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무능한 자의 마지막 수단이다.”
–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제 이란과 전쟁 상태에 들어섰다. 이 전쟁은 양국 지도자들이 선과 악이라는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구도로 설명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를 “선과 악 사이의 불가피한 싸움”이라고 규정한다. 도널드 트럼프에게 이 전쟁이 불법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 전쟁은 오히려 종교적 열정에 의해 부추겨지고, 십자군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방식으로 수행된다. <가디언>의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가 지적했듯, 이는 “폭력을 가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찬양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종교적 프레임은 중요한 정치적 현실을 가린다. 이 전쟁은 상당 부분 네타냐후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전쟁이며, 그는 이란을 나치즘의 후계자로 묘사하며 종말론적 이미지로 규정해왔다. 그러나 핀탄 오툴(Fintan O’Toole)이 지적하듯, 더 심각한 문제가 작동하고 있다. 트럼프의 손에 들어간 이 전쟁은 정치적·도덕적 근거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단지 파괴를 과시하는 공허한 장면으로 전락한다. 의미를 상실한 힘의 언어만 남는다. 하지만 이 공허함은 결코 무해하지 않다. 이는 정치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국가 폭력을 거리낌 없이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논리는 사람들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하는 정치로 이어지며, 통제되지 않을 경우 종교적 확신을 내세운 채 수용소 같은 통치 방식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까지 내포한다.
출처: 백악관
전쟁, 볼거리, 종교적 열정이 결합된 이 현상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폭력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상상되는지에 대한 더 깊은 변화를 보여준다. 트럼프의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는 이러한 세계관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거의 성전(聖戰)을 연상시키는 어조로, 미군의 임무는 “하루 종일 하늘에서 죽음과 파괴를 쏟아붓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발언에서 전쟁은 절제나 법, 혹은 불가피한 비극이라는 언어를 완전히 잃는다. 전쟁은 파괴 자체를 미덕으로 내세우는 행위로 바뀐다.
<뉴욕 타임스>의 그레그 재프(Greg Jaffe)가 지적하듯, 이런 발언은 미국 권력을 지탱해온 도덕적 기준이 크게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의나 방어 대신 복수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서 적은 협상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야 할 존재다. 전쟁은 정책 수단을 넘어, 정당한 분노를 과시하는 무대가 된다. 폭력이 신성시되고, 피와 고통, 죽음을 가하는 것이 힘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런 전쟁 문화의 영향은 전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논리는 국내로 확산되어 사회의 언어와 제도, 교육 방식까지 바꾸기 시작한다.
전쟁은 오랫동안 국가 권력의 가장 잔혹한 표현이었지만, 트럼프를 둘러싼 정치 문화에서는 더 어두운 의미를 띠게 된다. 전쟁은 더 이상 외교 전략의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대신 폭력,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 군사적 과시가 결합된 ‘전쟁 문화’가 등장하고 있다. 이 문화는 시민들에게 지배를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찬양하라고 가르치는 일종의 사회적 교육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런 맥락에서 ‘오퍼레이션 에픽 퓨리(Operation Epic Fury, 폭력을 장대한 쇼처럼 포장하는 전쟁 서사)’는 야만을 볼거리로 포장한 사례가 된다. 면책과 도덕적 파괴를 미학처럼 덧씌운 형태다. 전쟁은 대중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바뀌어, 언론 이미지와 정치적 발언, 국가 정책을 통해 매일 같이 ‘지배의 방식’을 주입한다. 잔혹함이 곧 힘이라는 메시지, 그리고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적까지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해 인정이나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굴욕과 억압,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가르친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은 더 이상 ‘필요성’이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 같은 낡은 표현 뒤에 숨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 외교 정책에서 오래전부터 그래왔듯, 제국 권력을 위한 냉혹한 수단이라는 본모습을 드러낸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교육 방식’은 군사력 과시뿐 아니라 법과 제도, 문화적 서사를 통해 작동하며 권위주의를 일상화한다. 내가 윌 폴(Will Paul)과 함께 지적했듯, 이는 단순히 “거리의 탱크”가 아니라 “교육을 안보 국가의 도구로 만드는 입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실은 애국적 규율을 주입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역사는 민족주의 신화로 다시 쓰이며, 감시는 시민의 의무로 여겨진다. 학생들은 복종이 미덕이고 반대는 의심받을 행동이라고 배우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 교육은 더 이상 비판적 사고나 민주적 책임을 키우지 않는다. 대신 군사주의, 위계, 무조건적 권위를 내면화한 시민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된다.
