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 l 8월 l 이달의 노래] 단결투쟁가




민중가수 최 도 은


<단결투쟁가>는 1988년에 발표된 백무산의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통해 나온 시 <전진하는 노동전사 : 울산, 7월 노동투쟁에 붙여>에 김호철씨가 곡을 붙여 1989년에 발표한 노래입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자 시인 백무산은 현대중공업 조선소 노동자 출신으로 1987년 울산 현대그룹 노동자 대투쟁에 직·간접적으로 결합했다 합니다.
당시 백무산은 노동운동의 조직가였으며 선전활동가 그리고 선동가였습니다. 백무산의 시는 자신의 현장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언어를 시어로 반영하는데 탁월했으며, 투쟁을 통해 낡은 질서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노동자계급의 삶을 제시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8∼90년대 그가 발표한 시들은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이들의 방향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21년 전 그 뜨거웠던 8월을 기억하며 <단결투쟁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에 이어 7·8·9월에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습니다. 당시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1987년 들어 발생한 노동쟁의는 3,749건이며, 신규로 결성된 노동조합 의 수는 1,300여 개에 이르렀다 합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30여 년간 우리사회에 결성된 노동조합의 총 수가 1,700여 개(이 중 400여개는 1980년 민주화의 봄 과정에서 만들어짐)인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1987년 7·8·9월 석 달여에 걸쳐 결성된 노동조합의 숫자는 수적인 단순 비교만 해 보아도 그 위력이 대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현재 현대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뀐 현대엔진노동자들의 노조결성투쟁이 도화선이었습니다. 당시 현대엔진에 근무한 노동자들은 잔업과 철야에, 월평균 420시간의 장시간노동을 하고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합니다. 당시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관리자들이 정하는 고과점수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그 기준들 중에는 조회나 점심 중회 때 두발검사(머리가 조금만 귀를 덮어도 바리깡으로 밀리거나 가위로 땜빵을 했다합니다)와 같은 군대식 기준들도 있었습니다.
[고과점수에 따른 차등임금]은 시급 동결부터 33원 인상까지 차등으로 매겨졌으며, 연말에 지급되는 상여금에도 영향을 미쳐 동결부터 최대 350%까지 차이가 났습니다. 임금과 상여금 차등지급은 노동자들을 스스럼없이 경쟁상대로 만들어 “저놈은 아부해서 진급한 놈.... 저놈은 관리자에게 양주 받친 놈”이라며 서로 흉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웃지 못 할 분위기였다 합니다. 차등임금으로 노동자들의 불만과 원성은 컸지만,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상황 속에서 회사에서 지급하는 자녀들의 장학금(학업 점수가 높은 아이를 가진 직원 중 고과점수가 높은 사람에게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합니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분노와 자괴감은 더욱 컸습니다.
관리자들의 일상적인 폭언과 구타로 병영통제를 방불케 하는 현장상황 속에서 87년 7월 5일 마침내 현대엔진노동자들은 [상여금 차등철폐]를 주장하며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니다. 그러나 현대 왕회장 정주영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며 노조를 인정하려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조 건설을 향한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외침은 현대그룹 전체 노동자에게 확산되어 1987년 7월 25일에는 김필수, 정병모 등 11인을 중심으로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대책위’가 구성되어 현대중공업 어용노조 퇴진과 노동자의 기본생활개선 등 17개 요구사항을 내걸은 현대중공업 노동자의 총파업으로 확산 되었습니다. 그리고 8월 17∼18


일에 접어들어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주최로 열린 연합시위를 통해 7만의 울산 현대노동자들은 샌딩머신을 앞세우고, 지게차를 끌고 노동자의 함성과 구호로 울산 시내를 향한 거리 행진을 진행합니다.
‘민주노조 인정하라!’ ‘두발 자유 쟁취하자!’ ‘정주영은 물러가라!’ ‘이름표를 바꿔 달라!’ ‘전경들도 동참하라!’.

민주노조 쟁취를 위해 떨쳐 일어선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방어진을 시작으로 남목고개를 넘어 울산공설운동장까지 ‘아리랑 목동'과 ‘훌라송' ‘현대사가’등을 부르며 거리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시내진출시위를 통해 역동적인 모습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은 56일간의 흔들리지 않는 파업투쟁을 통해 1만여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으며 ‘차등고과제’ 철폐, ‘단일호봉제 쟁취’ ‘주택수당’과 ‘학자금 일괄지급’ 등 많은 변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민주노조 건설만이 가난과 차별을 떨쳐 낼 수 있음을 깨달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87년 총파업 투쟁’을 통해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밑불로 자리했습니다. 또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위력적인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영세, 중소, 대공장의 울타리를 넘어 사무, 병원 전문직 등 전 산업에 걸쳐 민주노조 건설운동의 바람을 일으켜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올곧게 세워내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거대한 투쟁을 통해 민주노총이 건설되었고, 그 투쟁의 현장에 ‘단결투쟁가’는 함께 하였습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87년 대투쟁을 이끌었던 현대그룹 내 노동조합들은 대부분 노사협조적인 노동조합으로 변화 되었고, 현대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다수의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 고임금에 안주하고 있으며, 87년 투쟁을 이끌었던 지도부 중 일부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이끄는 지도부가 되어있지만, 지금 이 시간 현장 안에는 87년 이전의 노동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조금씩 갉아 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 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뿐이다”의 노래가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한 대 어우러져 투쟁하고, 불려질 날을 기원해 봅니다. 지금 이 시각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서 한 달 가까이 폭염과 현대자본의 폭력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는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삶의 희망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사람이 중심 되고 더불어 사는 삶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밑불이 되길 바라며 “너희는 조금씩 갉아 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의 단결투쟁가의 노랫 구절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불러봅니다. 일터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한노보연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