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 4월-이러쿵저러쿵] "나를 잊지 마세요."

“나를 잊지 마세요.”



한노보연 선전위원 타래




얼마 전 이사를 했다. 2~3년에 한번 씩 옮겨 다니느라 여기 저기 깨지고 삐걱거리는, 성치 않은 살림들을 대충 쑤셔 넣고 나니, 금세 묵은 체취가 스미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기어이 ‘기어들어가게 되는’ 내 집이 됐다. 물론 수명이 짧은 자잘한 살림들은 반 넘어 버렸다. 아깝진 않다. 지구의 어느 구석에선가 뚝딱뚝딱 만들어진 저렴한 물건들은 세입자의 계약기간 2년과 딱 맞춰 사망하신다.


초라한 살림을 넣고 나니 새로울 것도 없는 집을 슬슬 둘러보다가 거실 창밖, 맞은 편 고시원에 사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두어 평 남짓, 고시원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방마다 나있는 촘촘한 창문들이 내가 사는 다세대주택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서로 내키지 않는 풍경일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커튼을 검색해보니, 헉! 비싸다. 능숙하게 낮은 가격 순으로 다시 정렬해 본다. 후훗! 3만 원대 샤방샤방한 커튼이 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길래 이토록 싼 걸까. 살펴보니 중국에서 만든 비스코스 레이온 커튼이다. 초저렴 레이온 커튼이 중국 어디선가 맹독가스를 뿜으며 사람들을 툭툭 쓰러뜨리며 뚝딱뚝딱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름이 쭉 돋지만 잠깐 망설여 본다. 커튼을 포기하고 나의 빈곤한 라이프스타일을 마주보는, 역시나 빈곤한 사람들에게 그대로 오픈할 것인가. 이런 건 숨기는 게 낫고 안 보는 게 낫다는 결론을 얻는다. 보여주기도 싫고 안보니만도 못한 모습은 꼭꼭 가려 버리자. 멈칫했던 손길은 장바구니를 클릭한다.


작년 약정기간에 맞춰 사망한 휴대폰을 기회다 싶어 휙 던져버리고, 아이폰을 2년 약정 무료라는 -2년 동안 궁시렁 거렸던 걸 까맣게 잊고- 기막힌 마케팅을 또다시(!) 찬양하며 마련했었다. 팍스콘 노동자들이 줄줄이 옥상에서 뛰어 내린 사실을 두 눈 질끈 감고서. 그러지 않고서야 작은 새가슴에 멍든 양심으로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갈까싶다. 폐수 옆에 뻔뻔스럽게도 시퍼렇게 살고 있는 잡초마냥 참으로 저렴했던 노동자의 목숨이 매장된 물건들을 사들인다.


그러나... 구부려지지 않는, 툭툭 불거진 손가락이 매만지고, 각혈이 튀고, 초점 없이 졸린 눈이 머물던 물건들... 건강과 목숨이 아로 새겨진, 완연한 핏빛을, 새가슴 추스르고 들여다봐야 한다. 너무 빨리 망가져 버리고 고장나버리곤 하는 노동자들의 불편한 몸을, 너무 빨리 죽어버리는 쓸쓸한 목숨을 기억해야 한다. 문득 온 세상 원한에 찬 목소리들이 들리는 듯하다. 4월의 아우성, 볕 좋은 4월 봄날, 그늘에 그을려 온 세상이 우중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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