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투즈(Adam Tooze) @adam_tooze
@stephenwertheim 이것을 어떤 전통적인 의미에서조차 호전성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2003년과는 다르다. 이것은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근본적으로 너무 진지하지 않은 것 아닌가?
스티븐 베르트하임(Stephen Wertheim) @stephenwertheim · 2월 27일
트럼프는 미국인들을 전쟁에 대비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설득력 있는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이란 공격이 빠르고 고통 없이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청난 정치적 위험이며, 동시에 트럼프가 얼마나 호전적으로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 아침(3월 1일), 월요일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나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에 출간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경이로운 저서 ⟪소비의 사회⟫(The Consumer Society)를 읽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음 구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소비되는 재난의 현기증
기호의 사용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그 기능은 언제나 일종의 주술 행위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불러내는 동시에 무엇인가를 몰아내는 행위다. 즉 어떤 것을 기호 속에 붙잡기 위해 그것을 떠올리게 하고(힘, 현실, 행복 등), 또 어떤 것을 불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고 억압한다. 우리는 마술적 사고가 자신의 신화 속에서 변화와 역사를 몰아내려 한다는 사실을 안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 사실, 정보의 전면적 소비 또한 현실의 기호로 현실을 몰아내고, 변화의 기호로 역사를 몰아내려 한다.
우리는 현실을 선취적으로, 또는 사후적으로 소비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우리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것을 소비한다. 그 거리는 곧 기호가 만들어내는 거리다. 예를 들어, <파리 마치>(Paris-Match)가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비밀 경호 인력들이 경찰청 지하에서 기관총 훈련을 하는 장면을 실었을 때, 우리는 그 이미지를 단순한 ‘정보’, 즉 정치적 맥락을 설명해 주는 자료로 읽지 않았다. 그 이미지는 우리 각자에게 장대한 암살 시도, 거대한 폭력적 사건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암살 시도는 곧 일어날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 이미지는 그 사건의 전조처럼 작동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사건을 미리 맛보는 쾌락을 느꼈다. 모든 왜곡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실행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카고 컬트(cargo cult)에서 기적적인 풍요를 기다릴 때 나타나는 것과 같은 역전 효과를 본다. 화물이든 재난이든,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소비되는 현기증’을 경험한다.
우리는 그것이 결국 우리의 환상이 이미지 속에서 기표화되고 그 안에서 소비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심리적 측면은 우리가 덜 관심을 두는 부분이다. 우리가 더 주목하는 것은 이미지 속으로 들어와 그 안에서 소비되면서 동시에 억압되는 것, 곧 현실 세계, 사건, 역사다.
오늘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베네수엘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몇 주 전 주장했듯이, 마두로의 강탈은 오랫동안 예고되었던 그 경이로운 폭력적 사건이었다.
소비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대중 커뮤니케이션에서 뉴스 아이템(le fait divers)의 보편성이다. 모든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정보는 동일한 형식으로 수용된다. 그것은 동시에 무해하고 기적적인 뉴스 아이템의 형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현재화된다. 즉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극화된다. 동시에 그것은 전적으로 탈현재화된다. 즉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의해 거리화되고 기호로 환원된다. 따라서 뉴스 아이템은 여러 범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우리의 마술적 사고와 신화를 떠받치는 핵심 범주다.
이 신화는 현실, ‘진실’, ‘객관성’에 대한 더욱 탐욕스러운 요구로 지탱된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시네마 베리테(cinéma-vérité, 현장 다큐멘터리 기법), 생중계, 뉴스 속보, 강렬한 사진, 목격자 보도를 본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사건의 심장’, ‘전투의 심장’, ‘라이브’, ‘대면’을 찾는다. 우리는 사건 한가운데에 완전히 서 있다는 듯한 현기증 나는 감각, 곧 살아 있는 현실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거대한 전율을 갈망한다. 그것은 다시 한번 기적이다. 텔레비전과 녹화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미디어 보도의 진실은 바로 내가 거기에 없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보다 더 진실한 것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환상이다.
