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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7호 이슈와 현장] ‘안녕들하십니까’, 오래됐지만 신선한 미디어의 탄생

2014년 1월 현재, 철도 파업은 잠시 소강기에 놓여 있다. 철도노조는 작년 12월 30일부로 파업을 중단하고 현장 투쟁으로 선회할 것을 선언했다. 이러한 발표에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여러 갈래로 엇갈렸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는데 왜 그 동력을 스스로 무너뜨리느냐는 질책부터, 그 순간이 정점이었고 이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신중론까지. 하지만 철도 파업에 대한 모두의 생각은 제각각이어도, 최소한 한 가지에는 동의할 것이다. 철도 파업을 모두의 관심사로 키우는데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말이다.

작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가 이렇게 많은 파급을 낳을 줄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 대자보를 처음 붙인 이조차도. 하지만 이 대자보가 붙고 나서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고려대는 이 대자보에 호응하는 다른 대자보들로 가득 찼고 곧이어 다른 대학, 다른 장소에서 이에 동조하는 대자보가 차례로 나붙었다. 그리고 대자보를 붙인 이들은 서로 뭉쳐 집회에 나가거나 철도 파업 이외의 다른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등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는 2014년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주목받는 상징이 되었다.

▲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

어떻게 ‘안녕들하십니까’는 순식간에 태풍의 눈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분석은 철도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이나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발화가 다른 대자보의 문구와 비하면 친근해서 사람들이 감정을 이입하기 쉬었다고 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대자보가 대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일반 시민을 잇는 통로로써 기능했기에 호응을 얻을 수 있다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수많은 분석들 중에서 ‘안녕들하십니까’가 ‘대자보’였다는 것에, 그것이 하나의 미디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분석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다른 방향의 분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대자보가 본래 지니고 있는 형태와 그 성격에 주목할 때 비로소 이 대자보와 대자보가 낳은 파급에 대하여 정확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파급이 소멸할지라도, 그것의 맥을 있는 또 다른 움직임이 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낳을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의 미디어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안녕들하십니까’를 미디어로써 바라보기 전에 먼저 한국의 미디어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래 대안 미디어는 기존의 주류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 생성되고 전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가정이나 DMB 등의 서비스를 통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중파 TV의 경우,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조롱을 받을 정도로 신뢰성이 바닥에 떨어진 상태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에 고초를 받았던 문제도 있지만, 이미 그전부터 TV는 파업과 같은 문제를 상당히 등한시하거나 정부 또는 자본 측의 입장만 다뤄왔던 것이 현실이다. 이제 TV는 예능이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정도를 제외하면 미디어의 본래 기능인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라는 목적을 반쪽으로 달성하고 있다. 정부 혹은 현재 구축된 질서 바깥에 놓인 메시지는 TV에서는 사라진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TV보다 더 오래된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출판 매체는 어떠한가. 한국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시사IN 같은 언론이 그나마 좋은 평가를 듣고 있지만 이 역시 현재 구축된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삼성이다. 2007년 말, 삼성그룹에서 근무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그룹의 비리를 폭로하고 한겨레, 경향이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하자 삼성은 즉각 이 두 매체의 광고를 중단한바 있다. 이후 김용철 변호사가 펴낸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대한 광고도 다른 매체를 포함해 한겨레, 경향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부당했으며 결국 2010년 초 전남대 김상봉 교수의 삼성 비판 칼럼이 경향신문에서 경영난을 이유로 게재가 되지 않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는 인터넷 신문조차도 자유롭지 않다. 2006 ~ 2007년, 당시 정부는 한미FTA에 비판적인 보도를 해온 프레시안 등의 매체에 정부 광고를 중단한 전력이 있다. 광고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출판 매체의 현실은 결국 자본을 가지고 벌어지는 협박에 스스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TV, 출판 매체에 대한 회의가 지속되자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눈을 기울이게 된다. 온라인에는 기존 매체들의 인터넷판과 <오마이뉴스>와 같이 일반 대중과 매체의 적극적인 조화를 꾀한 곳이 있었지만 이들 매체는 앞서 이야기한 한계에 놓여있었고, 인터넷 커뮤니티-블로그-SNS와 같이 개인과 개인이 직접 매개되는 뉴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2008년 촛불 집회 때는 블로그나 아프리카TV, 다음 아고라가, 2009년부터는 트위터, 2010년대 이후로는 페이스북이 주목을 받게 된다. 이들 매체는 전통적인 매체에 비하면 비교적 정부나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또한 트랙백, 리트윗, 공유하기 등의 자체 기능을 통해 전파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파가 자신들과 친하거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안에서만 그친다는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2014년 현재도 계속 이들 뉴미디어는 활발하게 쓰이고 있지만 처음 주목 받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주춤한 상태이다. 정리하자면 올드미디어는 소식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못하거나 자유롭지 못하고, 뉴미디어는 자유롭되 끼리끼리 뭉치는 역할에 불과한 상황인 셈이다.

