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가 모두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오 시저여!
브루투스의 가슴은 그 사실을 곱씹고 싶어 한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 중에서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인간 관계가 대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관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유대의 팽창된 대용물처럼 읽히며,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소외의 징후를 드러낸다. 실질적인 삶의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이뤄지던 교류 대신,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가상의 인접성 체계 속에서 정의한다. 그것은 텅 빈 상징이나 로고, 슬로건의 힘으로 보증되는 유대다. 그렇게 우리의 사회는 귀속될 곳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질적으로 조직해 줄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점차 박탈되어 왔기 때문이다. 관계 대신, 우리는 소속(affiliation)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모두 함께,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따로따로, 소속의 사회 혹은 '소속된 사회(affiliated society)'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현실만이 허구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피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허구는 이중화된다. 그것은 생생한 경험과 더불어 현실을 구성하는 대신, 현실을 지배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허구는 너무나 조밀하고 불투명해서 거의 물질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가능 조건을 형성한다.
이같이 압축된 허구가 지배하는 특이한 체제의 징후 중 하나는 행위보다 수행(performativity)이 우선시된다는 점이다. 마치 표현의 행위, 즉 기호나 상징이 실제로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가이 드보르(Guy Debord)가 묘사한 ‘스펙터클의 사회’의 연장선 혹은 일부라 할 수 있는 이 ‘소속의 사회’에서, 부와 자원의 생산과 분배, 시스템의 전반적 조직에 대한 핵심 문제들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고, 이러한 수탈에 노출된 행위자들에게는 실제 영향력을 대신할 표현의 방식들만이 남아 있다. 어쨌든 서구 비판 사유의 역사도 이 변형에 기여했다. 그것은 20세기 후반, 자유주의 사회들이 점차 사회 체제 구성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던 시기에, 수행성과 상징성의 차원에 몰두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조직화와 질서 전복을 위한 능동적 투쟁이라는 진정한 차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 사회의 실천자들은 언제나 말, 상징, 슬로건에서 변화가 시작된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속의 사회에서 변화는 언제나 정확히 그 ‘시작점’에서 멈춰버린다.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고, 사회관계망의 프로필에 중요한 해시태그를 넣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나머지는 외부인을 초대하지 않는 권력기구들이 관리한다. 심지어 정치인들조차도 실제 변화에 대해 책임지기보다는 상징적이고 관습적이며 은유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책임지고 또 그렇게 책임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가장 먼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라는 열차는 이미 오래전에 플랫폼을 떠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본질적으로 소속이란 무엇인가? 어원적으로 볼 때, 소속이란 어떤 것에 – 그것이 집단이든, 공동체이든, 특정 기호로 식별되는 무리이든 –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귀속됨(belongingness)’ 자체가 깊은 위기에 빠지면서, 소속은 그것의 대체물이 되었다. 비공식적이고, 상상적이며, 상당 부분 허구적인 소속은 과거의 귀속이 지녔던 부담과 결과 없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속은 라틴어 어원상 ‘부성 인지 과정’, 즉 자식과의 친자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확립하는 절차에서 유래하기도 했다. 이 의미는 앞서 말한 첫 번째 의미 못지않게 중요해 보인다. 소속의 사회에서는 상실된 유대가 부재한 상황에서, 유아적 참여의 욕구, 감정적 입양의 욕구, 세계의 복잡성에 맞서줄 어떤 인물의 보호 아래로 피신하고자 하는 욕구가 증대된다. 그 욕구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그것을 성숙하게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박탈당했다. 마거릿 대처가 한때 말했듯 “사회란 그런 것은 없다”는 선언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 선언이 현실화하면서, 우리는 ‘사회’ 대신 점점 더 유아화된 메커니즘으로 충족되는 유아적 욕구들의 집합 속에 살고 있다.
소속이라는 개념에는 또 다른 의미, 곧 신비주의적 의미도 존재한다. 그것은 앞선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하는 일종의 신비로운 참여를 뜻한다. 이 버전에서 우리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소속되며,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초자연적이고 마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이 정신적 참여 덕분에 우리는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신학적 문헌이나 이성적 개념을 헤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같은 것을 느낀다.
소속의 사회에서는 이 세 가지 의미가 나란히 공존하며, 서로를 보완한다.
출처 : Unsplash, Kristina Tripkovic
2.
