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니스 바루파키스는 현대 경제를 좌우하는 빅테크의 막강한 권력을 ‘기술봉건제(technofeudalism)’라고 불렀다. 그는 『자코뱅』 기고문에서 기술봉건제론이 도덕적 비판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축적의 동학에 근거한 분석이라고 주장한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과도한 '기술봉건적' 통제 개념에 대한 일부 비평가들은 이것이 과거 자본주의 형태를 이상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출처: The Press Project
내 책 『테크노퓨달리즘』(Technofeudalism)이 2023년 출간됐을 때 스티브 배넌(Steve Bannon) 같은 인물이 이 책의 주장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특히 이 책의 도발적인 부제인 '무엇이 자본주의를 죽였는가'(What Killed Capitalism)를 두고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이 거센 비판을 쏟아내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했다. 이제 더 폭넓은 독자를 대상으로 썼지만,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구상한 기술봉건제 가설의 마르크스주의적 논거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불의와 독점, 부패를 일삼는다는 식의 도덕주의적 비난에서 벗어나려 했다. 대신 그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연구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증식하려는 이질적인 힘인 자본이 추동하는 무정부적 시장 체제이며, 자본은 증식을 위해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잉여가치를 둘러싼 치열한 계급투쟁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마르크스의 작업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분석도 이와 같은 방법을 따라야 한다.
오늘날 나는 변이한 형태의 자본이 지나치게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를 ‘클라우드 자본’이라고 부른다. 클라우드 자본은 상품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시장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영역도 거치지 않고 우리와 직접 상호작용해 막대한 지대 추출 능력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계들의 네트워크다.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새로운 형태의 자본을 연구해야 한다.
클라우드 자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흔히 나타나는 세 가지 오해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는 봉건제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 역사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통제되지 않는 자본축적이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로 빠르게 밀어 넣고 있다. 기술봉건제 가설에 따르면 자본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부는 정적인 자산이 아니라 역동적인 기계에 이루어지는 막대한 투자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애플은 과거 에디슨과 포드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가차 없이 자본주의적이다. 따라서 ‘기술봉건적’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봉건제로 퇴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장 밖에서 작동하는 수탈 권력과의 유사성을 나타낸다.
둘째, 지대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주류 경제학이 상정하는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 몸이 뱀과 공유하는 DNA의 흔적이 필요하듯 자본주의도 작동하기 위해 봉건제의 잔재를 필요로 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토지 지대가 위험할 정도로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폴 바란과 폴 스위지는 독점 잉여가 지대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1970년대 이후 금융화는 기존의 여러 지대 형태 위에 산더미 같은 금융 지대를 덧붙였다. 따라서 단순히 지대가 확산했다는 사실만으로 자본주의가 다른 무엇인가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자본 자체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셋째, 데이터는 새로운 토지가 아니다. 기업이 빼앗아 간 우리의 데이터가 새로운 봉건 영지가 됐다는 믿음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거부해야 할 일종의 ‘데이터 물신주의(data fetishism)’다. ‘감시 자본주의’도 자본주의 체제의 질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데이터 소유권을 부여하는 법률만 제정해도 기업이 몰래 데이터를 수집해 추출하는 지대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현상은 다른 곳에 있다. 클라우드 자본이 데이터를 이용해 우리의 행동을 직접 변화시키고 우리를 자본주의적 시장과 비슷하다고 할 만한 모든 영역의 바깥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에 있다.