대중 커뮤니케이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이 만들어내는 현기증 같은 감각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건의 소용돌이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소비하지만, 실제로는 그 소용돌이와 단절된 채 안전한 자리에 머문다. ‘아마존의 심장’, ‘현실의 심장’, ‘열정의 심장’, ‘전쟁의 심장’이라는 표현은 모두 사건의 중심을 가리키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중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내는 그 ‘심장’이라는 장소에서는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열정과 사건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표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로 그 기호들이 우리에게 안전감을 준다.
따라서 우리는 기호에 둘러싸여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기적적인 안전 속에서 산다. 우리가 세계의 이미지를 볼 때, 누가 이 짧은 현실의 돌출을 거기에 있지 않다는 깊은 쾌락과 구별할 수 있는가. 이미지, 기호, 메시지,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은 세계와의 거리로 보증된 우리의 평온을 재현한다. 그 거리는 현실에 대한 암시가 아무리 폭력적일지라도 그것에 의해 위협받기보다는 오히려 더 위로받는다.
거기에 있지 않다는 깊은 쾌락을 생각한다. 나는 가자를 떠올린다.
소비자가 현실 세계, 정치, 역사, 문화와 맺는 관계는 이해관계, 투자, 헌신적 책임의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무관심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호기심의 관계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여기서 정의한 소비의 차원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원도 아니고 완전한 무지의 차원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인의 차원이다.
호기심과 오인은 현실에 대한 동일한 전반적 태도를 가리킨다. 대중 커뮤니케이션의 실천은 이 태도를 일반화하고 체계화한다. 이것이 우리의 ‘소비 사회’를 특징짓는다. 그것은 현실의 기호를 탐욕스럽고 반복적으로 포착하는 것에 기초한 현실의 부정이다.
나는 동시에 소비의 장소를 정의한다. 그것은 일상성이다. 일상성은 단지 일상 행위들의 총합이나 평범함과 반복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체계다. 일상성은 총체적 실천을 초월적이고 자율적이며 추상적인 영역(정치, 사회, 문화)과 내재적이고 닫혀 있으며 추상적인 ‘사적’ 영역으로 분리한다. 노동, 여가, 가족, 지인 관계를 개인은 세계와 역사 이편에서 하나의 응축된 체계로 재조직한다. 그 체계는 사적 영역의 폐쇄성, 개인의 형식적 자유, 환경을 안전하게 전유하는 행위, 그리고 오인에 기초한다. 총체의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일상성은 빈곤하고 잔여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를 ‘내부 소비’를 위해 완전히 자율화하고 재해석하려는 노력 속에서 승리감과 도취를 느낀다.
바로 여기에서 사적인 일상과 대중 커뮤니케이션은 깊이 결탁한다. 스스로를 닫힌 세계로 만드는 일상성, 곧 베르보르겐하이트(Verborgenheit)는 ‘세계의 재현된 모습’ 없이는, 자신이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알리바이 없이는 버틸 수 없다. 일상은 그 초월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이미지와 반복되는 기호를 통해 끊임없이 자극받아야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일상의 평온은 오히려 현실과 역사의 현기증 나는 소용돌이를 필요로 한다. 일상은 자신의 안락함을 더 또렷하게 느끼기 위해, 계속해서 소비되는 폭력을 요구한다. 이것이 일상성의 특유한 외설성이다. 일상은 사건과 폭력을 원한다. 다만 그 폭력이 안전하게, 적당히 식은 상태로 제공될 때만 그렇다. 그 전형적인 장면이 바로 베트남 전쟁 화면을 보며 소파에 기대앉아 있는 텔레비전 시청자다. 텔레비전 화면은 마치 바깥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먼저 거실이라는 안전한 공간을 전제한 채, 그 안으로 세계의 잔혹한 외부성을 끌어들인다. 그렇게 외부 세계는 친밀하고 따뜻한 것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것은 뒤틀린 방식의 따뜻함이다.
