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 역시 '개혁'의 마력을 보여준 일본 선거

1. 극명하게 드러난 부르주아 의회정치의 백치현상 -


지난 9월 11일의 중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압승한 것을 가리켜 “일본정치의 후진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준 사건”이라는 평가가 있다.

선거 결과를 요약하자면, 총의석 480 중에 자민당 296석(해산 전엔 249), 연립 공명당 31석(해산 전 34), ‘제1야당’이라는 민주당 113석(해산 전 175), 공산당 9석(해산 전 9), 사민당 7석(구 ‘사회당’으로 해산 전 6) 등등이다. 관행화된 뇌물과 금권정치, 파벌정치, 족벌세습정치 등등으로 기왕에도 그 정치적 후진성을 눈총 받아 온 터에, ‘개혁’이란 구호와 인기연예인들―국내에서 ‘우정사업민영화’ 반대파를 겨냥한 ‘고이즈미의 자객들’로 보도된 사람들로서, 실제 직업이 연예인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른바 ‘전문직 후보들’ 역시 사실상 ‘인기연예인’이기는 매 한가지였다―을 내세운 고이즈미의 한마당 정치쇼에 몰표를 몰아주면서, 연립 공명당의 31석을 더하면 개헌선(320석)을 훌쩍 넘기는 압승을 안겨주었으니, ‘일본의 국민된 자’ 치고 생각이 있다면, 그러한 평가에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튼 노동자․민중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공산․사민 양당의 의석은 합해봐야 고작 전체 의석의 3% 남짓인 16석에 불과하다. 각 정당의 실제 득표율과 의석수 간의 심한 불균형을 특징으로 하는 ‘소선구제’ 등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튼 더욱 면목이 없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우리 자신도 결코 일본정치를 손가락질 할 입장이 못 된다. 경위야 어떻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등등과 같은 파쇼․민중학살자들에게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헌상해온 것이 바로 우리 정치사의 한 모습이다. 십분 양보해서, 극단적인 폭력이 지배한 파쇼 하에서의 전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교묘하게 기획․연출된 ‘탄핵정국’에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댄 작년의 국회의원 총선만 해도 ‘한국의 국민된 자’ 치고 천연덕스럽게 ‘일본정치의 후진성’ 운운할 처지에 있지 않은 것이다.

다른 신문도 아니고 지난해 이른바 ‘탄핵정국’에서 “탄핵무효”․“탄핵반대”의 정치적 광기를 선도하여 총선에서의 열린우리당의 압승에 단단히 한몫을 했던 바로 그 ꡔ한겨레ꡕ(2005. 9. 12.) 신문이 이번 일본의 선거를 “한 편의 사무라이 극”으로 묘사하면서 “고이즈미 (수상의) ‘이미지 정치’(가) 젊은층에 먹혔다”는 평가를 했지만, 생각해보면, 흥미롭기(?)조차 하다.

지난해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나 금년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이나, 한편은 ‘탄핵’을 유도하고 또 한편은 부결될 게 뻔한 우정민영화 표결을 의회 해산과 연계시켜 극적인 정치적 상황을 조성한 후, 기왕에 획득했던 ‘개혁’ 이미지를 극대화시켜 이른바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를 연출해내면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는 수법의 유사성이 말이다. 그리고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은 그 ‘개혁’이란 것이 양쪽 다 알고 보면 극히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따라서 반대중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점도 말이다.

물론, 흥미로운 유사․공통점만 있는 게 아니다. 흥미로운 차이점도 있다.

일본의 독점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하에 있는 대중은, 전통적인 투표양태에 따라, 필시 자민당을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독점자본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하에 있는 대중은 노무현 정권이야말로 사실은 보다 유연하고, 따라서 대중적 저항에 다소라도 정치적으로 강하고 보다 유능한, 자신들의 호위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파쇼에 대한 완고한 향수에서 한나라당을 찍었다.

진보․좌파, 혹은 그를 자임하는 세력의 움직임의 차이는 더욱 흥미롭다.