이러한 전쟁 문화는 정치이론가 아쉴 음벰베(Achille Mbembe)가 말한 ‘네크로폴리틱스(necropolitics)’, 즉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권력 형태를 보여준다. 이런 틀에서는 폭력이 단순한 정책 수단을 넘어 정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하는 요소가 된다. 특히 우려되는 점은 이 전쟁이 점점 기독교 민족주의의 언어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군의 이미지와 수사가 다시 공적 영역에 등장했고, 이는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십자군 문신뿐 아니라 트럼프가 신에 의해 선택되어 군사력을 행사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하는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가디언>의 데이비드 스미스에 따르면, 진보적 기독교 단체 ‘보트 커먼 굿(Vote Common Good)’의 목사이자 대표인 더그 패짓(Doug Pagitt)은 이러한 세계관의 신학적 논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보기에 피트 헤그세스는 이 행정부가 특별한 신의 사명을 받았다고 믿는 왜곡된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이, 신이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선택한 사람들에게 세계에서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도록 특별히 권한을 부여했다고 믿는다. 헤그세스가 이해하는 기독교는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확장되는 기독교라는 생각에 기반한다. 그는 군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동원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전쟁은 힘의 증거로 찬양되고, 적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지워진 채 취급된다. 전체 인구를 파괴하는 일조차 “미국 우선(America First)”이라는 구호 아래 국가의 위대함을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가로 다시 포장된다. 이런 네크로폴리틱스적 질서에서 국가는 생명을 보호하는 능력이 아니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지금 파시즘적 체제 아래에서 도덕이 완전히 붕괴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전쟁으로 인해 60만에서 100만 가구, 즉 최대 320만 명이 국내에서 피란 상태에 놓였다는 사실은 주류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이 같은 도덕적 무감각은 이란에서 미군 사망자에 대한 헤그세스의 반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트럼프는 병사 세 명이 사망했을 때 “우리는 세 명을 잃었고, 사상자는 예상된 일이지만 결국 이는 세계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에게 죽음은 비용과 이익을 따지는 계산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는 이후에도 “끝나기 전까지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원래 그런 것이다. 더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헤그세스는 “트럼프를 나쁘게 보이게 하려고 언론이 사망한 병사들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며 언론을 비판했다.
이처럼 군사주의는 더 이상 정치의 예외가 아니라, 정치 자체를 조직하는 핵심 원리로 자리 잡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의 대규모 학살조차 국가 권력의 냉혹한 논리 속에 흡수되어, 군사적 승리를 과시하는 장면 뒤로 가려진다. 이란에서 벌어진 불법적인 이스라엘-미국의 폭격이 초래한 참상은 도덕적 문제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공습은 테헤란 인근의 석유 저장 시설 등 여러 지역을 타격해 검은 연기를 하늘로 치솟게 하고 주변 지역에 유독 물질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런 파괴가 낳은 인간적 피해는 공식 담론에서 거의 지워지고, 대신 기술적 우위와 국가주의적 수사가 이를 대체한다.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는 전쟁이 낳은 고통이 단순히 무시되는 수준을 넘어 노골적으로 가볍게 취급된다. 러시아의 개입이 미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헤그세스는 “지금 걱정해야 할 사람은 자신들이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란인들뿐이다”라고 냉담하게 답했다. 이런 발언은 폭력이 더 이상 전쟁의 비극적 결과로 여겨지지 않고,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치 문화를 드러낸다.
