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ㅣ6월 l 이달의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민중가수 최 도 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 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가로 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김남주 시, 변계원 곡 1988년)’은 1988년 서울대 민중가요 노래패인 ‘메아리’에서 활동을 하던 변계원씨가 만든 노래입니다. 변계원씨는 서울대 국악과(87학번)에서 작곡을 공부한 학생으로 1988년 전남 광주에서 진행한 ‘전국대학생노래한마당’에서 서울대학교를 대표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 노래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의 노랫말은 김남주의 시<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에서 따왔습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창작한 시인 김남주는 한국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우리사회의 저항을 조직한 대표적 혁명시인이며, 혁명전사였습니다.

<내가 만난 김남주>라는 책의 62쪽 김선출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인의 삶을 돌아보겠습니다.
“.......80년대 초 형님이 감옥에서 우유팩에 못으로 눌러쓴 일련의 시가 밖으로 전해졌다. 나는 타자로 쳐 유인물화 된 시집으로 형님을 대면 할 수 있었다. 그 때 형님의 시가 내게 준 충격은 지금까지의 만남에서 가장 큰 울림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학살 정권이 폭압과 기만으로 안정을 구가하고 모두가 침묵할 때 그는 감옥에서 몽당연필 하나 없이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내일의 각오로 가득 찬 통렬한 절규를 기록하고 있었다. 형님의 시는 절망과 일상에 매몰 돼 가는 나를 섬뜩하게 긴장 시켰다.....”
1946년 전남 해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남주는 법관의 꿈을 안고 전남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1969년 김남주 시인이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박정희의 3선 개헌’으로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고향에 내려가 한국사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김남주 시인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더 이상의 침묵으로는 안 된다. 저항만이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결단을 내리며 유신에 반대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배포 합니다. 1973년 2차로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김남주 시인은 국보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13개월여의 감옥생활을 한 후 고향에 내려가 고문 과정에서 겪은 잔혹상을 담은 시 ‘진혼가’를 1974년『창작과 비평』여름호를 통해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합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며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자 김남주 시인은 이제 ‘시’와 ‘돌멩이를 든 데모대’로는 한국사회 지배계급의 벽을 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의 주 활동 근거지였던 전남 광주에서 사회과학서점인 ‘카프카’를 열어 지역의 사람들의 소통을 위한 사회문화운동 공간으로 만들려 했으나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은 후 1977년 고향 해남으로 내려가 지역의 농민들을 결집하여 ‘해남농민회’를 결성하였으며, 소설가 황석영을 비롯한 광주지역의 활동가들을 묶어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1978년 <파리콤뮨> 일본어판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수배를 받은 시인은 유신체제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한 ‘철의조직’으로 38선 이남에서의 게릴라전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중정의 수사망을 피해 서울로 상경한 이후 1976년에 결성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게 됩니다. 잠실에 있던 시영아파트를 아지트 삼아 1979년 8월 11일 ‘YH여성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살인 진압한 박정희정권 폭력을 고발하는 선언문’ 2만장을 뿌린 이후 중정의 집중수사를 받은 김남주 시인은 1979년 10월 4일 <남민전> 회원 84명과 함께 중정에 연행, 간첩으로 조작되어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의 선전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시인에 대한 고문은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해 1980년 5월 재판 당시 김남주 시인은 의식도 차리지 못하는 상태로 들것에 실려와 무기징역이라는 판사의 판결을 받아야 했습니다.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남민전>회원들은 감옥 안에서 80년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는 5·18진압에 항의 하며 옥중단식을 진행하다가 <남민전> 대표 이재문씨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동료들이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고 병마로 목숨을 잃는 그 기나긴 죽음의 터널 속에서 김남주 시인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 합니다. 뭘 쓴다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정치범의 사동에서 시인은 우유곽을 분해하여 칫솔 끝을 갈아 뾰족하게 만든 필기도구로 한자 한자 시를 썼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우유곽 시’는 만기로 출옥을 하게 된 만기출소자들의 손에 의해 비밀리에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시인의 애인인 박광숙씨에게 전달되어 1982년부터 복사물의 형태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80년대 김남주의 시는 광주항쟁의 패배감으로 좌절에 빠져 있는 광주의 활동가들을 깨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너무도 잔혹한 죽음의 시간을 지나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고, 전두환을 끌어내린 이후 수년 간 김남주 시인의 구명운동을 주도한 문인들의 석방 탄원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곳곳의 문인들이 김남주 시인 석방촉구 서한을 노태우 정부에 발송한 노력 등에 의해 시인은 1988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 되었습니다. 10여년에 이르는 긴 시간을 감옥 속에서 보내야 했던 시인은 감옥에서 얻은 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 등을 맡아 활동하시며 민족문화 운동에 힘을 쏟다가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마흔 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야만의 세월에 저항하며 올곧게 살다 가신 김남주 시인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현재 부인 박광숙 여사와 시인이 마흔 셋에 얻은 아들 김토일(노동자들이 일주일에 4일만 일하고 3일은 쉬어야 한다며 지어 주신 이름 금토일)군은 강화에 살고 있습니다.


* 2006년 3월,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되어 생활지원금을 보상받고 계시고 현재까지 33명의 명예가 회복 되었지만, 한나라당에서는 빨갱이에게 보상을 했다며 반대 데모를 하고 한나라당 최고위원 이재오는 남민전 피해자로 형을 살았던 역사의 아이러니는 무엇으로 해명할 지 황망한 게 세상살이 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 깨어지면서도 주저앉지 않았던 김남주 시인의 시대정신을 되돌아보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고 함께 나눴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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