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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ㅣ10월ㅣ연구소리포트] ERP,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ERP,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 ERP 관련 작업 주요 내용 몇 가지



공공노동통제대응위원회 이황현아


ERP가 주목을 끈 이유는 단순했다. 10년 전 ERP가 내게 다가왔다. 만도 문막 공장에서 상담 요청이 있었다. 연맹의 00국장과 함께 방문한 그곳에서 현장 노동자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아주 옷을 홀딱 벗고 일하는 것 같아요.” 이 노동자가 암시하는 바는 다들 짐작하다시피 ERP가 감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자동센서로만 불리었던 ERP가 대체 뭐 길래 감시카메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걸까. 이때부터였던가 보다. 막연히 ERP는 내가 풀어야 할 과제 같았다. 그래서 노동자감시근절연대모임도 하고 공공노동통제대응위원회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이제 ERP는 웬만한 사업장엔 다 깔려있다. 한결같지는 않았지만 ERP를 주시해왔고 교육을 통해 관련 문제들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왜? ERP는 속수무책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자 감시통제 문제는 여전히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답은 혼자 풀어갈 수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는 그간 진행해온 ERP 관련 작업의 주요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하며 동지들과 같이 문제를 풀기 위한 화두를 던진다.

첫째, ERP는 노동자의 생산과 효율성 증대뿐 아니라 노동자를 ‘감시ㆍ통제’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생산자동화시스템은 각각의 기계에 전자정보센서를 부착하여 개별 노동자마다 휴식시간, 작업시간, 생산량, 생산속도, 불량률, 작업장 내 현재 위치 등을 실시간으로 기록함으로써 노동자의 자율성과 여유시간이 심각히 축소된다. 이전에는 종료시간에 생산량을 체크했지만 이와 달리 자동화시스템은 실시간으로 체크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한시도 쉴 수 없다. 나아가 작업 이외의 것들, 이를테면 작업자들 간 사적인 대화나 노동조합과의 관련성-노조활동 등이 직간접으로 파악되어 오ㆍ남용될 소지가 크다. 많은 기업들이 노조 설립이나 파업 직후에 ERP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ERP 도입 효과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가 스트레스에 의한 관리, 현장통제 강화, 고용불안 임을 염두에 둘 때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의제화가 시급히 요구된다.

둘째, 병원 ERP는 ‘원가분석’을 철저히 하기 위해 도입된다. 통상 ‘통합물류시스템’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데, 병원에서 ERP가 구축되면 회계와 구매뿐 아니라 각 과별, 의사별 원가분석이 가능해져 병원 전체를 한눈에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병원의 정보화(e-Healthcare)는 처방전달시스템(OCS),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 전자의무기록시스템(EMR) 등으로 연결된다. 병원은 OCS, PACS, EMR 등 병원정보시스템들을 일반 기업에서 쓰는 ERP와 연동시켜 간호사ㆍ의사의 통제시스템으로 구축한다. 병원 가운데 처음으로 ERP를 도입을 시도했던 전북대병원의 경우 부서별로 설치된 ‘목표달성신호등’을 이용해 간호사들을 직접 통제할 수 있었다. ‘목표달성신호등’이란 수익목표를 설정해놓고 목표치에 90%를 달성하면 노란 불이, 못 미치면 빨간 불이, 100%를 달성하면 초록 불이 들어오게 하는 시스템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ERP 효과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부서는 환자 치료의 최전방인 간호병동이다. 사례를 통해 병원 ERP의 문제점을 살펴볼 수 있다.

사례 1: 재료비 절감 차원에서 물품을 아끼라고 한다. 각 병동별로 물품 사용량을 비교하므로 수간호사에게 쪼여 간호사들에게 실질적인 직접 간호업무보다는 물품 확인 하는 데 더 신경 쓰게 만든다. 물품 신청시 50%를 감하여 절반만 지급한다.
사례 2: 물품 아끼라고 하면서 수액주사 꽂는 자리에 반창고 길이를 되도록이면 짧게 붙이게 하고 반창고 제품 역시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구입한다.
사례 3: 수술환자 소독을 날마다 해야 하는데도 이틀에 한 번씩 하게한다. 물품 하나하나에 원가를 써서 붙여 최대한 사용을 줄이게 한다. 중증환자 경우에도 환의와 시트를 날마다가 아닌 2~3일에 한번씩 갈게 만든다. 사례 4: 1회용 물품을 버리지 않고 물로 다시 씻어 재소독하여 사용하게 한다.