요컨대 기술봉건제 가설의 핵심에는 클라우드 자본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클라우드 자본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마르크스의 정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상품을 시장에서 교환하기 위해 생산한 재화나 서비스로, 자본재를 상품 생산을 위해 생산한 생산수단(PMCP)으로 정의했다. 또한 시장을 노동가치가 화폐로 전환되고 잉여가치가 이윤과 지대, 이자로 전환되는 분권화된 유통 영역으로 정의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자본
구글의 기계는 전통적인 상품생산수단(PMCP)형 자본재인가, 아니면 클라우드 자본인가. 답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구글이 유튜브에서 영화 한 편을 유료로 제공할 때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므로 그 기계는 표준적인 PMCP로 기능한다. 그러나 구글의 기계가 무료 검색 결과나 지도 길찾기를 제공할 때는 클라우드 자본으로 기능한다. 즉 상품을 생산하지 않으면서 우리와 직접 관계를 맺고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클라우드 기반 기계로 작동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기계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클라우드 자본은 어떻게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가. 우리와 일대일로, 양방향으로, 실시간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한다. 아마존의 알렉사를 생각해보자. 알렉사는 당신이 자신의 취향을 알려주도록 훈련하고, 그렇게 쌓은 정보를 바탕으로 당신 대신 일을 처리하고 유용한 조언을 제공하면서 신뢰를 얻는다. 그러다 어느 날 커피머신이 고장 나면 특정 모델을 사라고 제안한다. 당신은 ‘구매’ 버튼을 누른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클라우드 자본은 자신이 생산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상품을 당신에게 판매했고, 소유자인 제프 베이조스는 판매가격의 최대 40%를 클라우드 지대라는 형태의 절대지대로 챙겼다.
분명히 이런 기계는 전통적인 자본재(PMCP)가 아니다. 그것들은 루비콘강을 건너 내가 ‘행동변형을 위해 생산된 수단(PMBM)’, 즉 클라우드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넘어갔다. 흥미롭게도 클라우드 자본은 마르크스의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생산적이다. 상품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힘을 갖는다. 새로운 사회적 권력은 소비자와 임금노동자, 전통적인 자본주의 생산자에게까지 뻗친다. 이 과정에서 클라우드 자본은 시장을 내가 ‘클라우드 영지(cloud fief)’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한다. 아마존닷컴이 대표적인 사례다.
왜 아마존닷컴은 시장과 전혀 다른가. 소련의 계획기관이었던 고스플란(Gosplan)을 떠올려보자. 고스플란 역시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는 하향식 알고리즘 체계를 제공했다. 그것은 시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장의 정반대였다. 아마존도 비슷하다. 중앙집권적으로 계획한 배분 체계다. 알고리즘이 연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무와도 상호작용할 수 없다. 다만 고스플란과 달리 아마존은 민간 소유이므로 자본주의적 시장이라기보다 클라우드 영지라고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인스타카트(Instacart)를 보자. 이 플랫폼은 ‘완전 가격 최적화’를 실시한다. 고객마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격을 제시한다. 그러면 가격 경쟁은 불가능해진다. 소매업체와 플랫폼은 육안으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담합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시장 메커니즘의 기본 속성을 보이지 않게 녹여 없애도록 설계했다.
우버를 보자. 겉으로는 운전기사 노동을 독점적으로 재판매하는 기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버는 운전기사의 채무도 추적한다. 차를 바꾸기 꺼리는 운전기사에게 더 높은 요금과 대출을 제안해 차량을 교체하도록 만든 뒤, 한 번 빚에 묶이고 나면 수입 단가를 낮춘다. 시프트메드(ShiftMed)는 간호사에게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 월세 납부일 직전에 더 낮은 단가를 제시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가정했듯 임금이 구매하는 임금재의 노동가치를 반영하는 자본주의 노동시장이 아니라, 알고리즘을 통한 시장 밖의 전제정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또 하나의 통찰이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무상노동이 특정 형태의 자본이 모든 사람의 행동을 소유자의 이익에 맞게 바꾸는 능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전통적 자본은 임금노동만이 생산하지만, 클라우드 자본은 막대한 무상노동의 도움을 받아 축적한다. 우리가 올리는 모든 영상, 남기는 모든 평점, 운전하는 모든 거리, 구매하는 모든 상품이 클라우드 자본을 증대시키고 동시에 우리가 플랫폼을 떠나는 비용도 높인다. 물론 플랫폼을 떠날 수는 있다. 그러나 클릭할 때마다 떠나는 비용이 커진다. 형식적 자유가 실질적 부자유를 가린다. 이것이 바로 클라우드 자본 시대에 적용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진단이다.