전쟁의 막대한 경제적 비용도 이러한 군사주의 질서의 왜곡된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애틀랜틱>의 기자 낸시 유세프(Nancy Youssef)는 의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 전쟁이 하루 약 10억 달러의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라 라자르(Sarah Lazare)는 이 돈이면 미국 내 4,100만 명이 의존하는 식량 지원 프로그램의 하루 비용을 충당할 수 있고, 최근 삭감으로 의료보험을 잃게 될 1,600만 명의 의료 지원을 유지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이 전쟁은 해외에서 생명을 파괴할 뿐 아니라, 국내에서 사람들의 삶을 유지하는 사회적 자원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이 전쟁의 영향은 단지 당장의 인명 피해와 재정적 비용에 그치지 않는다.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가 경고했듯, 이 전쟁의 경제적 파장은 당장의 비용을 훨씬 넘어설 수 있다. 이란이 세계 석유 공급의 상당 부분이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해상 운송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충돌은 세계 경제에 충격을 주고 경기 침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그런데도 트럼프 행정부가 이런 위험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전쟁이 얼마나 무모하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지정학적 공격성과 그것이 촉발할 경제적 결과에 대한 깊은 무지가 결합된 모습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전쟁이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군사주의가 국가 정책의 일상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 ‘깡패 자본주의’의 논리를 반영한다.
이런 양상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전쟁 지출을 국가 정책의 상시적인 요소로 유지해왔다. 에릭 모리셋(Eric Morrisette)은 이렇게 지적한다. “전쟁이 막대한 비용을 수반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불과 3년 전까지 중동에서 장기적인 전쟁을 겪었고, 그 경험은 결코 안심할 만한 것이 아니다.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의 ‘전쟁 비용 프로젝트(Costs of War Project)’에 따르면, 2001년 말부터 2022 회계연도까지 미국은 9·11 이후 전쟁에 약 8조 달러를 지출하거나 지출을 약정했다. 이 가운데 5조 8천억 달러는 직접 비용이고, 최소 2조 2천억 달러는 2050년까지의 참전용사 지원 비용이다. 이 돈은 모두 학교, 교량, 의료에 쓰이지 못한 자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란 전쟁은 군사주의가 어떻게 스펙터클이자 이념이며 정책이자 국가가 승인한 강제적 착취로 동시에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폭격 아래 놓인 사람들의 고통은 지워지고, 이를 떠받치는 시민들에게는 막대한 희생이 요구된다. 이런 네크로폴리틱스적 질서에서는 폭력이 권력의 언어이자 정치적 정당성의 기준이 된다.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경고했듯, 파시즘은 한 번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은 도덕적 타협을 통해 잔혹함을 점점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불의를 인식하는 능력을 약화시키며 확산된다. 그러나 이런 폭력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언어에 있다. 그 언어는 단어에서 도덕적 의미를 빼앗고, 잔혹함을 필연이나 운명으로 포장한다.
이란을 상대로 한 불법적인 이스라엘-미국 전쟁이 낳은 거짓과 죽음, 파괴 속에서 우리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말한 ‘전쟁의 언어’를 목격하고 있다. 그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런 언어를 “손에 피를 묻힌 지도자들의 언어”, 스스로의 마비 상태를 자랑하는 “죽은 언어”라고 경고했다. 이 언어는 권력에 취해 있고,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으며, 도덕적 책임을 완전히 비워낸다. 정치적 발언이 이런 언어로 채워질 때, 폭력은 더 이상 정당화될 필요조차 없다. 그것은 운명이나 필연, 심지어 미덕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네크로폴리틱스적 상상력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피트 헤그세스다. 그의 공개 발언은 제약 없는 폭력을 찬양하면서, 현대 전쟁을 규율해온 법적·도덕적 기준을 무시한다. 이 세계관에서 전쟁은 비극적인 필요가 아니라 ‘정화의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 속에서 민족주의, 과장된 남성성, 종교적 운명이 결합한다. 그 결과는 군사주의, 여성혐오, 그리고 왜곡된 힘의 숭배가 뒤섞인 정치 문화이며, 종교적 근본주의에 의해 움직이고 깊은 윤리적 공백을 드러낸다.