나는 진보․좌파나 그를 자임하는 세력들이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이나 ‘개혁 고이즈미’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의 진보․좌파를 자임하는 세력들은, 이른바 시민운동단체들에서부터 민주화운동교수협의회, 교수노조, 나아가 민주노총 지도부까지, 민주노동당이나 ‘다함께’와 같은 정치조직에서부터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맑스주의 교수’까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개혁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그것도 열렬히! ― 그리고 그들은, 그리고 그들을 지지한 패거리들은 오늘도 ‘좌파'의 깃발을 들고 신자유주의 반대, 이라크 철군,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니, ‘민중소환제’니 하면서 ‘노무현 탄핵’을 부정직한 방식으로 규탄하던 자들도, 그리하여 결국 노무현을 지지하던 자들도 물론 언제 그랬더냐 싶게 더 이상 ‘소환제’를 얘기하지 않고, 대신에 신자유주의 반대, 이라크 철군 등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 후진성'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만의 현상, 혹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후진국’이라는 딱지가 붙은 국가․사회에서만의 현상인 것일까?

아니다.

대중의 직접적 정치행동․정치투쟁이 활성화되는 대신에 부르주아 의회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백치현상이다. 경제적 선진국일 뿐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선진국이라는 서유럽 국가들이나 북미 국가들의 대중이 보여주는 정치적 행태․행보를 보라! 그곳 역시 정권은 독점자본의 정당의 수중에, 즉 보수당․자민당․공화당․민주당 등으로 통칭되는 명실상부한 독점자본가 당이나 사민당․사회당 등 노동자계급의 정당임을 자칭하는 독점자본가 당의 수중에 있다.

이번 일본의 총선은 단지 그러한 백치현상을 과도하고 극명하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2. 개혁 대 반개혁?


지난해 우리 사회에서의 ‘탄핵정국’ 회오리에서처럼 이번 일본의 총선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도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어떻게 소부르주아화된 대중을 휘어잡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ꡔ한겨레ꡕ의 박중언 도쿄 특파원은, 위에 언급한 기사에서, 이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참의원에서 우정민영화 법안이 부결된 후 중의원을 해산했을 때: 인용자]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고 압도적 승리를 낳은 고이즈미식 선거전술의 요체는 ‘이미지 정치’다. 개혁의 알맹이가 아니라 기득권층과의 투쟁 이미지만으로 개혁파의 지위를 독점하는 수법이다. 고이즈미가 ‘올인’한 우정 민영화는 국민들의 관심도에서 낮은 순위에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우정 민영화를 개혁의 상징으로 탈바꿈시켰다. 반대파에 저항세력이란 딱지를 붙여 ‘개혁 대 반개혁’ 구도를 연출해냈다.

타고난 승부사 = 고이즈미식 이미지 정치의 바탕에는 표심을 읽어내는 뛰어난 능력과 돌파력, 치밀한 사전계획이 자리잡고 있다. 자민당 인사들이 ‘분열선거는 필패’라며 거듭 만류했지만 고이즈미가 주저 없이 중의원 해산이란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개혁 퍼포먼스’가 먹혀들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특히 과감한 개혁은 원하지만 복잡한 사고는 싫어하는 대도시 젊은층의 눈높이에 맞춰 ‘우정 민영화 찬반’이라는 단순명쾌한 양자택일로 접근했다.

유권자들의 호응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청중이 몇 천 명씩 몰리고, 그의 모습을 카메라폰으로 찍어대는 등 2001년의 고이즈미 열풍이 재현됐다. ...

이번 선거의 흥미를 한층 더해준 ‘반대파 죽이기’는 그의 탁월한 선거감각과 뚝심을 잘 보여준다. 고이즈미가 대항후보 전원 공천을 강행한 것은 기득권 세력과 전면 투쟁한다는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특히 ‘여성 자객단’ 투입은 고이즈미가 아니면 생각해내기 어려운 ‘깜짝쇼’다. 중의원이 해산되기 무섭게 고이즈미가 지명도 높은 전문직 여성 후보들을 직접 만나 출마를 설득한 것은 일찍부터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다는 방증이다. ...


