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ㅣ1월ㅣ송선생의 특검일기]지방도시와 노동에 대한 단상

마지막 이야기
지방도시와 노동에 대한 단상


한노보연 / 산업의학전문의 송 윤 희

‘송선생의 특검일기’연재를 마치는 네 번째 글‘지방 도시와 노동에 대한 단상’은 온전히 ‘나’의 눈으로 본 개인적인 생각이다. 반복적인 특수검진 노동을 하며 3주간 모텔에서 숙식을 했다. 새벽 6시 출근, 아침 식사 후 문진 시작, 4시 경 업무 종료, 식사 후 5시쯤 모텔 복귀.. 어찌 보면,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과 비슷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이었다. 돈을 버는 것 외에 의미 부여를 해보려고 3주간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글을 쓰고 나누어보는 것도 그 취지의 일환이었다. 특검일기라는 제목에 다소 부합하지 않는 끝맺음이지만, 그냥 편하게, 느낀 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지방 소도시에서의 노동을 했던 나와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1. 애매한 지방 도시
내가 특수검진을 한 이 지방도시의 첫 느낌은 참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애매한 도시, 혹은 애매한 시골? 지역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몇 개의 대기업 공장에 취업하여 일을 하고 있다. 그나마 지역 경제가 돌아가는 원천이 그런 대규모 공장들인 것이다. 그런데, 활성화된 느낌보다 정체되고,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간신히 옹기종기 모여 삶을 일구어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곳 주변을 둘러보니, 아파트촌이 한두 개, 단독주택 동네가 한 개, 그리고 산발적으로 텃밭들이 이곳저곳에 스무 평 내외로 있다. 인구밀도가 낮아서 초저녁에 대로를 걸어 다녀도 사람들을 쉽게 마주칠 수 없다. 공기 좋은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활성화된 공단도 아닌 애매한 곳이다. 사람들이 왜 지방 소도시를 기피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서울에 비해서 전원의 향과 자연의 푸근함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활기찬 도시의 기운이 있는 것도 아닌, 정체되고 다소 소외된 듯한 느낌이 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힘든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흙과 자연 속에서 살지도 못한다. 공장에 오가며 하루 8-9시간 일을 하지만, 일이 끝난 후엔 젊은이들이 함께 어울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문화적 토대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귀가하여 TV를 보고 쉬는 생활이 대부분이다. 삶이 참으로 단조롭다.
도시에 사는 노동자들의 삶도 대동소이하겠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큰 도시 안에서 다양함을 맛 볼 수 있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나. 어느 멋진 공간 안으로 도피하기도, 한강야외 공원에 가서 쉬기도, 그리고 하다못해(무엇보다도?)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소비를 통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나. 지루한 반복 노동 후에 받은 대가로 다양한 자극과 위로를 주는 소비생활이 그나마 현대인의 삶의 안타까운 유희이지만, 그마저도 지방
소도시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듯하다.

2. 젊은 노동자들의 단조로운 일상
몇몇 젊은 20대 초중반 수검자들에게 물어보니 퇴근 후 여가 시간에는 집에서 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쉬고 TV 보는 보상은 너무 안타깝다. 소비적 보상 역시 삶의 진국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한계가 있지만, TV 시청은 더욱 피상적이고 소모적인 사이버 쾌감이지 않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은, 공장 주변에는 썰렁한 주거지, 황량한 벌판과 텃밭, 그리고 유흥가와 모텔 등이 있어 딱히 할 일도, 즐길 소비문화도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1979년생, 입사 1997년, 현재까지 12년간 반도체 제조 라인 근무. 하루 8시간, 4조 3교대로, 야간 근무는 한 달에 한번 일주일씩. 그렇게 12년을 보낸 서른한 살 여성 노동자가 있다. 나와 동갑이다. 눈을 들어 얼굴을 봤다.
지난 12년간, 나는 대학생, 인턴, 전공의, 그리고 전문의로 변화해왔고, 그 와중에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찰나, 같은 젊은이로서 삶에 주어진 기회가 너무나 판이하게 다름을 확인하고, 조금 벙쪄버리고 말았다. 그냥 외형적 삶의 모습을 보고 판단했을 뿐이지만, 그래도 너무 다른 것 같다.
물론, 삶의 깊이나 다양함을 그렇게 단순한 외형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반복적이라 해서 그 노동이 가치가 덜하진 않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연구 활동을 하는 대학과 연구소와 같은 상위기관이 아닌 이상, 의사를 포함한 많은 전문 인력들도 결국 직장에서 매일 비슷한 반복 노동으로 돈을 벌고 있지 않나? 거시적 관점으로는 거의 모든 이들의 노동은 단순 반복적이라고 에둘러 볼 수 있겠다.
지나온 삶의 외형에서 느껴지는 차이와 다르게, 서울 전문 인력의 삶이나 지방 소도시 제조업자의 삶이나 그 개개인이 욕구하는 것에 필적하는 삶의 다양성과 깊이가 주어지는 일생이라면, 그리고 거시적 관점에서 누구나 다 비슷한 반복 노동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네 삶의 굴레
긴 눈으로 봤을 때 지방 소도시 한 사람의 일생이나, 대도시 한사람의 삶이나 대동소이하겠다는 느낌도 든다. 전 후자 모두 지금의 가치관에 얽매여 돈을 벌어야 의식주를 간신히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에 노예로서 한정된 자유(연 휴가 10일)만으로 감사해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참 이 곳 지방소도시는 쓸쓸하다. 그 안에 옹기종기 공장에 모여서 20대와 30대 전부를 다 보내는 노동자들의 삶은 아무리 허심탄회하게 보려 해도 너무나 단조롭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굴레에서 해방되는 길은 없는 것인가? 삶이 원래 이런 것이려니 생각하고 주어진 가치관에 세뇌되어 생산에 일조하는 노동력으로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들은 상경을 꿈꿔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상경 했을 때 다소 상향 된 소비문화와 도시의 현란함에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그 큰 굴레는 더더욱 소리 없이 삶을 옥죌 수 있겠다. 필자는 주어진 틀에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만족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렇다 하더라도 체제 전복이나 완전한 문명의 환골탈퇴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저 주어진 70 일생에서 자아실현 혹은 깨달음의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네 노동자들 모두에게 그리고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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