헤그세스의 말은 이 세계관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책 ⟪전사의 전쟁⟫(The War on Warriors)에서 이라크에서 병사들에게 교전 규칙을 설명하던 군 법률가의 조언을 무시한 일을 언급하며, “그런 헛소리가 너희 머릿속에 들어가게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이런 발언은 현대 전쟁을 제한하는 법적 규범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가 가진 이념적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종교적 요소는 공식 군사 메시지에서도 드러났다. 이란 전쟁과 관련한 펜타곤 브리핑에서 헤그세스는 발언을 마치며 성경 구절을 인용했고, 이란에 대한 군사 행동을 성서적 언어로 설명했다.
비판자들은 이런 행보가 미국 군사 정책에서 교회와 국가의 경계가 위험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군사 브리핑에서 성경 구절이 등장하고,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 갈등을 성서적 언어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전략과 종교적 사명의 구분은 흐려진다. 전쟁은 더 이상 단순한 안보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신학적 싸움’으로 바뀐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적 폭력이 신성한 행위로 포장될 위험이 커지고, 국가는 법에 묶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전’을 수행하는 존재처럼 행동하게 된다.
헤그세스는 ⟪전사의 전쟁⟫에서 전쟁법 자체를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군이 임의적인 규칙을 따라야 하고, 국제 재판소를 만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면, 차라리 우리 방식대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낫지 않은가? 다른 나라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라고 썼다.
이 발언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 전쟁을 규율해 온 윤리적 기준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네바 협약으로 정립된 전쟁법은 폭력의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핵심은 간단하지만 중요하다. 전쟁 중에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가 있다는 것이다.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해서는 안 되고, 포로를 고문해서도 안 되며, 공동체 전체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처럼 취급해서도 안 된다. 이런 원칙은 대량 학살과 도시 파괴를 경험한 20세기의 참혹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제한이 ‘불편한 규칙’이나 ‘약함의 표시’로 치부될 때, 그 결과는 결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의 몸과 파괴된 땅 위에 그대로 남는다. 현대 전쟁의 역사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베트남전의 미라이 학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고문, 그리고 법의 바깥에서 운영된 비밀 구금시설과 ‘블랙 사이트’가 그 사례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가자 등지에서 벌어진 파괴는 지역 전체를 붕괴시켰다. 도시와 마을은 폐허로 변했고,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사회 전체가 지속적인 불안 속에 놓였다. 이런 현실을 보면, 트럼프가 스스로를 “반전 대통령”이라 부르며 “새로운 전쟁은 없다”고 주장한 말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두 번째 임기에서 그의 정책은 오히려 군사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트럼프는 해외에서의 군사 개입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언어와 방식을 국내로 끌어들였다. 무장한 연방 병력이 미국 도시에서 거의 통제 없이 활동하도록 했고, 그 결과 해외에서 사용되던 준군사적 폭력이 국내로까지 확장됐다. 이는 해외 전장과 일상 사회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론인 재커리 바수(Zachary Basu)가 지적했듯, “현대 역사에서 도널드 트럼프만큼 많은 나라를 상대로 군사 공격을 명령한 대통령은 없다.” 국제법의 제약이 점점 무시되는 상황에서, 그의 군사적 개입은 거의 제한 없이 확대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대통령 납치 같은 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전쟁은 단순한 외교 전략을 넘어선다. 그것은 이제 전체 인구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하고, 파괴 자체를 권력의 과시로 연출하는 ‘네크로폴리틱스적 프로젝트’로 나타난다.
헤그세스의 발언은 사람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로 보는 이런 정치에 이념적 언어를 부여한다. 그는 절제를 약함으로, 인도주의적 전쟁법을 멀리 떨어진 엘리트가 강요하는 번거로운 규제로 묘사하면서, 전쟁의 폭력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취약한 도덕적 틀을 무너뜨린다. 이런 틀에서는 정의보다 힘이 앞서고, 오직 승리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
이처럼 법을 무시한 폭력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MAGA 운동의 정치적 상상력을 형성하는 더 넓은 전쟁 문화도 강화된다. 군사력은 더 이상 비극적인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활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그려진다. 폭력은 남성성과 애국심의 척도가 되고, 성찰이나 절제는 비겁함으로 취급된다. 전쟁은 국가의 위대함을 회복하는 ‘정화의 힘’으로 상상된다.
