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9월|이달의 노래] 파업가

 

파 업 가

민중가수  최 도 은

 

파업가(1988년 김호철 글.곡)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쪽나도 지킨다

노조깃발아래 뭉친 우리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파업투쟁으로 뭉친 우리 해방깃발 아래 나선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출발점인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현장에서 불린 노래는 재미있게도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는 아가씨야∼"로 시작하는 프로야구장 응원가의 대표곡인 대중가요 <아리랑 목동>이었습니다. 울산지역 뿐만이 아니라 인천, 마산·창원 등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대부분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대중가요와 군가, 심지어는 애사심을 강조하는 회사 ‘사가’를 부르며 파업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설마” 하겠지만 그 땐 그랬습니다. 지금처럼 노동가요가 CD로 자유로이 복사 보급되는 시절도 아니었고, 1987년도만 해도 노동운동을 하거나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은 늘 안기부(오늘날 국정원)의 추적과 고문의 그림자, 죽음의 그림자와 삶을 맞바꾸는 시절이었기에 노동과 불평등을 주제로 한 노래를 만들거나 노동자의 노래를 부르는 일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과 다름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안기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하다 보니 노동자의 의식을 담은 노동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은 진보적 의식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민중교회나 카톨릭 노동사목, 야학 등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3∼4년을 기점으로 기독교 청년회 노래패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삶을 담은 몇몇 노래가 만들어져 비밀리에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가요의 전파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었기에, 일반 다수의 노동자들에게는 먼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87년 대투쟁의 공간에서는 군가 등의 노래가 대중적으로 불린 것이지요.

 그러나 1987년 대투쟁은 우리사회의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습니다. 마치 지각 변동을 일어나듯 노래운동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대투쟁을 통해 확장된 민주주의 공간이 생기자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문예활동가가 생겨났습니다. 더불어 노동자의 투쟁성을 담은 본격적인 전투적 투쟁가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전투적 노동가요의 대표적 작곡가는 김호철이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87년 대투쟁 이후 천지를 뒤흔들듯이 나타났고, 그 폭발적인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87년 대투쟁이 있었고, 그 이후 87년 말 88년 봄에 이르러서는 인천, 안양, 마산, 부산 등지에 민중가요 전문 노래패들이 대거 생겨났고, 그 노래패들은 공단에 널려 있는 투쟁의 현장에서 김호철의 노래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면서, 문화운동의 발전과 노동운동의 발전이 서로 결합되었던 것입니다.

 80년대 후반 노동가요 제조 자판기로 불리며 노동가요 창작의 대부 역할을 한 김호철의 노래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났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노래 <파업가>는 김호철의 대표곡으로서 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자의 대표적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1988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준비하면서 서노협(전노협 결성 전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에서 활동하던 김호철이 집회장인 연세대 학생회관 로비 한구석 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김호철은 이 곡을 두고서 “그 노래는 내가 즉흥적으로 만든 곡이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김호철이 즉흥적으로 만든 이 노래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동가요의 대표곡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천재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가 20여년을 가고 있는데.....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김호철의 노래를 접할 때마다 ‘장강에서 고수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나름 싱어송 라이터를 꿈꾸며 틈나고 짬나는 대로 노래를 만들고 끄적여 보았지만, 매 시기마다 시의적절하게 토해내는 김호철의 노동가요를 접할수록 저의 창작능력에 한계를 느끼며 창작자의 길을 접고 김호철이 발표하는 노래를 인천지역(88년 당시 제가 활동 했던 공간)에 보급하는데 열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물인지...., 여담이지만, 노동가요 입문 20여년이 훌쩍 지난 오늘까지도 변변한 히트곡이 없는 가수가 되었네요.

 김호철은 1980년 한국체대 태권도학과에서 학생회활동을 하였습니다. 1979년 가을, 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맞이한 1980년의 봄은 암울했던 유신독재를 청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품고 찾아 왔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 열기 덕분에 청년 김호철에게도 학생회 활동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한체대 내에서는 선생과 코치가 가하는 일방적 구타가 심했는데, 청년 김호철은 “우리가 왜 맞아야 하지?”라는 의문을 갖고 구타에 저항하는 구호를 내걸고 학생회 선거에 임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청년 김호철의 구호에 호응을 하였고, 그러한 위력으로 김호철은 태권도학과 학생회장에 당선 되었습니다. 80년 봄 청년 김호철은 민주화의 거리에서 계엄철폐를 외치며 연일 민주화 시위에 동참하였고, 한체대 태권도 학생회 회장 자격으로 1980년 5월 17일 밤 이화여대에서 열린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모임’에 참석했다가 강의실에 난입한 계엄군에 의해 군 합수부로 끌려가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운동(태권도)으로 다져진 체력이었지만 계엄군의 매질은 견디기 힘들었고, 계엄법 위반으로 투옥된 이후 강제로 끌려간 군대에서 군악대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대 후 복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취직을 해야 했으나 신원조회에서 빨간줄이 그어진 시국사범이기에 취업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밤무대에서 트럼펫을 부는 일 이었습니다.

자칭타칭 딴따라 김호철은 이후 노동현장에 취업했다 해고되어 ‘서노련’ 활동과 ‘돗자리’라는 공간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기타반’ 강사활동을 하다, 이후 서노협 문화국에서 활동을 하면서 <파업가>를 비롯하여 <노동조합가> <전노협 진군가> <총단결총투쟁> <총파업가> <단결투쟁가> 등 다수의 노래를 창작 보급하여 노동운동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공로로 1991년 ‘전노협’에서 공로패를 받았고, 현재는 ‘노동의 소리’라는 인터넷 민중가요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노동현장에 <아리랑 목동>이 불리는 일은 없습니다. 전국 어느 곳에서든 노동조합을 만들면 맨 먼저 배우는 노래가 <파업가>입니다. 우리사회에 ‘노동자의 노래’와 ‘전투적 노동가’라는 말을 만들어 낸 작곡가 김호철과 8~90년대 문화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투박하고, 소박하지만 노동가요라는 독특한 장르가 존재합니다. 휴대폰 벨소리 하나만 다운을 받아도 돈을 내는 사회에서 저작권료 한 푼 받지 않고, 또한 저작권료 한 푼 요구 하지도 않으며 20여 년 간 노래를 부르고 들을 수 있다는 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호철의 노래를 한 두어번씩은 부르며 살았다고 생각 됩니다. 평생 자신의 지적 자산을 나누며 노동가요를 만들기 위해 불면의 밤을 보내며 평생을 고단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작곡가 김호철...., 오늘 우리가 <파업가>를 부르면서도 불편한 책임을 나눠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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