베트남, 쿠웨이트, 이라크(적어도 2003년)의 경우 이 분석은 정확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전히 그것을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살아진’ 차원에서 소비는 현실 세계, 사회, 역사로부터의 최대한의 배제를 최대한의 안전 지표로 만든다. 소비는 긴장의 해소, 결핍 속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소비는 하나의 모순과 마주한다. 이 새로운 가치 체계가 함의하는 수동성과 본질적으로 여전히 자발성, 행동, 효율, 희생을 강조하는 사회적 도덕 규범 사이의 모순이다. 이 모순은 새로운 쾌락주의적 행동 양식에 강한 죄책감을 부여한다. ‘욕망의 전략가들’이 분명히 제시하듯, 사람들은 수동성에서 죄책감을 제거해야 한다. 역사도 없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백만 명에게 수동성은 무죄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대중 매체의 스펙터클한 극화가 개입한다. 사고와 재난 보도는 모든 메시지의 일반화된 범주다. 청교도적 도덕과 쾌락주의적 도덕 사이의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사적 영역의 이 평온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파국적 운명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힘겹게 지켜지는 가치로 나타나야 한다. 외부 세계의 폭력과 비인간성은 안전을 더 깊이 체험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안전을 매 순간 하나의 선택으로 정당화하도록 만든다. 운명, 열정, 파멸의 기호는 보호된 영역 주위를 무성하게 둘러싸야 한다. 그래야 일상성이 그 반대편에 있는 장엄함과 숭고함을 다시 움켜쥘 수 있다. 그래서 운명은 사방에서 호출되고 기표화된다. 그리하여 평범함은 그것을 즐기고 거기서 정당성을 찾는다.
교통사고가 라디오와 텔레비전, 언론, 개인적 대화, 국가적 담론에서 그렇게 강하게 소비된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 충돌은 ‘일상적 운명’의 가장 훌륭한 전형이다. 그것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용되는 이유는 그것이 필수적인 집단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교통사망자의 나열은 일기예보의 나열과 맞먹는다. 실제로 두 목록은 하나의 신화적 쌍을 이룬다. 태양에 대한 집착과 죽음의 나열은 분리할 수 없다.
나는 창밖에 부드럽게 내리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중동의 드라마가 언제쯤 ‘겨울 폭풍’ 경보로 중단될지를 자문한다.
따라서 일상성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지위’에 의해 도취적으로 정당화된 수동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운명의 잠재적 희생자로서의 음울한 쾌감을 결합한다. 이 전체는 특정한 정신성, 더 정확히 말해 ‘감상성’을 형성한다. 소비 사회는 자신을 부유하지만 위협받는, 포위된 예루살렘으로 본다. 그것이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다.
결론은 무엇인가.
나는 트럼프가 보드리야르적인 대통령이라는 점이 명백하다고 본다.
나는 이란을 참수하려는 시도 속에 현실의 지정학적 의제가 작동한다는 사실도 명백하다고 본다. 그 지정학이 네타냐후의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현실이다. 적어도 중동과 관련해서 미국 정책에는 고질적인 수정주의적 경향이 존재했고, 그것은 바이든 시기에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나는 보드리야르의 분석이 제시한 더 넓은 틀이 여전히 유효한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평가는 불공정할 수 있고, 보드리야르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개입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의 틀은 기본적으로 기능주의적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의 체계가 어떻게 결속되는지를 설명했다.
2026년에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전제하는가.
베트남과 이라크 사이의 시기에 전쟁 수행이 제기했던 고전적 질문들, 곧 전쟁에 대한 대중적 정당화나 트럼프의 행동의 합법성 같은 문제들이 여전히 중요한가.
스티븐 베르트하임(Stephen Wertheim)이 지적하듯, 미국 대중은 이 갈등에 대해 아무런 사전 준비도 하지 않았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기준에서도 중대한 군사 행동이 미국 정치와 전통적 의미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베네수엘라 조치는 그때의 정치적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ICE 단속과 라틴계 주민들에 대한 강압적 대응 장면이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베네수엘라 문제는 그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2026년의 이란 문제에서는 그 연결 고리가 무엇인가.
우리는 보드리야르를 넘어선 것인가.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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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