이처럼 힘을 찬양하는 문화의 깊은 논리는 이미 수십 년 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유럽 파시즘의 시대를 배경으로, 권위주의 운동이 “정치를 미학화한다”고 경고했다. 민주적 토론을 촉진하는 대신, 권력 자체를 하나의 장면으로 바꾸는 것이다. 전쟁은 도덕적 판단을 압도하는 화려한 기술적 힘의 과시, 즉 궁극의 미적 경험으로 변한다.
이러한 벤야민의 통찰은 트럼프를 둘러싼 정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문화에서는 전쟁이 점점 더 ‘연출’되고, 폭력은 국가 권력을 과시하는 장면으로 꾸며진다. 정부가 선전하는 폭격 영상은 점점 비디오게임이나 액션 영화의 표현 방식을 닮아간다. 폭발은 영화적 효과처럼 보이고, 목표물은 빛 속에서 사라지며, 파괴는 인간적 비극이 아니라 기술적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 뒤에는 훨씬 더 잔혹한 현실이 있다. 최근 이란과의 전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초등학교 건물이 파괴되어 135명이 넘는 어린이가 사망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런 참사는 공식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군사적 승리’의 장면과 실제 인간적 피해 사이의 끔찍한 간극을 드러낸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상가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 사회’ 개념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현대 정치가 점점 이미지 중심으로 작동하면서 사람들이 현실과 분리된다고 보았다. 실제 경험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권력의 결과를 비판하기보다 그 이미지를 소비하게 된다.
이 속에서 폭격은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적 사건으로 나타난다. 대중은 파괴된 삶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과시에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유도된다.
문화평론가 수전 손택(Susan Sontag)도 전쟁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접할 때 생기는 위험을 지적했다. 그는 이런 이미지가 ‘도덕적 마비’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파괴의 시각적 장면에는 매혹되지만, 그 속에 담긴 고통에는 점점 무감각해진다.
오늘날 전쟁을 둘러싼 시각 문화는 바로 이런 양상을 보여준다. 폭격 영상이 오락 콘텐츠처럼 포장되면서, 전쟁과 볼거리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다. 폭력은 소비되는 대상이 된다.
언론인이자 반전 연구자인 노먼 솔로몬(Norman Solomon)은 현대 전쟁이 대중의 인식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데 의존한다고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정부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통해 전쟁을 ‘정리된 모습’으로 보여주며, 민간인이 겪는 고통을 가린다. 전쟁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잔혹함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폭력은 더 이상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찬양되고 있으며, 그 미화는 전쟁을 둘러싼 종교적 언어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볼거리’만으로는 전쟁 문화를 유지할 수 없다. 폭력을 정당화하고 비판을 막으며, 그 잔혹함을 정당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만드는 도덕적 서사가 필요하다. 이 역할을 점점 더 강하게 수행하는 것이 MAGA 운동 일부에서 확산되고 있는 종교적 근본주의다. 헤그세스를 비롯해 트럼프 주변의 주요 인물들은 중동 분쟁을 노골적으로 성서적 언어로 설명해왔다. 이란은 단순한 지정학적 적이 아니라 선과 악의 우주적 대결 속에 놓인 ‘영적 적’으로 묘사된다. 일부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이 갈등을 종말론적 예언으로 해석하며, 이란과의 충돌이 아마겟돈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성서적 서사를 실현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런 발언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종교화됐는지도 여러 논평가가 지적하고 있다. <더 네이션>에 글을 쓴 전쟁 비판자들은 트럼프 진영의 핵심 인물들이 이 갈등을 점점 더 종교적 정체성에 기반한 문명 간 충돌로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상원의원은 “이건 종교 전쟁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그 결과가 “천 년 동안 이 지역을 좌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언어는 국제 갈등을 외교로 풀어야 할 정치 문제에서, 신앙 간의 ‘성스러운 대결’로 바꿔버리는 위험한 전환을 보여준다.
군사주의가 종말론적 종교와 결합할 때 그 결과는 매우 위험하다. 전쟁은 더 이상 외교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신성한 드라마’로 바뀐다. 폭력은 신의 뜻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신성화된다.
