 앉아있다고 해서 책 제목을 '탱크 위의 커피'라고 지을 뻔했던 기억이 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시신 위에서 슬퍼하고 있는데 어떻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군인들은 16살 소녀를 조준하고 있었고, 언제든지 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책 이름을 그렇게 지을 뻔했지만, 탱크나 드론을 제목에 넣지 않기로 했다. 출판사와 다른 제목에 대해 논의해야 했다. 그렇게 시신들을 밟고 지나가면서 또 다른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아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했다. 두리번거리다 군인이 “야, 너, 흰 티셔츠에 안경 쓰고 긴 머리, 청바지, 바지 입은 젊은 남자 이리 와”라고 부르면 위험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거나 영화 장면처럼 보면 비슷한 사람을 여럿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운이 나쁜 사람은 군인의 왼쪽에 있다가 총에 맞을 수 있다.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보고 지나가는 거다.
올림픽이 열리는 지금 파리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을 상상해 보라. 결승선을 통과하면 ‘내가 해냈다, 내가 살아남았다, 내가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느낌이 들것이다. 그런데 검문소를 통과한 후에 찍은 사진이 몇 장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난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태어났고, 다시 난민이 되었다. 장모님도 난민이 되었다. 그 선을 넘자마자 우리는 태양 너머, 빛 너머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 있었다. 사실 거기에 다리가 있는데, 가자지구에서 가장 긴 거리의 이름을 딴 살라 알 딘 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를 건넌 것을 후회한다. 다시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
크리스 헤지스: 책에서 읽었는데, 자발리아에 있는 집에 대해 쓴 부분을 보았다. 거리에 작은 변화를 줄 때마다 왜 항상 가자로 돌아왔는지, 유럽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도 평생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쓰셨다. 그 집은 이제 파괴되었지만 말이다.
아테프 아부 사이프: 나는 항상 해외에서 살 기회가 있었지만 원하지 않았다. 뉴욕을 좋아하긴 하지만, 물론 뉴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다. 9/11 이후 바로 뉴욕을 방문했다. 그리고 로마도 좋아한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많은 곳을 사랑한다. 팔레스타인도 사랑한다. 만약 나 같은 사람들이 모두 가자를 떠난다면 누가 남아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인재 유출을 막고 싶었다. 많은 아랍 작가들처럼 런던이나 파리, LA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며 고국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가서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해외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가자는 정말 아름답다. 정말 아름다운 해안 도시다. 우리는 가자에서의 마신 커피 맛을 기억한다. 어떤 커피도 가자에서의 커피 맛을 따라올 수 없다. 물론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엄마 요리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가자가 좋다. 내가 속한 곳이고,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웃들과 할머니에게서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이야기, 고통, 사랑, 유머를 다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항상 느꼈다. 그래서 내 집이 파괴되었을 때 난 울었다. 인간이니까 당연하다. 그러나 내 소설 속 캐릭터들이 불쌍했다. 그들이 소설에서 나와 그 장소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이 평생 살아온 골목들은 파괴되었고, 그들이 살았던 집도 사라졌다. 내가 자랐던 자파 동네는 자파에서 온 난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제 그 골목도 사라졌고, 집들도 사라졌다.
그래서 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그 집을 찾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집 밖에 앉아서 계단을 보며 이야기를 떠올렸다. 계단에서 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상상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내는 유일한 언니를 잃었고, 어머니도 잃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매일 밤 눈물을 흘린다. 왜냐하면 언니와 그의 남편, 아이들의 유해를 찾아 묻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 7~8일째부터 지금까지 잔해 아래에 묻혀 있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건 묘지를 찾아가서 슬퍼할 수 있는 장소다. 우리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이 더 많이 울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도할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짜 전쟁은 전쟁이 끝난 후 시작될 것이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들의 집도 파괴되었기 때문에 머물 곳이 없다. 북쪽 사람들은 다시 텐트를 메고 북쪽으로 돌아가서 잔해 옆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전쟁의 목적은 가자에서의 삶을 제거하는 것이다.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미래를 없애는 것이다. 과거와의 전쟁만이 아니라, 미래와의 전쟁이기도 하다. 미래가 오지 않게, 가자 사람들에게 미래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크리스 헤지스: 말씀하신 대로 건물이 폭격당해 처형과 그 남편을 잃었고, 딸과 손자의 시신은 이미 수습했다고 쓰셨다. 알려진 유일한 생존자는 중환자실로 이송된 다른 딸 중 한 명인 위삼뿐이었다. 위삼은 두 다리와 오른손이 모두 절단된 상태로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바로 전날 그녀의 예술대학 졸업식이었다. 그녀는 남은 여생을 다리 없이 한 손으로 살아가야 한다. 병원에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간신히 깨어났고, 30분이 지나자 “꿈이지?”라고 물었다고 했다. 당신은 “우리 모두 꿈속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 꿈은 끔찍해요. 왜죠?”라고 했고 당신은 “꿈은 다 무서워.”라고 답했다. 10분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이모부,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 꿈에는 다리가 없어요. 진짜예요, 그렇죠? 난 다리가 없어요.”, “하지만 꿈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이 꿈이 싫어요, 이모부.”, 그리고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떠나야 했다. 긴 10분 동안, 나는 지난 며칠 동안의 끔찍함에 압도되어 울고 또 울었다. 병원을 나와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전쟁 영화 세트장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다시 그녀를 찾아갔을 때 진통제나 진정제가 없어서 고통에 시달리는 그녀는 당신에게 치명적인 주사를 놓아달라고 요청하고 알라께서 용서해 주실 거라고 말했다. 당신은 “하지만 알라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위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대신 물어볼게요”라고 대답했다. 위삼과 그 순간에 대해 더 얘기해달라.
