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류선열을 알게된 것은 3년 전쯤이다. 시집 「샛강아이」를 유연히 만나고 잠시 멍하니 섰다. 동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동시를 다시 보게 됐다. 이제는 서점에서 찾을 수 없는 동화책 「솔밭골 별신제」를 어렵게 구해 읽으며 ‘류선열’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니 그 사람이 동시를 쓰고 동화를 쓴 이유와 그 마음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을 푸는 방법은 딱 하나다. 작품을 유심히 읽어 보는 것.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읽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마음을 앓자 : <꼴찌 만세>
류선열이라는 시인에 관심을 갖게 한 시는 여러 편의 시 중 <꼴찌 만세>다. “내 맘속엔 아무런 근심도 없는데 / 선생님은 내 머리를 아프게 하시지요” 초등학교 교사였다는 류선열, 동시 속 선생님은 시대에 맞춰 일하는 사람일 뿐이지 ‘사랑’이 없는 존재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자주자주 시험을 뵈며 날마다 산더미 같은 숙제를 내시고는 이튼날이면 꼬박꼬박 검사를 하시는 선생님들을 위해 마음을 앓자”
“이 세상에 아이들의 마음밭을 가꾸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믿는 어른들과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자”
- 류선열, 1988년
세상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쓰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예술이라는 장르를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져 가기 때문에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류선열은 “이제는 사라지려 하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모두의 가슴에 닿는 시를 쓰고 싶었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아름다움은 어린 시절의 생활과 풍경을 애써 기억해 써내려간 시에서 찾을 수 있다. 갈래머리 가시내, 빡빡머리 부스럼 딱지, 청보리 대궁, 쇠죽솥, 스무나무, 동부콩, 잠자리 꽁무니, 꺽저구, 깻묵을 불러 살려낸다. 단지 옛 기억을 떠올려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시화로 무너져 가는 농촌 공동체의 풍경을 다시 살려내고 싶은 소망으로 찾아 써낸 문장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꽉 막힌 천재들보다 / 들꽃과 멧새와 풀벌레까지 사랑하는 나를 / 친구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내 이름을 더 부드럽게 불러 주세요 / 그리고 한 번쯤 만세도 불러 주세요. / ”꼴찌 만세! 만만세!“라고.
<꼴찌만세>를 읽고 마음이 움직였던 것은 단지 '꼴찌'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넓은 선생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들꽃'과 '멧새'와 '풀벌레'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어떤 한 사람이 그것들을 도무지 사랑할 줄 모르는 지금 세상, 그리고 변해갈지 모를 믿지 못할 자신의 현실을 응시하는 날카로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 '새들은 왜 날아다니는가'를 물었을 때 / 선생님께서는 "바보는 지루해"하고 대답하셨어요. / 나는 다음부터 궁금한 것이 있어도 / 선생님께서 지루해하실까 봐 / 질문을 않기로 했어요. / 선생님께서 시험 점수를 발표하시던 날 / 나는 꼴찌가 되었어요"
쩌저불쩌저불, 마음을 깨우자 : <산이 울면>과 <수다쟁이 참새>
류선열은 숙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고, 성적으로 일렬로 줄을 세우는 선생님과 숙제와 공부에 지친 어린이들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
"농부가 쉴 참에 이젠 힘겨운 농사일을 떨쳐 버리고 머언 도회지로 떠나고 싶을 때"
"학교에선 아이들마저 받아쓰기와 분수에 지쳐 있으며 선생님은 떠날 날만 꼽고 있을 때"
- <산이 울면> 중에서
이런 시대의 모습에 마음을 '앓던' 류션열은 사람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떠올리게 하고 회복하고 싶어서 농촌 풍경을 그려내는 데 애쓰기도 했지만, 잠든 것 같은 삶에서 깨어나 진짜 삶을 살길 바라는 수다쟁이 참새가 되기도 한다.
"쩌저불쩌저불, 100점 만점에 80점 맞은 아이와 40점 맞은 아이를 차별하지 말아요"
"쩌저불쩌저불, 일요일 아침마다 아이들의 단잠을 깨우지 말아요."
"쯧쯧 찌블찌블, 아이들이 울고 있어용. 어른들이 모두 합심해서 몽고반점을 가진 아이들을 점수 따기 시합에 묶어 놓고 있다구요."