소속의 사회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는 오늘날의 ‘공적 논쟁’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물론 ‘논쟁’이라는 단어는 이미 대체되어야 마땅하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어떤 토론에 가까운 것도 아닌, 공적 소속의 시뮬레이션이자 퍼포먼스일 뿐이다. 그리고 이 시뮬레이션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인가’, ‘누구와 연관되는가’, 그리고 ‘누구와 얼마나 비슷한가’다.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신념이 최소한이라도 일관되는지조차 고민하지 않으며, 그것이 현실에 근거하는지는 더더욱 따지지 않는다. 오늘날의 이념 갈등의 역학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용어를 빌리자면, 모방적 희생제의의 형태를 띠며, 전통적 제의와 달리 순전히 추상적 상징 교환의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연출된다. 그것은 일종의 영속적인 희생의 위기이며, 여기서 교환되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희생양 후보들이다. 그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상징, 발언, 제스처, 혹은 집단이 그들의 소속성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주로,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면, 우리의 관점이 지닌 일관성이나 이성, 복잡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특정 공동체에 ‘영적 충성’을 맺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결국 특정한 이념 패키지 내부에서는 모든 것이 소속된다. 사실, 감정, 인물, 심지어 완성된 문구들까지도 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집단에 들러붙는 것도, 또는 거기서 이탈하는 것도(심지어 무심코 그렇게 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사소한 차이, 일탈, 실수 하나도 낙인찍기 위한 기호로 악용될 수 있다.
그러나 소속을 효과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신비한 확신’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종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타자들’—즉, 우리 집단 바깥에 있는 사람들, 잘못된 신을 숭배하고 잘못된 소속된 사실을 믿는 이들—이 무엇을 믿느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길, 만약 남성들이 임신한다면, 낙태는—특히 폴란드처럼 성직자적 국가에서는—성례전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불행히도 이는 오늘날 거의 보편화된 정체성 형성 방식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체성들은 교섭 불가능하고, 구조적으로 교리적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덧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회적 국면의 사소한 변동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카멀라 해리스, 앤드루 쿠오모, 조 바이든 같은 미국 민주당 유력 정치인들이 트럼프가 도입한 백신에 대해 어떻게 발언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판단 받는다면, 당시에는 반과학 음모론자이자 반백신 가짜뉴스 확산자였던 셈이다. 만약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다면, 나는 백신 거부가 그들에게 미덕이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존경받는 중산층 인사들은 ‘반트럼프’ 인증 코로나 패스를 자랑스럽게 착용했던 것처럼, 백신 거부에도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종종 대중 매체에 의해 형성된 여론의 우위에 굴복한다고 비판받았다. 철학의 시작 이래로, ‘통념(doxa)’은 진리를 체계적이고 정직하게 추구하는 자에게 항상 부정적인 참조점이었다. 그러나 소속의 사회에서는 이제 의견마저도 교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견은 바뀔 수 있고, 따라서 자동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내가 현재 생각하는 바 사이에 존재하는 자유의 여백, 그 틈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오늘날 사회는 의견을 교환하지 않고, 서사를 교환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포함해 모든 것을 거대한 서사 블록의 톱니바퀴로 여기도록 학습하며, 이 서사 블록들은 매일 충돌하지만, 어떤 창조적 해결도 없이 소모된다.
요즘 긍정적 소속과 부정적 소속이 동일한 일반 원칙에 따라 서로를 보완하고 조건짓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너는 우리 편이 아니니까 저쪽 편이다.” “너는 저쪽 편이 아니니까 우리 편이다.” “너는 우리 편이니까 저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 경계선을 나누는 기호—사람들을 서로 다른 종으로 분리하는 불가능한 심연—는 실은 매우 사소하고 본질적으로 별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우리를 가장 깊게 나누는 것들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피상적인 문제들이며, 그것들이 절대화되는 이유는 오직 소속의 운동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3.
앞서 언급된 소속의 의미들에 또 하나의 의미를 추가해야 한다. 이 의미는 다른 의미들보다 지위가 더 높으며, 어쩌면 그 덕분에 다른 의미들이 그토록 쉽게 결합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속을 ‘브랜딩(branding)’의 등가물로 여기는 개념이다. 이는 브랜드를 구축하는 메커니즘이며, 브랜드란 본질상 개인의 성격이나 정체성, 현실에 대한 어떤 깊은 신념과는 다른 것이다. 소속의 사회는 지속적인 ‘제휴 마케팅’을 통해 유지되고 있으며, 여기서 브랜딩은 곧 정체성이 된다. 가장 추상화된 기호가 의미 체계를 포착해 버린다.
소속의 사회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과정의 최종 단계이며, 이 과정에서 가족, 계급, 길드, 노동조합, 정당 같은 사회 현실에 어느 정도 뿌리를 둔 정치적 관점과 정체성은 점차 ‘소비적 정치 반사작용’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이념이란 리본이나 페이스북 사진에 붙은 깃발만큼의 무게밖에 갖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적 소시민 계층이 되었으며, 이들은 정치적 연합을 마치 스포티파이나 넷플릭스에서 플레이리스트를 설정하듯 선택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자기 의견 브랜드의 ‘좋은 평점’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체제를 유지 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무력화 과정을 종결시킨다.
[출처] Society of Affiliation (1): The Meanings of Affiliation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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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베우 모치츠키(Paweł Mościcki)는 폴란드의 작가이자 철학자, 에세이스트다. 그는 바르샤바에 위치한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산하 문학연구소에서 일하며 ‘현재 인류학 부서’를 이끌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