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7월|새세상열기] 장애

다섯 번째 이야기

시설장애인의 역습이 시작되다
시설 밖으로! 세상 속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교육국장 남 병 준
namtoosa@naver.com


“아침에 콩나물국이 나온다. 넓은 대접에 밥을 말아 가지고 나온다. 사람들은 그것도 정말 잘 먹는다. 점심은 콩나물국에 김치를 넣은 국이 나온다. 저녁은 콩나물국에 김치를 넣고 거기다 두부를 넣은 국이 나온다. 거기다 밥을 말아서 사람들에게 먹인다. 잘 먹는다. 왜? 배고프니까!”
- 장애인시설 생활인의 진술중에서 -

뭐가 문제일까?
‘장애인시설’ 하면 ‘시설비리’와 ‘인권유린’ 따위의 단어들과,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끔찍한 학대장면이 연상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인시설의 비리와 인권유린 사건들은 수 십 년간 지긋지긋하게 일어나고 또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설에 사는 장애인을 이용해 도대체 얼마나 큰돈을 벌기에 사람들에게 개죽같은 음식을 먹이고 보일러도 안 되는 냉방에 방치하는지, 혹은 시설에 사는 장애인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아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법기관도 아닌 장애인시설에서 장애인을 묶어놓고 밥을 굶기고 폭행하고, 혹은 시설 운영자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하기에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도 처벌도 안 받는지, 심지어 처벌을 받아도 버젓이 다시 이 ‘장사’를 계속 할 수 있는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걸까? 혹은 왜 해결되지 않는 걸까?
장애인시설이 비리와 인권유린의 온상이 되었음에도 그 구조가 강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시설운영자, 장애인가족, 시민사회 등 4자간의 ‘침묵의 카르텔’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장애인가족은 장애인을 시설에 맡기는 것으로 장애인의 삶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정부는 100%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의 공적 운영을 포기하고 민간의 법인단체에 위탁하고 관리감독의 책임조차 포기하고 침묵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신체거동과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중증장애인의 인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권과 다른 것으로 간주하고 침묵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❶ 장애의 사회학적 이해
❷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인 운동
❸ 활동보조는 장애인의 생존권
❹ 장애인자립생활운동
► ❺ 탈시설운동
❻ 장애인 교육권, 노동권과 소득보장
※ 글 싣는 순서는 필자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침묵의 카르텔이란 결국 장애인이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살 수 없는 현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부양의 책임이 오직 가족에게만 전가되는 현실에서, 신체거동이나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중증장애인들은 비참하게 혹은 가족에게 짐스런 존재로 평생을 살아야하는 현실에 대한 우리 모두의 침묵인 것이다.

장애인시설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성폭력, 감금, 폭행, 살인, 강제노동, 수급액 갈취, 강제 결혼, 강제 불임시술 등이 난무하는 장애인시설이지만 이런 비리만 없으면 괜찮다는 생각은 장애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발상이다. 2005년 복지부와 민간단체가 함께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설생활인의 77% 이상이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입소했다고 답했다. 100%라는 답변이 나오지 않은 것은 상당수의 장애인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입소와 퇴소에서부터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고 일상활동의 전반에 걸쳐 자신이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없고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삶, 세상과 격리된 감옥같고 병원같은 곳에서 군대식 단체생활을 강요당하고, 외출과 외부와의 편지나 전화 등 통신의 자유가 침해되고, 종교를 강요당하고,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 요컨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이며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보장하고 있는 ‘신체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공간과 그 시스템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장애인이 시설에서 살고 있을까?
장애인생활시설은 2007년 기준으로 총314개소에 21,70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지적장애인시설, 중증요양시설, 지체장애인시설, 시각장애인시설, 청각장애인시설, 장애영유아시설 등이 있고, 미신고시설과 정신요양원 등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약 4만명 이상의 장애인이 시설에서 거주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장애인복지가 발전한 소위 ‘복지선진국’들에서, 시설보호중심의 장애인복지에서 탈피하여 지역사회 자립생활 지원중심으로 전환한 소위 ‘탈시설운동’ 혹은 ‘탈시설화’가 추진된 것은 벌써 수 십 년 전의 일이다. 외국에서는 주로 정부에 의해 시설이 운영되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극단적 시설비리와 인권유린은 없었지만, 수용시설에서의 보호라는 것이 장애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인식, 그리고 자립생활 이념이 확산되고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복지서비스가 확대됨에 따라 시설은 점차 사라지거나 역할이 축소되어갔던 것이다.
‘탈시설’이 단순히 시설에서 나와 가정에 방치되거나 사회에서 차별받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역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립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탈시설’과 ‘자립생활’은 항상 분리될 수 없는 운동이었고, 1970년대의 자립생활운동의 확산은 곧 ‘탈시설화’가 진행되었던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온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탈시설, 무엇이 필요할까?
최근 전국 각지에서 시설생활인들의 탈시설 욕구조사를 실시한 결과, 서울․대구․경남․광주 등 모든 지역에서 응답자의 과반수가 탈시설을 희망하고 있다고 답했다. 자립생활의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탈시설 희망자는 더욱 높아질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탈시설은 이론처럼 쉽지 않다. 아직 대다수의 장애인가족들은 복지가 열악한 한국사회에서 자립생활은 무모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 도전이라는 인식이 많다. 시설측에서 장애인의 자립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외부와 소통하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도 많다.
시설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삶을 살아온 장애인이 자립생활의 정보를 구하고 자립생활의 의지를 갖게 되는 일도 쉽지 않다. 당사자의 의지가 강하더라도 시설 밖에서 자립생활을 지원할 조력자를 만나지 않으면 시설에서 자립생활을 준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장애인의 헌법적 권리가 보장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탈시설에 성공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 것이다.
최근 탈시설을 감행한 장애인들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3개월에서 1년정도의 준비기간 끝에 시설을 나와서 자립생활을 시작하였고, 그중에는 시설에서 야음을 틈타 1km 이상을 기어서 도주한 중증장애인도 있었다. 모든 경우, 시설에서 나와 살 집과 활동보조와 생계 대책마련이 가장 절실하고도 어려운 문제이다.

