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 중인 ‘대한민국 인공지능 행동계획(안)’을 둘러싸고 시민사회가 “기술과 산업 중심의 속도전이 시민의 권리와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며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노동·인권·여성·문화·평화 분야 시민사회단체들은 8일 기자설명회를 열고 이번 정부의 행동계획이 AI의 위험을 통제할 장치와 민주적 거버넌스를 갖추지 못한 채 기업 중심으로 설계됐다고 지적했다.
출처: 한국여성단체연합
이들은 이번 행동계획 기조가 ‘규제 혁신’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오병일 디지털정의네트워크 대표는 국가 AI 행동계획이 “한 국가의 전략이라기보다 대기업의 사업 계획서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는 “AI 개발과 활용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알고리즘 오류와 편향, 불투명성 같은 구조적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책무는 사실상 사라졌다”며 “AI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영향을 받는 당사자가 배제된 결과, 통제와 책임이 빠진 계획이 나왔다”고 말했다.
개인정보 보호 문제는 계획안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됐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선임간사는 ‘규제 혁신’을 명분으로 개인정보 원본 활용을 전제하는 정책 방향에 대해 “AI 산업을 위해 헌법상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희생시키겠다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공공·민간 데이터를 통합해 자산화하겠다는 구상이 사전 위험 평가 없이 추진될 경우,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험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공부문 AI 도입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장여경 정보인권연구소 상임이사는 최근 감사 결과를 언급하며 “공공 AI의 성능과 책무성이 심각하게 미달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능형 CCTV와 공공 예측 시스템의 낮은 정확도를 사례로 들며, “검증되지 않고 설명 가능하지 않은 AI를 공공 영역에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공공 AI로 인한 피해를 구제할 감독 거버넌스와 법적 책임 체계가 행동계획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설명회에서는 법·제도 차원의 대안이 제시됐다. 김은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디지털정보위원회 변호사는 정부가 제시한 ‘AI 기본사회’와 ‘AI 공론장’ 구상이 선언에 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인권영향평가, 독립적 감독, 이의제기와 중단 요구 등 실효적인 권리 구제 장치가 구체적으로 명시돼야 하며, 시민사회와 교육 당사자가 정책 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AI 정책이 노동 현장에 미치는 영향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홍지욱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채용과 배치, 평가, 고용 유지까지 알고리즘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AI 도입 과정 전반에 노동자의 알 권리와 참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복지와 의료 영역에서도 기술 중심 접근의 한계가 제기됐다. 전은경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팀장은 AI로 돌봄과 의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상이 국가 책임을 기술로 대체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의료데이터 결합과 활용 확대가 공공성 강화가 아니라 민간 기업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촘촘한 복지 인프라 확충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군사 분야 AI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이영아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팀장은 국방 AI 확대와 방산 수출 전략이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윤리적 성찰 없이 추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율무기와 군사 AI는 고위험 영역인 만큼, 충분한 사회적 숙의와 국제법·인권 기준에 따른 통제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성평등과 문화 영역에서도 우려가 나왔다. 온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활동가는 행동계획에 성평등 관점이 구조적으로 결여돼 있다고 지적하며, “AI 정책 전반에 성별 영향 분석과 여성 참여 보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장호 문화연대 정책위원장은 “문화 분야에서 이미 과잉노동과 번아웃, 일자리 감소, 저작권 갈등이 현실화되고 있지만, 정부 계획에는 이를 해결할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날 설명회를 통해 AI 정책이 더 이상 산업 경쟁력 중심으로만 추진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국가 인공지능 행동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고, AI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권리와 안전을 정책의 출발점에 두는 민주적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