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 4월-최도은이 쓰는 이달의 노래] 진달래

진달래




민중가수 최 도 은



1절.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 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2절.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에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조 시, 한태근 곡 )




‘진달래’의 작곡가 한태근 선생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요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꼬부랑 넘어 가고 있네”로 시작 하는 ‘꼬부랑 할머니’를 작곡하신 분입니다. 1928년 밀양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태근 선생님은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 출신입니다. 이 학교는 시인 윤동주님과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기독시민운동의 선구자인 강원룡 목사님이 다닌 곳이기도 합니다. 한태근 선생님의 이름 석 자가 지난 40여 년간 민중가요 책에 새겨진 배경에는 만주에서 선생님과 이웃으로 살던 열한 살 위의 강원룡 목사님과의 만남이 인연의 출발과 끝이라고 생각 됩니다.


한태근 선생님은 평생을 학교 음악선생으로 사셨고 퇴임 이후에는 여든이 넘으신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맹렬히 교회음악을 위해 헌신 하시고 계신분입니다. 2006년 가수 안치환이 라는 음반을 발표할 때 이 노래를 앨범에 수록했는데, 한태근 선생님은 안치환의 음반을 듣고 노래들이 너무 과격하다며 이런 음반에 자신의 노래를 담을 수 없다며 크게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화는 선생님이 교육자의 신분으로서 제자들이 4·19에 쓰러져 간 가슴 아픈 심정을 담은 노래를 만드시기는 하였지만,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몬 정권에 대한 저항, 그리고 독재 권력의 부당함과 시대의 저항 정신을 담은 노래에는 반대 하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한마디로 한태근 선생님은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분이 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분이 만든 노래가 ‘4·19를 담은 사월의 노래’로 대표되는 걸까요? 그 배경에는 강원룡 목사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965년 ‘독일산업선교회’의 후원으로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만든 강원룡 목사님은 우리사회에 기독교 문화 전파와 노동, 농민, 여성, 청년 운동에 대한 중간활동가 양성을 통해 우리사회 기독시민운동의 대부로서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이 노래는 강원룡 목사님이 주도 해 만든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한 부속 모임인 ‘시곡(詩曲)동인회’를 통해서 1973년에 발표 되었습니다. 강원룡 목사님은 이 노래를 듣고는 창작자인 한태근 선생님에게 매우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 노래는 우리사회 민중가요 모음집의 고전인 ‘크리스천 아카데미 노래 모음집-내일의 노래’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노래모음집’은 우리나라 민중가요책의 고전중의 고전입니다. 이 노래모음집은 6.25 전쟁 이후 지금까지 전해 오는 최초의 민중가요책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책을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김문환(서울대 미학과 교수)과 김민기가 있습니다. 이들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의 활동이 70년대 민중가요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이 70년대 민중가요 운동의 출발점이 되어 이후 학생운동권 가요의 정석으로 자리 하게 됩니다. 특히나 이들의 출신 학교인 서울대에서 1977년에 만들어진 노래패 ‘메아리’를 통해 이들이 선곡한 노래는 운동권 가요의 교과서처럼 되었습니다. 이후 이 노래들은 대학사회에 급속도로 확산 되어 노래운동의 성장에 뿌리와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2011년 오늘 대학가에서는 민중가요 노래패가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습니다만, 지난 40년간 학생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고, 자양분이기도 했던 대학 내 민중가요노래패의 출발과 태동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도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만들어진 노래책이 근원적 자료를 제공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노래는 뜻하지 않게 4월을 대표 하는 노래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살아 불리고 있습니다.


노래 ‘진달래’의 노랫말은 친일 문학인으로 대표되는 청마 유치환에게 20여 년 간 5,000여 통의 사랑의 편지를 받은 여류시인 이영도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는 싯구인 “사랑하였기에 나는 진정 행복 하였네라"의 주인공이 ‘진달래’라는 시를 남긴 이영도 시인입니다. 이영도 시인은 한태근 선생님과 누나의 고향친구라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내셨기 때문에 시인의 시를 접할 수 있었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 4·19 당시 민주주의를 외치며 광화문으로 달려가 목숨을 잃었던 균일고 제자들이 생각나 ‘진달래’란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합니다.