탈시설운동, 어디까지 왔나?
장애인의 보편적 권리를 확장시킨 장애인운동의 모든 과정, 그리고 시설비리와 인권유린에 대한 모든 대응과정이 탈시설운동의 배경이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한국사회에서 탈시설운동이 현실적 의미를 가진 것은 최근 몇 년간의 일이다.
특히 2006년의 활동보조제도화 투쟁과 성람재단 비리척결 투쟁은 탈시설-자립생활운동을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부각시키기에 충분했다. 중증장애인들 스스로 자립생활을 위한 사회서비스를 권리로 요구하는 투쟁을 하였고, 중증장애인들 스스로 시설장애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한 것이었다. 투쟁의 결과, 2007년부터 활동보조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이 되고 장애인시설에 대한 개선조치들과, 퇴소지원금 등의 제도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2008년 4월, 복지부는 ‘장애인거주시설혁신방안’을 발표하여 장애인생활시설을 소규모화하고 거주기능만을 중심으로 시설을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복지부의 개선책에 대한 시설권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으며, 만약 복지부의 구상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비리와 인권유린이 크게 줄어들고, 그룹홈과 같은 지역사회 생활공간이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여전히 장애인을 보호시설에 수용하는 시스템은 유지되고 시설권력은 다른 방식으로 자산을 증식시킬 것이 분명하다. 사학비리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와 정확히 동일한 법적 이유로 시설자본은 어떠한 비리를 저질러도 기득권을 합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탈시설, 그 이후는?
지난 2009년 6월 4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중증장애인 8명이 천막을 치고 노숙농성을 시작하였다.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평균 20년 동안을 살았던 사람들이, 시설에서 나와서 지역사회 자립생활의 대책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시설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노동조합을 지지하고 시설비리를 함께 폭로했다는 이유로 시설 내에서도 시달림을 받아 시설에 계속 살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시설비리 척결투쟁의 과정에서 자립생활을 하는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자립생활을 결심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마로니에공원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두 달이 넘게 농성을 한 결과, 서울시로부터 ‘자립생활가정’이라는 자립생활을 위한 임시 주거대책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립생활이란 위험을 무릅쓴 매일 매일의 전쟁이다. 부족한 활동보조시간과 극단적 빈곤, 살 집에 대한 불안감, 사회적 제약들에 맞서 함께 투쟁하지 않고서는 생존도 미래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투쟁으로 깨어질 침묵의 카르텔
이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한 ‘탈시설-자립생활’은 모두의 동의를 얻은 듯 보인다. 그러나,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의식, 시설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어버린 시설자본의 어마어마한 권력, 오직 예산의 범위 안에서만 시혜적으로 제공되는 복지서비스가 지속되는 한 장애인의 권리는 골방과 시설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에게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구조를 유지시켜온 것이 정부와 시설, 가족과 시민들의 침묵의 카르텔이었다면, 그것은 당사자의 양보없는 권리투쟁에 의해 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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