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11년 5월- 일터다시보기] 다시 읽어야 할 일터 그리고 지금의 나

다시 읽어야 할 일터
그리고 지금의 나
한노보연 회원 배 영 희

점잖은 홍석형 문자가 또 띠리리릭 울린다. 이제는 정말 쫓기듯이 뭐라도 써서 드려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2011년 2월과 4월 일터 두 권을 들고 계속 뒤적뒤적 거리고만 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 저녁에도 그랬다. 대단히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쓸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좀처럼 무엇을 쓰는 것이 좋을지 내용잡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이상하다. 내가 원고를 새로 쓰는 것도 아니고 쓰여져 있는 내용을 읽고 소감을 쓰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무엇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예 「일터 다시보기」를 쓰는 나의 태도에 대해 써보자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솔직한 나의 마음과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현재 지역아동센터 초등학교 놀토(노는 토요일) 프로그램으로 전래놀이를 가르치고 아이들과 함께 노는, 강사활동을 하고 있다. 대부분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이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한 두 번 아이들과 놀다보면 아이들이 어떠한 환경에 처해있는지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이 초등학교 1~4학년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고학년 아이들은 요즘 유행같은 1:1학습 멘토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놀기 어렵다) 그나마 스스로의 모습을 아직은 감추려 하지 않고, 나도 그러한 모습을 아이들의 고정된 성격으로 보려하지 않는다. 아직은 작은 이 아이들의 삶속에 어떤 고단함이 있어 이렇게 마음이 삐쭉삐쭉 튀어나오려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과 똑같이 논다. 그렇게 놀면 아이들이 나를 본인들과 똑같이 취급해 마음이 열리는 편이다.
놀이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구겨져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얼굴을 피는데 참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신나게 제대로 뛰어놀고 나면 어둡고 꼬깃꼬깃했던 아이들 얼굴이 반짝반짝 펴진다. 그리고 여러 놀이 중에 뭐 하나라도 자신 있는 놀이가 걸리면 아이들은 기세등등해져 그야말로 나를 만나는(실은 자신감 있는 스스로를 확인하는 시간일테지만) 시간을 기다려준다. 하지만 언제나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기다린다. 놀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언제든지 오라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전해준다. 때로는 반항을 하고 친구를 건드리고 심지어는 문을 발로 차거나 나에게 징징거리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내가 너랑 함께 놀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래서 네가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그 아이들이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함께 놀기가 아이의 마음열기가 조금은 수월해지고 이런 저런 것 없이 아이도 놀이에 빠져들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놀이에 참여할 때 태도와 표정은 그때그때 다른데 학교와 가정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구로지역은 다문화 가정이 많고 그 다문화 가정은 한 부모 가정이 많거나 조손가정이 많고 또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일용직이고 이러한 환경이 반복되어 있다. 아이들은 센타에서 숙제를 마치고 저녁까지 먹고 귀가한다. 토요일에 학교에 나오는 친구들은 대부분 아침을 먹지 못하고, 수업이 끝나고 귀가해도 점심을 먹지 못하는 일이 많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살얼음 같은 부모들은 불안하고 고된 노동으로도 살기에도 벅찬 비용을 지불하고 매일저녁과 주말에 아이들과 마주보기가 너무나 피곤한 불안정노동자들이다. 구로동, 가리봉동 이 일대에는 그런 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아이들에게도 그러한 삶이 너무나 익숙하다. 각자 알아서 센터에 가서 끼니를 해결하고 시간을 보내고 게임을 하며 중학생이 되면 몰려다니며 삥을 뜯는....물론 모두가 그렇지 않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문제있는 삶이 아니라 그냥 사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삶이란 이런 것이다. 아주 작은 지네들끼리 속에서도 힘에 의한 우열이 있고 힘없는 사람은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꼬봉, 그것도 못 들면 그냥 제낀다. 놀면서도 그런다. “선생님, 저 애가 뭘하겠어요”
이 아이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정직하고 착한 민중에겐 언젠간 좋을 날이 올 것이라고 내가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삶이란 가진 자, 힘 있는 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아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준 적 없고 가정에서는 폭력과 방치를 반복하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운동사회도 다를 바 없다.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본. 많은 패배감 속에 지쳐있는 우리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뭘 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너도 무엇인가는 잘 할 수 있어”, “너와 함께 놀면 재미있을 것 같아”라고 이야기 하면서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놀이에 빠져 시공간을 장악해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것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무엇인가를 시작해가는 ‘힘’이 모아질 수 있길 간절히 바래어본다.
「일터 다시보기」의 느낌도 그렇다. 2년 전 쯤의 나는 일터 읽기가 재미있었다. 연구소에 있을 때보다 일터를 더 꼼꼼히 볼 수 있었고, 그래서 그때에는 내 이웃과 연관된 글을 보고 언능 써내려갈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일터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게 한 일 년 반은 넘은 것 같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무엇을 해야할지 두리번 거리고 있는 그 동안 내 머릿속에는 너무 많은 생각들이 자리잡게 되었고, 일터 그리고 연구소 활동도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기를 하면서, 계속 버티고 있는(아니죠?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고 해야하는거죠?) 연구소 그리고 여러 활동가들이 참 고맙고 그 힘이 모여 다시 한번 힘센 싸움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다. 우리는 다 깨어져 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 하나 싸움들은 그 다음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잃지 않게 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럼 나는? 나는 현재에는 ‘여성’ ‘페미니즘’ 그리고 ‘놀이’를 중심에 놓고 고민을 해가고 있다. 회비도 밀리고 활동도 못하고 있는 연구소는 어찌해야하는지 사실 고민스러워 하고도 있는데 꼭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하는가 하면서 매일 들여다보기만 하고 있다. ‘어디선가 반드시 만날 곳이 있을텐데...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86권을 들고 깨작깨작 거렸던 몇 줄을 남겨보려고 한다. 어쩐지 내 마음에 자꾸만 남아서 말이다. 이번 기회로 일터를 다시 읽고 연구소에 있었던 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는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것은 다음에 또 이야기 하련다. 자, 그럼 아래 글을 끝으로 「읽터 다시보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항상 그곳에 있는 사람들 (일터 86호, 「사진으로 보는 세상」‘현대차비정규직지회 이상수 지회장 단식농성’) “투쟁하지 않는, 못하는 이들은 그가 늦게 깨치고 늦게 나서는 것 뿐이에요.”
* 내 삶의 주체는 바로 나 (일터 86호 「특집」‘모든 이들은 더 건강하고 더 안전하고 더 편해야 한다’) “산재를 직접 당한 당사자를 조직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 역발상 (일터 86호 「일터 다시보기」) “주 66시간 일하면서도 기백만원 받는 이유가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적은 노동자라는 점인데 사실은 밤 지새운다는 점으로도 건강을 해지는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제 건강을 ‘잘못된 근거’로 얼마나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는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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