"쩌저불쩌저불, 아이들을 좀 더 귀여워해 줘요.......(중략)...... 살아가는 슬기를 깨치도록 자유롭게 놔 길러야 한대요. 쩌저불."
- <수다쟁이 참새> 중
찬밥과 곶감 : <호랑이 사냥>
류선열 동화 <솔밭골 별신제>는 도시에 살던 어떤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이 '보리'도 못알아 보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딸 한별이 혼자 솔밭골로 가서 지내도록 권유하여 시골로 가서 지내는 이야기를 다뤘다. 한별이는 "솔밭골엔 속독법 학원 같은 것은 없지요?"라고 물으며, 산과 들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냉이꽃이건 산수유건 노란꽃이라 하고, 피라미건 배가사리건 그냥 물고기라고만 부르는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자"고 했던 류선열은 단지 '보리'도 모르고 꽃이름도 모르는 어린이를 탓하거나 혼내어 가르치려는 '꼰대'는 아니었다. 권유하고 직접 결정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적인 교사를 그려 보인다.
"선생님은 숙제를 적게 내실 뿐만 아니라 결코 회초리를 드는 법도 없습니다. / 만일 숙제를 안 한 아이가 발견되더라도 아주 상냥하게, / "어디 몸이라도 아팠니?" / 하시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것으로 검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 <솔밭골 별신제> 중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 그림 잘 그리는 아이, 소위 "꼴찌"인 아이가 수직관계로 구분되지 않고 서로 협동하여 어울려 과제를 수행하는 장면에서, 류선열의 따뜻한 정서를 만날 수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그 본래의 본성을 헤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쩌저불쩌저불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으로 누군가를 '혼내는' 계몽적인 위치가 아니라, 차별받거나 가려지거나 무시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뾰롯뾰롯 / 탱자나무 가시가 돋아요. / 성은 학교 가고 어무이는 들에 가고 / 찬장엔 찬밥뿐이니 호랑이니 사냥을 가야지요"
"매주 냄새 굼뜨는 할머니 방을 열면 / 여덟 폭 병풍에 호랑이 한 마리 / 나는 다짜고짜 그놈을 쏘아요 / 그러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 '호랑이를 잡아 주셨으니 곶감을 드려야지'"
- <호랑이 사냥> 중에서
뾰롯뾰롯과 찬밥, 아이가 찾아나선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할머니'와 '곶감'이다. 병풍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호랑이를 마치 진짜 호랑이처럼 생각해서 장난을 치는 어린이다. 그 아이가 단지 심심해서 재밋거리를 찾아 병풍 속 호랑이 사냥을 했다면, 싱거웠을지 모르겠다. 류선열이라는 시인을 다시 보게된 것은 그 놀이 아래 숨어 있는 찬밥과 곶감이다. 뾰롯뾰롯 탱자나무 가시가 돋아나듯 외롭고 심심하고 고독한 한 아이가 배고프지만 먹을 것은 찬밥 뿐이다. 그 아이가 찾아나선 것은 놀이일까. 아니면 따뜻함과 사랑일까. 호랑이를 찾아 나섰다면 놀이겠지만, 이 아이는 할머니와 곶감을 찾으러 갔을 것이다. 뾰롯이 돋아난 외로움, 아픔, 슬픔을 아는 시인은 사랑도 안다. 안타까움과 사랑을 동시에 품고 있는 그의 문장이 아름답게 보였다.
류선열을 읽으며 이것은 시이다 라고 생각했다. 어린이가 읽는 시 '동시', 동심을 다룬 시 '동시'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생각했다. 장르의 특성에 따른 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가 필요했던 한 사람을 생각하게 됐다. 변해가는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 두려움, 분노 그리고 그 안에 작게 숨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스러운 많은 사람들, 꽃들, 소리들, 마음들. 그런 것을 그려내는데 그가 '동시'를 택한 이유는 그의 정서 아래 '어린이'가 있었고, 마침 '동시'라는 장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이 먼저라기 보다는, 그런 그의 마음이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아 다시 읽고 또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2015년에 1980년대 후반 시인의 글을 마치 지금 살아 숨 쉬는 듯 만날 수 있게 되다니.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마음이 이렇게 시로 남아있다.
출처: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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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