이영도 시인은 통영여중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윤이상 선생님, 그리고 유치환과도 함께 근무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태근 선생님에게 음악선생으로 진출할 기틀을 마련 해 주신 분 또한 윤이상 선생님이시라 합니다. 해방 이후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중등음악교원양성소’에서 윤이상 선생님을 만나 음악선생으로서의 자질을 훈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사가 참 복잡합니다. 노래 <진달래>라는 한 곡을 정리 하는데도, 많은 사건을 떠 올려야 하고, 또 그 속에 얽힌 사람들의 관계도 어쩜 이리 복잡한지..... 동백림 사건의 간첩으로 몰렸던 윤이상 선생님도 나오시고, 친일 문학인 유치환도 나오고, 유신시절 반독재의 상징이었던 크리스천 아카데미도 나오고,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원장이었던 강원룡 목사님도 나오고, 강원룡 목사님을 생각하다보면 더욱 복잡 해 지는데.... 강원룡 목사님을 찾아와 큰절을 올렸다는 전두환의 일화와 1987년 6월 민주화의 항쟁의 열매를 앗아간 김영삼 정부의 손을 들어준 얘기며..... 하여간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한국의 근현대사와 인물사를 보게 되는 것 같아 씁쓸한 맘을 금할 수 없습니다만, 어쨌건 노래 ‘진달래’와 관련해 이렇게 실타래처럼 엉킨 현대사를 다 이야기하기에는 제 글재주가 너무 부족하기에 다음 기회에 좀 더 시간을 두고 이 부분에 대해서 정리를 하기로 하고, 4월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이후 12년간의 장기 집권을 한 이승만 대통령은 여든 다섯 이라는 고령 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960년 3․15정부통령 선거에 이르러 종신집권을 계획하며 엄청난 부정 선거를 진행합니다. 상대 운동원인 민주당원의 살해와 선거전 4할에 이르는 사전투표, 선거 당일 <3·5·9인조의 반공개 투표>와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집권을 위해 온갖 종류의 부정 선거를 저질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고 분노에 치를 떤 3·15 부정선거를 두고 투표 다음날인 3월 16일 중앙선관위는 ‘3․15선거’가 94.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고 밝히고 이승만 대통령의 4선 당선을 발표 하게 됩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부정협잡 폭력선거’로 국민의 선거권을 박탈한 3․15부정선거에 대한 분노가 마산을 중심으로 격렬히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정부당국은 3월 17일부터 22일까지 마산시의 중고생의 등교저지 조치를 내려 시위를 잠재웁니다.


그러나 4월 11일 지난 3월 ‘마산사건’ 시위에서 피살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17세)군의 사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김주열군의 사체 인양을 기점으로 마산시민들의 시위가 다시 폭발하게 됩니다. 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피의 항쟁’은 “마산동포 구출하자!” “경찰은 정의의 불을 끄지 말라!” “3․15선거 다시하라!” “마산학생사건 규명하라!” “삼인조 구인조 반대한다!” “학도는 살아있다 시민은 안심하라!” “협잡선거 물리치고 공명선거 다시하자!” 등의 구호와 함께 다시금 전국으로 확산되게 됩니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1960년 4월 19일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 대는 경찰의 총격 난사에 의해 초등·중등·고등·대학생에 이르는 어린 청년 학생 183명이 목숨을 잃었고, 6,200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4·19의 내용인 것입니다. 수많은 청년들의 죽음을 딛고 1주일 후인 4월 25일 ‘학생들의 피에 답하라’는 전국교수들의 거리시위까지 일어나자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표명하고 5월 29일 하와이 망명으로 12년간의 장기집권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1950년대 매해 40여개에 이르던 자연발생적 노동쟁의는 4·19혁명 이후 220여개로 급격하게 확대되었고 ‘전 산업에 걸쳐 전문직, 지식인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이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노동운동이 자유당의 꼭두각시로 정치도구화 되어선 안 된다는 기치아래 1959년 김말룡 위원장이 중심이 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만들어져 4·19혁명 이후 노동자의 복지와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1960년 5월 부산택시 총파업, 교원노조결성, 6월 연합신문노조결성, 7월 은행노조연합회결성, 8월 한국철도기관차노조결성 등의 노조결성투쟁과 11월 부산버스 무기한 파업, 부산부두노동자 파업, 12월 코스코 노조 파업, 미군노조원 시위 등 노조민주화투쟁과 임금인상투쟁이 4월 혁명기 노동운동으로 전해집니다.
4․19혁명을 통해 등장한 ‘장면 민주당 정부’는 10개월의 집권기간 동안 해방이후 정리하지 못한 민족적 과제를 제시하며 민중의 생존권 확보와 민족통일의 대의를 중심으로 집권을 합니다. 1960년 5월 11일 거창학살사건 피해 유가족들은 1951년 전쟁당시 양민 700여명을 학살하는 데 앞장선 신원면 면장 박영보를 생화장하는 등 6·25전쟁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자 가족들의 원성과 항의가 전국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긴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정권을 잡은 민주당 간부들은 부정축재자들로부터 수 십 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는 등 그들의 계급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파렴치한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이로써 4월 학생들의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는 커다란 상처를 받았고 이러한 틈을 타고 보수세력과 결탁한 군부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그 결과로 ‘장면 민주당 정부’는 해방이후의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4월이 되면 기억 했던 노래 ‘진달래’ 해마다 4월이 오면 기억했던 4·19 산천에 피고 지는 진달래를 바라보며, 총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떨쳐 일어섰던 어린 넋의 죽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그 숭고한 죽음의 대가를 고스란히 군부독재의 손아귀에 내어 준 기성세대를 비토 하며 불렀던 그 4월이 올해도 왔건만, 4월의 청년들은 도서관으로 학원으로 가고 없고, 기성세대는 물질에 이간질 되어 사분오열되어 있는 오늘을 바라보며 뼈아픈 4월의 노래 ‘진달래’를 조용히 읊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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