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 질서의 비합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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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단순한 상황을 가정해 보자. 세계에서 무역을 하는 나라가 단 두 곳뿐이라고 하자. 한 나라는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다른 나라는 정의상 정확히 같은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다. 국제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한 흑자국은 자유무역 체제에서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생산능력 가동률을 유지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반면 경쟁력이 뒤처지는 적자국은 상당한 규모의 유휴 생산능력을 안고 있을 것이다.

이제 흑자국이 노동자들의 소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국내 상품 흡수(국내 수요)를 확대한다고 가정해 보자. 흑자국은 이미 유휴 생산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국내 수요가 늘어나면 수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따라서 경상수지 흑자도 감소한다. 흑자국의 흑자는 다른 나라의 적자와 정확히 일치하므로, 흑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곧 적자국의 경상수지 적자도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흑자국의 적자국 수출이 감소하면 적자국의 국내 생산자들은 자국 시장에서 더 큰 판매 기회를 얻게 된다. 그 결과 지금까지 놀고 있던 생산설비를 활용해 생산을 늘릴 수 있다. 이에 따라 적자국의 생산과 고용이 증가하고, 국내 소비도 함께 늘어난다. 다시 말해, 흑자국에서 노동자들의 소비가 증가한 결과 적자국에서도 생산·고용·소비가 모두 확대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흑자국이 '조정'을 수행해 양국 간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한다면, 세계 전체(여기서는 두 나라뿐인 세계)를 놓고 볼 때 생산과 고용, 소비가 모두 증가하면서도 경상수지 불균형은 사라진다. 따라서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흑자국이 조정에 나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이는 모든 나라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 무역 질서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흑자국이 아니라 적자국에 조정을 강요하는 것이다. 적자국은 국내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줄여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적자국의 국내 수요가 감소하면 국내 생산뿐 아니라 수입도 줄어들고, 그 결과 경상수지 적자가 축소된다. 이는 곧 흑자국의 경상수지 흑자도 감소한다는 뜻이며, 결국 불균형은 해소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계 경제의 총수요는 줄어들고, 세계 생산과 고용도 감소한다.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전체의 소비 수준 역시 낮아진다.

결국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흑자국이 조정하면 세계 생산과 고용, 소비가 증가한다. 반대로 적자국이 조정하면 세계 생산과 고용, 소비가 모두 감소한다. 참고로 첫 번째 경우 세계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흑자국이 노동자 소비를 늘려 국내 수요를 확대할 때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설령 다른 방식으로 국내 수요를 확대하더라도 적자국의 생산과 고용이 증가하면서 세계 전체의 임금 총액과 소비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오늘날 세계 무역 질서는 불균형이 발생할 때마다 더 나은 조정 방식이 아니라 더 나쁜 조정 방식을 채택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무역 질서의 비합리성이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할 당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흑자국도 조정 의무를 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국이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했다. 미국은 국내 소비, 특히 노동자 소비를 늘리는 대신 다른 나라에 대한 채권을 보유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편을 선호했다. 더욱이 자본주의 경제가 노동자 소비 확대를 우선시할 가능성은 애초에 크지 않았다.

물론 1944년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전후 오랫동안 흑자국이었던 미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자신이 적자국이 된 뒤에도 흑자국의 조정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본주의 세계의 '지도국'은 적자를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예를 들어 지도국은 반혁명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전 세계에 군사기지를 유지해야 하고, 이는 해외 지출을 늘려 경상수지 적자를 발생시킨다. 따라서 미국은 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둘째, 미국 달러는 사실상의 세계 화폐 역할을 했고, 다른 나라들은 달러를 거의 무제한으로 보유하려 했다. 미국은 달러와 달러 표시 자산을 흑자국에 공급하는 것만으로 적자를 쉽게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나 흑자국이 조정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셋째,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미 수출 상당수는 미국 자본이 생산기지를 이전해 현지에서 생산한 제품이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흑자를 줄이려 하면 미국 기업의 이익도 훼손될 수 있었고, 미국 정부가 특별한 사정 없이 그런 조치를 취할 이유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이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게 된 뒤에도 세계 무역 질서를 바꾸려는 요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은 달러와 달러 표시 자산을 세계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적자를 결제하는 현 체제에 만족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중국이 달러 외환보유액을 줄이기 시작했고, 아직 현실화하지는 않았지만 탈달러화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를 줄일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렇다고 미국이 세계경제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무역 질서를 개혁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가 이를 잘 보여 준다.

트럼프의 조치는 앞에서 지적한 세계 무역 질서의 비합리성을 해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미국이 적자국이라는 위치에서 손해를 보지 않도록 만드는 데 있다. , 적자국이 통상적으로 요구받는 국내 수요 축소라는 조정 없이도 미국이 적자를 줄이려는 것이다. 오히려 트럼프는 국내 생산과 고용을 늘리면서 동시에 무역적자를 축소하려 한다. 그 방법을 살펴보자.

트럼프가 사용하는 핵심 수단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징벌적 관세이고, 다른 하나는 교역 상대국에 강요하는 불평등한 무역협정이다. 인도를 첫 사례로 하는 이러한 협정은 상대국이 미국으로부터 반드시 수입해야 할 물량만 구체적으로 규정할 뿐, 미국이 상대국으로부터 얼마나 수입해야 하는지는 전혀 규정하지 않는다. 징벌적 관세는 이런 불평등한 협정을 거부하는 국가에 대한 처벌 수단이며, 많은 나라들은 둘 중 덜 나쁜 선택이라며 협정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강압적인 방식으로 미국의 무역적자가 줄어들면 미국 내에서 자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국내 생산과 고용도 증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경제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역 질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며, 세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합리적 체제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미국이 다른 나라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를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미국은 자신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확보한 뒤에는 적자국에만 조정을 강요하는 현재의 비합리적인 세계 무역 질서를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유지하려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비합리적인 질서를 세계에 강요하는 데 앞장섰던 나라가 미국이었다.

[출처The Irrationality of World Trade Arrangements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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