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 l 8월 l 특집] 떠나보내는 서울역

떠나보내는 서울역
보건의료학생 ‘매듭’ 김 진 현

서울역은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기차역이다. 꼭 서울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봄직한 곳이다. 경기도에 사는 나도 자주 간다. 거기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을 기차에 태워 보내는 사람, 계단이나 길바닥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서울을 왕래한지 어언 6년이나 되는 나는 앞에서 언급한 양자의 경험이 모두 별로 없다. 수도 없이 서울역을 드나들었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가끔은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한, 때때로는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의 꿈, 심지어 언젠가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의 영혼. 숱하게 떠나보냈다. 7월 23일 저녁,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던 여름날도 그런 자리였다.

매년 여름만 되면 뙤약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준비하는 현장활동이 있다. 보건의료학생 ‘매듭'의 ‘건강현장활동'이 그것이다. 앞뒤를 많이 잘라먹고 설명하자면 사람들의 불건강을 만들어내는 구조 밑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고 연대하는 활동이다. 이것 때문에 해마다 6, 7월은 없는 거나 다름없이 살고 있다. 그래도 안 할 수가 없다. 세상에 어찌나 아픈 사람들이 많은지 6박 7일의 기간마저 짧을 지경이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처음 전해들은 것도 작년 건강현장활동에서였다.

올해 처음 참가한 누가 그랬다. "삼성반도체 문제는 누구나 듣기만 하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참으로 그렇다. 사람이 죽었다. 일이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들은 많이 봤다. 일하다가 골병 든 사람들도 다수 봤다. 하지만 지금이 70년대도 아닌데 누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노동환경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겠는가. 더군다나 삼성이다. 세계 1위의 D램 생산기업이다. 노조가 없어도 노동자들이 잘 먹고 잘 산다던 곳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밥은 잘 먹을지는 몰라도 잘 '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백혈병에, 온갖 종류의 희귀암에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억울하게 죽는지 모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게 노동하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평범한 삶의 기쁨들을 마땅히 누려야 한다. 故 황민웅씨는 그러지 못했다. 어린 자녀와 애틋한 처를 두고 30대 초반에 세상을 떴다. 故 연제욱씨는 서른도 못 넘겼다. 가족들은 아직까지 눈물이 마를 줄을 모른다. 추모제의 여름밤, 유가족들의 오열을 보면서 서울역에 모인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뺨에 맺힌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인지, 눈가에서 흘러내린 것인지 몰랐더랬다. 처음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목멘 소리로 '더 이상 죽이지 말라'만 외쳤다. 복잡한 구호는 생각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추모제가 끝나고 오래 전부터 피해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온 사람들이 모여서 간단히 정리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들의 그은 얼굴에서, 내년에도 함께 하자던 또렷한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과 두려움도 밀려왔다. '내년에도'라니...... 이 싸움은 언제나 끝이 날까?

작년에도 참가했던 친구 하나가 했던 이야기이다. "작년에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공감도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렵다고 느꼈다.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어떻게 삼성을 이길 수 있겠는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는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싸움이다. 더구나 무노조경영의 대명사인 삼성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건강현장활동의 다른 일정 중에 서울대병원 노동조합과 함께 청소노동자들의 휴게 공간을 요구하는 '따뜻한 밥 한 끼의 캠페인'이 있었다. 그곳에서 노동조합의 힘을 절실히 체감했다. 병원 로비에 판 깔고 선전전 했다. 밤에는 본관 로비에 가서 잤다. "혹시 이 병원의 진정한 주인은 노동자가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했다. 노동조합 옷을 입으면 대낮에 집회 조직하러 다녀도 누가 뭐라고 안 하는 곳이 바로 서울대병원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노동조합이 제대로 서지 못한 간접고용 비정규직들의 상황은 심각했다. 간담회를 다녀온 참가자들마저 우울해졌을 정도였다.

하물며 노동조합이 없는 삼성에서는 어떠하겠는가? 사람이 줄줄이 죽어나가도 회사는 모르쇠로 일관하고만 있다. 한 라인에서 사람이 둘씩 죽어나가도 노동 환경과는 아무 상관없단다. 그만큼 힘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여기에 맞서려면 그만큼 단단한 노동조합이 있고, 강력한 노동운동이 있어야 한다. 일등국가에 일등국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1위 기업에는 세계1위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최고 좋은 나라이고 노동하지 말고 근면하게 근로하라는 여기서는 우스운 이야기이다.
이런 상념들로 슬퍼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용역들을 무서워하면서도 더 이상은 갈 데가 없어 싸워야 한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철거민. 남들하고 충돌하는 건 질색이지만 자식들한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 아직도 현장에 남아있다던 노동자. 그리고 서울역에서 떠나보낸 영혼들. 노동자로 살았기에 먼저 떠났지만 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그들.

그러고 보니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던 그 친구는 이런 말도 했다. "근데 요즘 들어서는 희망은 있다는 생각도 들어. 박지연씨 돌아가시고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가지는 거 보면 말이지. 어쩌면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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