언론인들도 전쟁이 점점 노골적으로 종교적 언어로 설명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MSNBC의 알리 벨시(Ali Velshi)는 기독교 민족주의적 서사가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관련 발언 속으로 스며들고 있으며, 그 결과 교회와 국가의 경계가 흐려지고 갈등이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신학적 이미지로 설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경우에는 이런 표현이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군 감시 단체들은 일부 지휘관들이 이 전쟁을 병사들에게 “신의 계획”의 일부로 설명하며, 성서의 예언과 ‘요한계시록’을 언급해 이 갈등이 종말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유형의 이념 체계가 인간의 도덕적 판단 능력을 약화시키고, 정치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제약을 무너뜨린다고 경고했다. 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덕적 성찰이 사라지고 이념적 확신이 이를 대신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거대한 폭력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전쟁이 운명이나 신의 사명으로 포장될 때, 그 전쟁이 낳는 인간적 피해를 문제 삼는 능력은 위험할 정도로 약해진다.
이처럼 군사주의, 스펙터클, 종교적 민족주의가 결합하면 ‘정치적 죽음 충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파괴에 대한 집착, 취약함에 대한 경멸,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무관심으로 특징지어진다. 전쟁 비판자들은 이 전쟁을 둘러싼 정치 문화가 단순한 공격적 외교 정책을 넘어선 문제를 드러낸다고 본다. <카운터펀치>에 글을 쓴 앤서니 디마지오(Anthony DiMaggio)와 딘 카이바노(Dean Caivano)는 이란 전쟁을 미국 정치 전반에서 진행 중인 권위주의적 변화의 일부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군사주의, 종교적 민족주의, 그리고 스펙터클 정치가 결합해 새로운 권위주의적 국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전부 받아들이든 아니든, 전쟁 선전, 종교적 수사, 폭력의 미화가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 정치의 도덕적 기반이 크게 변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역사는 이런 흐름이 어디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경고를 남기고 있다. 유럽에서 파시즘이 등장한 조건을 돌아보며, 작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권위주의는 한 번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잔혹함과 무관심이 점점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형성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파시즘이 있으며, 권력이 집중되어 시민들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수단이 차단될 때마다 우리는 그 징후를 본다.”
위험은 바로 이런 징후에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법을 비웃고, 법을 무시한 폭력을 찬양하며, 종교적 운명의 언어로 전쟁을 정당화할 때, 잔혹함이 일상으로 받아들여지고 폭력이 미덕처럼 보이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이런 조건에서는 공적 삶의 도덕적 기반이 무너진다. 파시즘의 언어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 그것은 윤리적 원칙의 의미를 지워버리고 도덕과 진실, 그리고 “공통된 인간성이라는 고귀한 개념”을 조롱의 대상으로 바꿔버린다.
이란에서 어린이 100명 이상이 사망한 폭격은 전 세계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지정학적 과시와 ‘정당한 힘’이라는 수사 속에 묻혀버렸다. 이 침묵은 전쟁 문화가 공적 삶 깊숙이 침투해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들의 고통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사회적 망각은 신정적 근본주의의 언어를 통해 재생산된다. 이 언어는 폭력을 정치적 범죄가 아니라 선과 악의 신성한 싸움의 일부로 규정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린이와 ‘이교도’로 낙인찍힌 이들을 향한 전쟁이 단순한 참상을 넘어 정치적 정당화 수단이 된다. 신의 사명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군사적 폭력은 자본주의 자체의 잔혹함을 가리는 역할을 하며, 사람을 쉽게 버리고 착취하며 끝없는 전쟁에 의존하는 체제가 자신의 폭력을 종교적 정당성 뒤에 숨기도록 만든다.