“하지만 플랫폼끼리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는가?”라고 많은 사람이 묻는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우버와 리프트(Lyft)가 충돌하는 모습은 가차 없는 시장경쟁의 증거가 아닌가?” 아니다. 시장경쟁은 가격과 품질을 중심으로 분권화된 시장에서 벌어진다. 반면 오늘날 플랫폼끼리 벌이는 경제적 경쟁은 제로섬의 영토 경쟁이다.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하나의 클라우드 영지가 다른 클라우드 영지와 맞붙는 방식이다. 도요타와 제너럴모터스가 벌이는 시장경쟁과 달리 플랫폼은 더 낮은 가격이나 더 높은 품질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신들의 중앙집권적 거래 체계 안에 가두려고 경쟁한다.
성공한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는 어떨까.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일부는 많은 돈을 번다. 그렇다면 기업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노동은 새로운 교환가치를 생산하지도 않고 생산적 자본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클라우드 자본 자체가 비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노동은 사용가치만 만들어내고 무급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줄 뿐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플루언서는 자본가가 아니라 보수를 많이 받고 특권을 누리는 클라우드 농노의 한 층에 가깝다. 높은 보수는 대부분의 우리가 무급노동을 하면서 클라우드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키워주는 일반적 현실을 가린다.
이제 거시경제로 넘어가보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축적 충동이 경기순환과 장기적인 이윤율 저하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나는 더 긴 논문에서 그의 분석을 클라우드 자본까지 포함하도록 확장했다. 리처드 굿윈(Richard Goodwin)이 포식자-피식자 모형을 경제학에 적용한 방식을 따라, 모든 가치가 전통적 자본과 임금노동을 통해 창출되는 생산 부문과 클라우드 지대를 추출하는 기술봉건 부문 사이의 동학을 분석했다. 그 결과 네 단계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기술봉건 부문이 생산 부문을 희생시키며 성장한다. 이후 클라우드 지대 추출이 일정한 임계치를 넘으면 생산자본이 다시 축적되고 두 부문이 함께 성장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윤율이 또 다른 임계치를 넘어서면서 클라우드 자본이 과잉축적되고 지대 추출 능력이 약해진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는 이윤율과 클라우드 지대 추출률이 모두 하락한다.
장기적으로 클라우드 자본이 축적되고 기술봉건 부문에서 무급노동이 점점 더 많은 임금노동을 대체하면, 이 임계치 자체가 낮아지고 체제는 이윤율과 클라우드 지대 추출률이 모두 붕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런 점에서 기술봉건제 가설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법칙을 클라우드 자본이 존재하는 세계로 일반화하며, 체제 붕괴와 사회 붕괴를 피할 유일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을 다시 확인한다.
위기에 대한 대응
내 책 『테크노퓨달리즘』이 출간된 이후 인공지능은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됐다. 클라우드 자본은 등장하기 위해 AI가 필요하지 않았다. 강화학습 알고리즘만으로도 최초의 클라우드 영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AI는 클라우드 자본의 힘을 비약적으로 증폭시킨다. AI 기반 봇은 곧 우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인간처럼 말하며 정서적 의존까지 길러낼 것이다. 플랫폼을 바꾸는 일은 가슴 아픈 이혼과 비슷해질 것이다. 나는 이를 ‘인공적 소비 사회관계(ASRC)’라고 부른다. 이런 관계는 기계 자체와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과거 자본은 자신의 모순이 심화할 때 어떻게 대응했는가.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은 세 가지 대응을 확인했다. 금융자본, 제국주의, 정당화 이데올로기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1. 클라우드 금융: 클라우드 자본과 전통 금융의 결합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신냉전을 촉발했다. 스테이블코인과 트럼프의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통해 클라우드 금융은 달러를 사유화하고 있으며, 과거 중앙은행만 가졌던 권한을 빅테크에 넘겨주고 있다.
2. 제국주의와 전쟁: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죽음을 초래한 AI 표적 시스템은 팔란티어(Palantir)와 오라클(Oracle)이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에 판매하는 바로 그 클라우드 자본이다. 기술봉건제는 현대전의 시녀다.