아테프 아부 사이프: 나는 책을 쓰고 나서 한 번도 읽지 않았다. 모로코 카이로, 오만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책 일부를 읽지 말라는 조건만 달았다. 카타르에서는 운 좋게도 카타르 정부와 소통해서 그녀를 카타르로 옮겨 몇 차례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다. 8월 15일에 인공 사지 준비를 위해 몇 차례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 아내가 뉴스를 보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위삼이 살아남았어. 믿을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족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없어서 유일한 언니와 그녀의 아이들, 남편을 잃은 상태였다. 위삼은 집에 있을 때 폭탄이 터졌고, 다리와 손 없이 옆집으로 던져졌다. 그들은 그녀를 병원으로 옮겼고, 그녀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침대에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었다. 나중에 카이로 병원에서 그녀가 다리와 손이 절단된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믿지 않거나 믿고 싶지 않은 꿈이다. 나도 매일 밤 아내가 울면서 “이것이 악몽일 뿐이라면 어떨까?”라고 묻는 상황이다. 300일이 지난 지금도 아내는 “이것이 꿈이라면 어떨까?”라고 말한다. 아내는 “아테프, 휴대폰을 잡으면 가족에게 전화할 사람이 있잖아요. 하지만 내가 휴대폰을 잡으면 아무도 없어요.” 그녀의 언니, 하나뿐인 언니, 형부, 어린이가 아닌 두 아이, 25살과 28살인 그녀의 언니의 아들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온 가족이다. 그들 모두 그녀의 전부였다. 아버지도 살아 계시지만 매우 노인이다. 그래서 그녀는 “당신이 휴대폰을 들고 전화할 번호를 찾으면 나는 전화할 번호를 찾지 못해요.”라고 말한다. 위삼이 그날 나에게 했던 말이 계속 떠오른다. 만약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나는 가끔 이 모든 이야기가 내가 만든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이 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자발리아에서 아버지를 떠났을 때, 그는 나와 함께 라파와 남쪽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말했다, “아테프, 들어봐. 나는 평생을 여기서 살았고, 만약 알라가 내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여기서 죽을 거야. 나는 어디서든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실제로 그곳에서 돌아가셨는데, 빵 한 조각 찾아 먹지 못해서 죽었다. 10일 동안 그는 동물에게 먹이는 씨앗을 먹고 있었다. 아무튼, 남쪽으로 차를 몰기 전에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알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지만, 그는 나를 위해 해주지 않았다. 나는 단지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왠지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종종 생각한다, 와, 이게 내가 국가와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면 어쩌지, 내가 작가로서 모든 작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내가 만든 허구의 우주 중 하나일 뿐이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든 대화도 사실은 내가 이야기하기 위해 만든 이 허구의 우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크리스 헤지스: 감사드린다, 아테프. 아테프 아부 사이프와 그의 책 "왼쪽을 보지 마: 대량 학살의 일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쇼를 제작한 소피아, 디에고, 토마스, 맥스에게도 감사드린다. ChrisHedges.substack.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A Diary of Genocide w/ Atef Abu Saif | The Chris Hedges Report (substack.com)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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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로, 15년 동안 뉴욕타임스의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중동 지국장과 발칸 지국장을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