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중대산업재해 범죄의 양형기준을 마련했다. 중대산업재해로 노동자가 숨진 경우 기본 권고형을 징역 1년 6개월에서 4년으로 정하고, 가중 사유가 중첩되면 최대 징역 15년까지 권고하도록 했다. 민주노총은 양형기준 마련 자체에는 의미가 있다면서도 피해자와의 합의와 처벌불원을 감경 사유로 인정한 기준이 중대재해처벌법을 오히려 무력화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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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양형위원회와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양형위원회는 지난 21일 제148차 전체회의에서 ‘과실치사상·산업안전보건·중대재해범죄 양형기준 수정안’을 심의했다. 양형위원회가 사전에 공개한 회의 안건에는 형량 범위와 양형인자, 집행유예 기준이 포함됐다.
회의 결과 중대산업재해치사죄의 기본 양형 범위는 징역 1년 6개월∼4년으로 정해졌다. 감경 영역은 징역 10개월∼2년, 가중 영역은 징역 3∼10년이며, 특별가중인자가 중첩될 경우 상한을 50% 높여 최대 징역 15년까지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중대산업재해치상죄는 기본 징역 1∼2년 6개월, 감경 6개월∼1년 6개월, 가중 2∼5년으로 정했다. 중대산업재해 범죄로 형이 확정된 뒤 5년 이내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지르면 권고 형량의 상·하한을 각각 1.5배 높이도록 했다.
가중 요소도 구체화했다. 사고 위험에 관한 의견이나 보고가 있었는데도 개선 조치를 하지 않거나 이를 묵살한 경우, 행정기관의 반복적인 시정명령이나 권고를 받고도 조치하지 않은 경우 등을 ‘안전·보건 확보의무 위반 정도가 중한 경우’로 보고 특별가중인자로 삼았다. 도급 과정에서 안전보건 조치를 위한 최소 비용을 반영하지 않고 지나치게 낮은 금액으로 계약하거나, 안전조치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사기간을 짧게 정한 경우, 안전보건 관련 예산을 삭감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경우도 여기에 포함됐다.
반면 ‘처벌불원 또는 실질적 피해 회복’은 특별감경인자로 정했다. 사고 위험을 알고도 피해자가 스스로 출입하거나 필수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등 피해자의 행위가 사고 발생에 영향을 미친 경우도 감경 요소로 인정할 수 있도록 했다. 단순한 법 위반 사항 시정을 넘어 실효적인 재발방지 조치를 한 경우에는 일반감경인자로 반영하고, 집행유예 판단에서도 주요 긍정 사유로 고려하도록 했다.
민주노총은 22일 성명을 내고 양형기준 마련 자체에 대해서는 “최근 각급 법원의 중대재해처벌법 판결이 법의 취지를 왜곡하여 법을 무력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양형기준 마련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기준이 “중처법의 법 취지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법을 무력화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가장 큰 문제로 합의와 처벌불원을 감경 요소로 둔 점을 꼽았다.
민주노총은 피해자와의 합의를 적극적인 감경 요인으로 인정하면 “중대산업재해를 일으킨 기업에 돈으로 처벌을 회피할 수 있다는 알리바이를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대산업재해가 하청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등 경제적으로 취약한 노동자에게 집중되는 현실에서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처벌불원 의사를 요구받을 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4월 아리셀 참사 항소심에서 박순관 대표의 형이 1심 징역 15년에서 징역 4년으로 낮아진 사례도 들었다. 민주노총은 당시 감형 사유에 피해 회복과 합의가 포함됐다며, 이를 양형기준에 공식적인 감경 요소로 넣을 경우 유사한 판결이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형량 수준도 문제 삼았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의무위반치사죄의 기본 양형 범위가 징역 1년∼2년 6개월인 데 비해 중대산업재해치사죄의 기본 권고형은 1년 6개월∼4년이다. 민주노총은 산업안전보건법만으로 책임을 묻기 어려웠던 영역에서 경영책임자에게 더 무거운 책임을 묻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범죄의 양형 차이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최대 권고형을 15년으로 정한 데 대해서도 민주노총은 “중대산업재해에서 피해자의 하한은 있어도 상한은 없다”며 처벌의 상한을 설정한 기준을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23명의 노동자를 죽이고도 징역 4년의 처벌을 받는 아리셀 참사의 판결이 되풀이될 명분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양형위원회에 기준을 전면 재검토하고, 합의와 처벌불원을 감경 사유에서 제외하며 양형 수준을 높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비용으로 치부하는 기업의 관행에 제동을 걸 수 있도록 하는 중처법과 그 양형기준을 요구한 것”이라고 밝혔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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