3. 테크로드주의(techlordism):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다. 신자유주의가 시장을 신격화했다면 테크로드주의는 클라우드 자본을 신격화한다. 인간 노동을 지대 추출 기계로 대체하는 일에 철학적 정당성의 외피를 씌우고, 빅테크를 국가기관에 통합하며, 중앙은행까지 클라우드 금융에 넘겨준다.
그리고 여기에는 핵심적인 변증법적 모순이 존재한다. 클라우드 자본가 계급이 산업·금융·정치·문화·국가 권력을 모두 성공적으로 집중할수록 이윤율과 클라우드 지대 추출률은 더 빠르게 떨어진다. 사적 성공이 체제의 실패를 낳는다.
자본주의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일부 비판자들은 내가 자본주의보다 더 나쁜 것이 등장했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에 면죄부를 주거나, 신화적인 순수 자본주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부르주아 선전가들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잘못됐다. 내 가설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괴물처럼 비합리적이었다. 기술봉건제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발생한 변이다. 사회주의적 전환을 잔혹하게 가로막았기 때문에 등장했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기술봉건제 가설의 가장 큰 기여는 아마도 사적 자본이 사회적 복지와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극소수 테크로드를 제외하면 사적 소유 자체와도 모순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AI를 장착한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의 노동, 지성, 정체성, 심지어 시청각적 외형까지 집단화하고 있다. 부르주아 국가는 빅테크를 규제할 능력이 없다. 생산자본과 클라우드 자본, 즉 사회 전체 자본스톡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변혁 전략과 관련해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는 내가 전통적 프롤레타리아,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임금을 받는 긱 노동자), 클라우드 농노(무급 사용자), 심지어 봉신 자본가(클라우드 영지에 짓눌리는 소기업)까지 아우르는 공동전선을 제안한 것을 비판한다. 물론 논쟁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농민이나 소부르주아와의 동맹을 놓고 논쟁해 왔다. 이 논쟁도 우리 전통 안에서 계속해야지, 전통 밖으로 밀어낼 이유는 없다.
이름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마지막으로 용어 문제로 돌아가보자. 이것은 여전히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기술봉건제라고 불러야 하는가. 나는 망설임을 이해한다. 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믿어왔는데 그 생각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자본이 우리 없이 자본주의를 끝내버렸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나 역시 좌파가 자본주의를 쓰러뜨리는 영광을 누리기 바라며 자랐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던진 가혹한 질문이 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사회주의가 필연이 아니며, 야만이 매우 현실적인 가능성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시대에 야만은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났다. 오늘날의 파시즘은 기술봉건제와 테크로드주의 이데올로기에 올라타고 있다.
그렇다면 이름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1770년대 애덤 스미스는 영국의 봉건 부문이 자본주의 부문보다 여전히 더 컸는데도 ‘상업사회’를 찬양했다. 1840년대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새 시대를 ‘산업봉건제’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고 부른 덕분에 19세기 사람들은 진행 중인 변화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날 가장 안전한 선택은 클라우드 자본가적 전환을 자본주의 내부의 변화로 보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더 논쟁적인 선택은 기술봉건제 같은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에 충격을 주는 것이다. 두 입장 모두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어느 쪽도 마르크스주의자끼리 서로 적대적으로 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변증법은 현실이 모순 위에 세워져 있다고 가르친다. 최초의 대전환기에도 사회는 봉건적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적이었다. 오늘날 사회 역시 자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기술봉건적이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핵심은 바로 이 당혹스러운 공존을 인식하고, 사회주의적 전환을 통해 그 모순을 극복할 가능성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데 있다.
먼저 우리는 모순을 보아야 한다. 일단 그것을 보게 되면, 해방의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
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나의 기술봉건제 가설을 연결하는 전체 논증은 같은 제목으로 『트랜스폼 리뷰』(transform review)에 발표한 더 길고 기술적인 논문에 정리했다. 이 글은 그 논문을 축약한 것이다.
[출처] The Marxist Case for the Technofeudal Hypothesis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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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는 경제학자이자 그리스의 전 재무장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