트럼프 체제에서 미학과 폭력이 결합되는 모습은 ‘국가 쇠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런 표현은 특정 집단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하고, 인종적 정화를 암시하는 암호화된 언어로 작동한다. 일부 집단을 ‘타락의 징후’로 낙인찍으면서, 권력과 힘을 회복하면 국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앤서니 디마지오(Anthony DiMaggio)와 딘 카이바노(Dean Caivano)가 지적하듯, 이런 언어는 우생학적 사고와 ‘피와 토양’ 같은 파시즘적 수사를 결합해 사회적 위계와 문명 재건을 정당화한다. 이들은 트럼프의 발언을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트럼프의 언어는 쇠퇴와 재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중요한 점에서 기존 방식과 다르다. 그는 2025년 1월 두 번째 취임 연설에서 “미국의 쇠퇴는 끝났다”고 선언했고, 국정연설에서는 복귀 이전의 미국을 “죽은 나라”라고 표현했다. 이런 발언은 국가를 하나의 생물처럼 묘사하면서, 국가를 다시 살리는 힘이 행정 권력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정당성은 제도의 지속이 아니라 ‘생과 죽음’이라는 기준으로 판단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의 쇠퇴와 재생이라는 언어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를 다시 부활시키는 드라마로 정치를 구성하는 권위주의적 미학의 일부다. 발터 벤야민이 경고했던 파시즘의 논리처럼, 국가는 살아 있는 몸으로 상상되고, 힘을 통해 정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버려도 되는 존재’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도덕적 고려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런 틀에서는 ‘누가 살 가치가 있는지, 누가 죽어도 되는지’를 결정하는 권력이 곧 국가의 핵심이 된다. 이는 생명을 보호하는 능력이 아니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으로 주권을 정의하는 네크로폴리틱스적 시각이다. 파시즘에서 중요한 ‘정화’의 언어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말했듯, 사회를 ‘가꾸는 정원’처럼 보고 원치 않는 존재를 제거해야 할 ‘잡초’로 취급하는 사고와 맞닿아 있다.
전쟁을 하나의 볼거리로 소비하는 사회는, 화면 뒤에서 사라지는 인간성을 인식하는 능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 잔혹함이 오락이 되고 파괴가 힘의 증거로 여겨질 때, 민주주의의 도덕적 기반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핀탄 오툴(Fintan O’Toole)이 말했듯, 이런 상황에서 “파시즘은 극단을 정상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흐름에 맞서기 위해서는 특정 전쟁이나 정책만 반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폭력을 볼거리로 만들고 지배를 미덕처럼 가르치는 문화적 논리와 교육 방식을 함께 바꿔야 한다. 정치 지도자가 잔혹함을 운명이나 신의 사명이라는 언어로 정당화하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없다. 이런 군사화된 스펙터클 문화가 계속 확산한다면, 위험은 해외에서의 끝없는 전쟁에 그치지 않는다. 국내 민주주의의 붕괴, 민간인의 삶의 파괴, 그리고 이미 한계에 다다른 지구 환경의 더 빠른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신정 파시즘에 맞서는 데서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더 큰 억압 구조의 일부로 이해하고, 변화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집단적 저항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경제나 제도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의와 욕망, 도덕, 일상의 상식을 만들어내는 지배 방식까지 포함한다. 결국 이는 의식과 가치, 그리고 인간의 행위 능력 자체를 둘러싼 투쟁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저항 운동도 교육을 정치의 중심에 두지 않고서는 지속될 수 없다. 경제적·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위한 투쟁은 지배와 착취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재생산하는 조건을 바꾸는 노력과 분리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적 신정 파시즘의 확산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청년, 그리고 이 네크로폴리틱스적 질서 속에서 쉽게 버려지는 존재로 취급되는 모든 이들이 주도하는 폭넓은 민주적 운동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런 운동은 비판적 의식과 시민적 용기, 그리고 가능성의 언어를 키워낼 수 있는 문화적 기반에 의존한다. 이 싸움은 단지 전쟁과 권위주의에 맞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미래를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끝없는 전쟁과 폭력적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는 대신, 정의와 평등, 비판적 이성에 뿌리를 둔 도덕적·정치적 프로젝트로 되찾는 것이다. 핵심적으로 이는 교육을 자유의 실천으로 되돌리고, 정치를 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윤리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으로 다시 상상하려는 투쟁이다. 생명과 평등, 정의가 이윤과 배제, 전쟁을 넘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적 미래를 향한 투쟁이다.
[출처] Trump’s Crusade: Christian Nationalism and the Making of a Holy War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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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A. 지루(Henry A. Giroux)는 현재 맥마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 영어·문화연구학과에서 공공이익 연구 석좌를 맡고 있으며, 비판적 교육학 분야의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석학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