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0년ㅣ10월ㅣ최도은이 쓰는 이 달의 노래] 불나비

불 나 비

민중가수 최 도 은

(작자 미상, 1970년대 중후반 혹은 80년대 초반)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 섞인 미소로 지워 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 마음은 곧 터져 버릴 것 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 버릴 것 같에
친구야 가자! 가자! 자유 찾으러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 갈 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 갈 테야



해는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열사가 돌아가시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아직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꿈꿨던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평화시장 다락방에서 깜박잠을 자며 철야를 해야 했던 6∼70년대 여공의 모습은 오늘날 창문하나 없는 2평짜리 고시원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반짝노동에 허덕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오늘과 크게 다름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난여름 전태일을 따르고 전태일의 뜻을 지켜내자는 꿈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전태일 다리 이름 짓기 캠페인 808행동’의 노력이 힘이 되어 다음 달 부터 청계천의 ‘버들다리’를 ‘전태일의 다리’와 함께 쓰기로 하였다 합니다. ‘전태일의 다리’라는 이름을 통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억하고 알리는 의미 있는 시간이 확산 되고, 오늘날 반짝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와 설움이 조직되는 노둣돌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전태일의 다리’를 보며 이 달의 노래로 <불나비>를 정해 보았습니다.

래 <불나비>는 지난 30년 간 노동자의 투쟁에 함께 한 대표적인 노동가요입니다. 이 노래가 불린 진원지는 70년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노조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한 청계피복 선배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이라 합니다. 누가 만든 노래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70년대 중반부터 불렀다(양승조 청피 전 지부장님의 구술)는 이야기와 1981년부터 부른 것으로 기억된다(황만호 전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님)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셋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외치며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불길에 던진 노동열사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살아생전 단 하루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단 한 시간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하고 삶을 마쳤습니다만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시대 상황에 고통 받고 있던 청년학생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전태일의 분신과 죽음으로 인해 많은 청년학생이 노동운동가로 이 사회의 사회운동가로 전화하는 과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집권 10여년 폭정에 지친 민중들의 결집과 움직임에 긴장한 정부는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거액인 3천만 원(당시 100만원이면 서울에 집을 살 수 있었다 하고, 3천만 원 이면 종로4거리에 나지막한 빌딩을 살 만큼 거액)을 제시하며 전태일의 장례가 사회문제로 확산되지 않게 하기 위한 회유를 하기도 했다 합니다. 하지만 이소선 여사는 “나는 돈 없이도 산다! 돈 좋아하는 놈들 다 가져가라!”며 성모병원 영안실 바닥에 한 움큼의 돈을 뿌려버렸고, 당황한 정부 관리들은 그 돈을 주워 증거를 없애느라 우왕좌왕하는 기막힌 일도 있었다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오늘날 노동부 장관인 노동청장 이승택은 전태일 열사 장례식의 호상을 맡아 장례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전태일 열사의 빈소에서 영세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주일 유급휴가 실시,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 실시(잔업수당 확보), 정기 건강진단 실시, 생리휴가 실시, 이중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 조항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이 땅 노동자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로 인해 노동조건이 개선될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장례를 치룬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2월 평화시장의 사장들은 건물옥상에 설치한 플랜카드를 철거하는 등 다시 착취자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맞서 열사의 어머님과 청피노조 지부임원들은 ‘노조사수’, ‘노동교실 사수’를 위한 집단분신 각오 투쟁 등을 전개하며 유신치하에서 노동자의 기본권 확보를 위해 험난한 투쟁을 전개합니다.


리고 1980년 봄에는 11일간의 선도투쟁으로 임금 29%의 인상을 얻어내며 전체 노동조합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만 곧이어 광주시민들을 피로 진압하고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청피노조는 폭력적 탄압을 받았고 1981년 1월 해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청피노조해산 이후 청피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 취업마저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집니다. 공식적인 취업이 불가능해진 청피노조원들은 이제 비합법적인 방식을 통해 노조운동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재취업 운동’을 통해 현장으로 들어간 노동자들은 1985년 ‘구로 연대투쟁’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청피노조 합법성쟁취를 위한 투쟁을 통해 ‘노동자․학생 연대투쟁의 전형’을 만들어 내며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군사정권에 맞서 멈추지 않고 투쟁을 전개였고,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1988년 5월 들어 마침내 합법노조를 쟁취하게 됩니다. 청피노동자들의 불굴의 투쟁 의지는 노동자답게 싸우다간 전태일 열사의 정신에 있듯이 ‘평등․평화․자유’ 세상을 위해 맞서 싸우는 에너지로서 노래 ‘불나비’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태일 열사가 외친 ‘근로기준법’은 1953년 4월 15일에 만들어졌습니다. 1953년은 ‘6․25전쟁’으로 인해 노동운동이 있었을까싶지만, 노동운동의 잠복기라고 생각되는 이 시기에도 물가폭등에 의한 ‘자연발생적’ 투쟁이 피난지인 부산을 중심으로 발생했습니다. 그 대표적 쟁의가 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까지 진행 된‘조선방직노동자들의 투쟁’입니다. 조선방직은 6·25전쟁으로 인해 전국의 방직공장이 파괴되어 조업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 국내 방직물의 대부분을 생산한 공장으로 1951년 한해 6천여 명의 직원과 85억의 수익을 내는 거대 회사였습니다. ‘조선방직쟁의'의 출발은 귀속재산기업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인 강일매 사장이 임명되면서 일제 식민치하 태평양 전쟁 시에도 여성노동자의 보건을 위해 지급되던 위생대 지급이 중단되고, 강일매사장의 하수인들이 대거 채용되어 노조를 장악하고 장기근속자의 해고와 임금인상액을 지급하지 않는 등 반노조정책으로 일관하는 사장에 맞서 분노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방어 차원의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찰과, 정부, 그리고 사측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1천여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으며 6백여 명의 노동자가 부상을 입었으며, 5백여 명의 노동자가 자진 퇴사하는 처절한 쟁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방직여공들의 투쟁은 아무런 법적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본에 의해 일방적 탄압만 받는 비참한 노동현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지배체제 일각의 반성을 끌어내 노동자들에 대한 ’방어입법'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 노동조합법 제정을 시작으로(1953년 1월 23일) 노동위원회법(1월 27일), 노동쟁의 조정법(1월 30일), 근로기준법(4월 15일)이 제정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노동관계 4법’은 전쟁기간에도 멈추지 않고 싸운 6천여 '조선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의 결과라며 일본인연구자 나까오 미찌고(中尾美知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시기 노동자들의 처절한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급박하게 노동 관련법을 제정하다보니, 법제정기술상 요구되는 충분한 기초연구․조사를 거치지 못한 채 맥아더 군정 하에 제정된 일본노동관계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노동관계법‘을 제정하였기 때문에 이후 법 해석과 법 집행 상에 많은 혼란을 초래하는 근거가 되었다 합니다(이대 법학과 교수 신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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