우연에서 시작했으나 곧 그 자체로 미디어가 되다

사실 ‘안녕들하십니까’의 주된 형식은 다들 알다시피 ‘대자보’이다. 대자보는 한국에서 1980년대 대학에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각광을 받았던 미디어이다. 지금보다도 더 매체가 제약되었던 당대 현실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자보는 계속 붙여졌지만 이미 다양한 매체가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대자보에 대한 관심은 많이 사그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안녕들하십니까’가 낳은 파급에 의아한 반응을 나타냈다. 한동안 관심 밖에서 사라졌던 대자보가 왜 지금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 그 대자보가 호응을 얻었던 것 자체는 우발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몇몇 분석에서는 그 대자보가 운동권적인 색채를 보이지 않거나, 어투가 친숙해서 그랬을 것이라 보았지만 이미 ‘안녕들하십니까’ 이전에도 이런 식의 대자보는 종종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단독적으로 붙은 것이 아니라 대자보를 붙기 직전에 벌어졌던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의 파업 참여 직원에 대한 대량 직위해제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에 항의하는 대자보를 붙였다는 것 역시 상기해야 한다. 또한 이미 이전에도 ‘김예슬 선언’과 같이 몇몇 대자보가 일시적인 호응을 얻고 널리 퍼졌던 것을 생각하면 대자보가 인기를 얻는 것 자체만으로는 신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인기가 단순히 그 대자보 하나로 소모되거나 ‘김예슬 선언’(*주1)이 그랬던 것처럼 한 개인에 집중되는 대신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그 자체가 미디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는 지점에 있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붙은 지 얼마 안 되어 페이스북에는 ‘정대후문 게시판’ 페이지가 생성되었다. 이 페이지는 철도 민영화와 철도 파업 참여자의 직위 해제에 반대하는 대자보를 소개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역시 이들 대자보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다 이 대자보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이틀 후 12월 12일,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지가 생성된다. 이후 현재까지 이 페이지를 통해서 ‘안녕들하십니까’의 맥락을 잇는 대자보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일정,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 안녕들하십니까’와 같이 다른 대학, 지역, 공동체, 집단에 속한 이들이 모이는 페이지도 파생되어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자보 자체는 상대적으로 올드미디어에 속하는 매체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퍼트리는 창구로 속하는 페이스북 등의 SNS는 뉴미디어로 분류되는 매체이다. 이 둘은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만 활동하고, 혹시나 다른 미디어의 소식을 다루는 일이 있어도 기계적으로 다루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안녕들하십니까’는 그 자체를 포함해 계속 재생산되는 미디어의 틀 자체는 올드미디어이나, 그것의 정보를 통합적으로 모아 전파하는 역할은 뉴미디어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또한 단순히 미디어를 생산했다는 자족감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꾸준히 모여 의견을 나누거나 배우는 시간을 가지고, 시위나 집회에도 참석하는 등 현실 참여에도 등한시하지 않는다. 이는 ‘안녕들하십니까’가 기존 한국의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한계를 결합을 통해서 상쇄시키는 동시에, 단순히 미디어가 미디어에서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는 방향으로 더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근대성(모더니티) 확립에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 미디어가 상부구조를 흔드는 ‘토대’인 동시에 새로운 기술에 맞춰 변해나가야 한다고 강변한바 있다. 분명 한국에 뉴미디어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으나 그것들은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이식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형식이라는 점만 바라보다 미디어가 지녀야 할 중요한 지점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결합에 대한 시도 역시 계속 이루어져 왔으나 그러한 시도들조차도 한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안녕들하십니까’와 그것이 낳은 파급이 처음부터 새로운 미디어 운동을 위해서 그랬을 가능성은 낮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는 분명 우발적인 탄생이었다. 하지만 그 대자보와 그 대자보가 낳은 영향은 새로운 미디어의 상을 그려내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앞으로 ‘안녕들하십니까’가 계속 지금과 같은 주목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이 운동이 동력을 잃고 주춤할지라도 단순히 ‘안녕들하십니까’의 재현이 아닌 그것이 담아냈던 내용과 매체의 형태를 깨닫고 움직인다면 앞으로도 ‘안녕들하십니까’의 맥락과 파급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

* 주1: ‘김예슬 선언’은 2010년 3월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 김예슬이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일종의 ‘자격증 브로커’로 전락하는 등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자퇴를 선언하며 학내에 붙인 대자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의미한다. 이후 이 대자보의 논지에 찬성하는 이들이 각자의 학교에서 이에 동조하는 대자보를 붙이거나 학교를 자퇴하는 일들이 있었으며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자발적으로 카페를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반값 등록금’ 정국과 맞물려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처음 선언을 하였던 ‘김예슬’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었다. 현재 이 선언에 동조하는 운동의 동력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필자소개] 성상민(만화평론가)

- 2005년 만화언론 <만>의 객원필진으로 데뷔한 이후 2006년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강풀 특별전 전시 기획 참여와 <인터넷뉴스 바이러스>에서 2009년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현재는 <미디어스>에서 정기적으로 만화 및 문화 평론을 하고 있다. 또한 학점 관리에 큰 문제가 생겨 경희대 사회학과를 1년 더 다니는 게 최근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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