셋째, 공공부문에서 ERP 도입이 초래하는 효과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에서 사기업 부문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 공공부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부분은 정부지침과 경영평가 관련하여 세밀한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다. 공공부문 ERP는 대개 ‘ERP+BSC’ 조합으로 들어오는데, 이는 ERP의 궁극적인 목표가 ‘평가’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공공기관 경영진이 ERP 시스템을 도입하는 이유는 △인건비 절감을 통한 노동비용의 감소, △모든 낭비적 요소를 제거한 생산성 향상, △능력주의 인사제도 도입을 통한 경쟁 강화 때문이다. ERP 시스템은 통합시스템임을 자랑하는 만큼 그것이 구축됨과 동시에 인사조직구조와 인사노무관리 형태 변화로 즉각 연결된다. 공공기관에서 ERP 시스템과 BSC 연결은 상업적 운영을 기반으로 효율성 극대화라는 시너지효과 창출 → 성과 중심의 승진-보상체계 구축 → 연봉제 확대, 평가제도 변화, 근속승진제 폐지 → 노동자간 경쟁 격화, 개별화 → 경영진 논리에 종속된 노동자 → 노조 무력화 과정을 수반한다. 전면적인 ERP의 경우 BSC와 연동되고 이것은 곧 연봉제, 성과급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가스, 발전 등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ERP로 우선 하는 일이 많아졌어요. 고객센터 접수-지사이관-수시확인 자동이체신청건, 과오 환급금 등 모조리 그날 처리해야 하거든요. 미처리건수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됐어요. 직무스트레스 또한 큰데, 전화벨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습니다. 나 같은 경우 전화 받으면 80%가 욕으로 시작하는데, ”야 이 새끼야“는 기본이구요. 이런 상황에서 공단은 업체에 맡겨 모니터링을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징계자가 나오면 이건 모두 전화모니터링에서 걸린 사람들로 봐야합니다. 민원처리율, 전화통화율, 실시간 입력건수, 징수율, 요양에서 돈 빼온 것까지 실시간으로 평가해서 구체적인 등수를 매기고 있으니까요. 저거 보세요. 하다못해 이제는 공간구조까지 바꿔 사람들을 더 개별화시키고 폐쇄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걸요.” - 15년차 징수업무 남자 조합원 인터뷰(2009년 10월)

넷째, ERP 도입을 시작으로 해서 노동통제 방식의 다양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고객만족도’는 최근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전화응대모니터링’은 대민서비스를 주된 업무로 하는 곳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해마다 고객만족도조사 결과를 가지고 전 직원 캠페인을 벌이다시피 하고 있는데, 특히 2009년도 고객만족도조사 결과는 노동통제를 강화하는 핵심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 고객만족도 3요소를 외부고객만족도, 내부고객간만족도, 전화응대모니터링으로 칭하며 각 영역별로 고객만족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고객만족도 조사는 부서별 실적 평가의 중요한 요소이며 이후 부서별 성과평가로 이어져 KPI(핵심성과지표)의 주요 요소가 된다. 평가결과를 상시적으로 분석하여 부서별 목표 변경, 업무과정 재설계를 일상적으로 진행한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가짜 환자 전화응대모니터링이 시행되고 있는데 놀라운 점은 본인 동의 없이 녹음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하는 행위로 명백한 권리 침해로 볼 수 있다. 내부고객만족도는 타 부서 노동자들을 평가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부서 간 경쟁을 조장하게 된다. 외부고객만족도의 가장 큰 문제는 병원의 구조적인 부분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확인하지 않고 시설, 배려, 친절도만을 문제 삼는다는 점이다. 시설 상태와 청결도, 직원 친절도 등을 조사할 경우 외부 하청업체 노동자까지 평가 대상으로 포함시키게 되는데, 이때 청소미화원, 환자이송원, 안내ㆍ주차요원 등의 불친절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많다.
“전화벨소리 3회 이전에 받아야 10점을 받아요. 진료부서나 그 외 진료 지원부서나 다 똑같구요. 이렇게 되면 환자진료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죠. 조합원들도 주객이 전도됐다고 말할 정도예요. 민원 강화로 인해 접점부서 간담회를 연속 2회 실시하며 직원들 분위기를 위축시키고 있구요. 때론 교수가 불러 개인면담을 하기도 하는데 2008년도 고객만족도조사 결과 등수를 매겨 하위 25%에 팀 빌딩을 했어요. 하위점수가 특정부서에 몰리는 경향은 어쩔 수 없지요. (그런 부서들은) 애초에 고객만족 시키기 어려운 부서들인 거고. 그럼에도 해당부서는 매도당하죠. 민원 내용을 확인해보니 전화예약 불쾌, 카드수납 후 현금반납 요청, 미수납분, 번호표 새치기, 3차 의료기관에서 진단서 가져와야 보험적용 되는데 무작정 해달라는 등의 것들이었어요. 이런 내용 가운데는 억지도 많은데 병원은 모두 직원 책임으로 전가하고 아무런 개입도 안 하는 거죠. 하지만 이런 점은 구조적인 문제이고 고질적인 병폐라고 생각해요.” - 16년차 여자 간호사 인터뷰(2009년 10월)

끝으로, ERP가 도입된 사업장에 대한 변화를 읽어내기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2008년)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결과에 따르면 ERP 도입은 대부분 부정적인 효과로 귀결되고 있다.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점은 ‘작업시간’ 통제이고 그 다음은 감시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증가이다. ERP가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주고 일을 편하게 할 것이라는 자본의 선전을 쓸데없게 만드는 현장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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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연구소리포트에 ‘ERP,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2부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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