결국 “압도적 승리를 낳은 고이즈미식 선거전술의 요체는 ‘이미지 정치’”이며, “개혁의 알맹이가 아니라 기득권층과의 투쟁 이미지만으로 개혁파의 지위를 독점하는 수법”이고, “반대파에 저항세력이란 딱지를 붙여 ‘개혁 대 반개혁’ 구도를 연출해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식’을 ‘노무현식’으로만 바꾼다면, 이른바 ‘탄핵정국’을 기획․연출하여 총선에서 압승하게 되는 지난해 봄의 한국의 정치상황과 과정을 얘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거기에는 ‘개혁’의 이미지로 무장한, 주인공이자 기획․연출자, 즉 노련하고 교활한 승부사가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척결되어야 할 '반개혁 세력'이 있고, 주인공을 호위하는 정의의 어릿광대 무사들이 있다. (이들 어릿광대 무사의 역할을 일본에서는 “지명도 높은 전문직 여성 후보들”이 맡았다면, 지난해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386’ 혹은 ‘민주투사’라는 어릿광대들이 맡았다. 일본의 “지명도 높은 전문직 여성 후보들”이 그저 정치적으로 단순한 인기연예인에 가깝다면, 한국의 ‘386’ 혹은 민주투사라는 어릿광대들은 망월동이나 모란묘원에 누워 있는 희생을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전유하면서 탐욕과 출세욕을 실현해가고 있는 정치적 야심가들이라는 차이가 있다.)

무대는 웬만하면 흥행에 실패하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판이다. “치밀한 사전계획” 혹은 치밀하게 짜여진 씨나리오에 등장인물들은, 여와 야를 막론하고, 물론 자신의 배역을 훌륭히 연기하는 일류들이다. 쟁점의 계급적 본질을 호도․은폐하면서 역시 ‘개혁파 대 반개혁파’로 나뉘어 번쩍번쩍 요란스럽게 창․칼을 부딪치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조명․효과음도 더없이 그만이다. 게다가 관객마저 “과감한 개혁은 원하지만 복잡한 사고는 싫어하는 대도시 젊은층”이니, 이 어릿광대극, ‘개혁 퍼포먼스’가 대박을 터뜨릴 것임은 사실 따논 당상일 터이다.

사실 “과감한 개혁은 원하지만 복잡한 사고는 싫어하는” 관객이라는 규정, 즉 ‘개혁 대 반개혁’이라는, 조금만 더 주체적으로 사고하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정치쇼에 열광하는 대중의 존재상태는 우리에게 심각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번 선거의 쟁점이었다는 ‘우정 민영화’만 해도 그렇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이 그렇듯이, 이 역시 300조 엔 혹은 3000조 원에 가까운 예금 잔고를 가진 일본우정공사를 민영화하려는 프로젝트는 그 목적에서도 그 수법에서도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개혁, 그러니까 전형적인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개혁이다. 그것은 바로 우정공사가 흑자 기조를 유지해온 수익성이 있는 사업체로서, 이 때문에 엄청난 과잉축적․과잉생산으로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투기적 금융자본으로 부유하고 있는 독점자본의 신규 투자처로서 이를 사유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러한 자본의 탐욕을 '개혁'이라는 선동으로 포장한 것이다.

게다가 우정공사가 300조 엔이라는 거대한 예금 잔고를 보유하여 일본의 전체 개인적 예금의 30%, 보험시장의 40%를 점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써비스가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편에서는 일본에서도 이미 1920년대부터 경제공황 때마다 파산의 위기에 노출되고 그에 따라 예금 지급이 보장되지 않는 사영(私營) 금융기관들과 달리 예금 원금과 이자에 대한 국가의 지불보증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공사업체로서의 우정공사의 써비스가 도시와 농촌․산간지방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보편적으로 미친 결과일 터이다.

우정공사, 우정사업이 민영화 즉 사유화될 경우 이들 공공성이 위협받고, 결국엔 사라지게 될 것임은 사실상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사유화 과정과 초기단계에서야 대중의 저항을 고려하여 다소간 ‘공공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여러 법률적 제약․규제가 가해지겠지만, 자본의 수익활동, 잉여가치 착취활동에 대한 사회적․국가적 '규제의 완화' 혹은 그 철폐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모토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과감한 개혁을 원하는’ 대중이 ‘복잡한 사고’(?)를 조금만 덜 싫어한다면 능히 간파할 수 있는 것들이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과 그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대중은, 그리고, 한국에서의 작년의 예에서 절실히 보는 것처럼, 진보․좌파를 자임하는 일단의 활동가들이나 이데올로그들조차 '개혁'이라는 구호에 영혼을 빼앗기고 열광하면서 자기부정적인,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신자유주의의 집행자들인 고이즈미와 노무현에게 몰표를 몰아주는 정치적 백치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진보․좌파를 자임하는 일단의 활동가들이나 이데올로그들이야 그 계급적 입지가 대부분 소부르주아여서 소부르주아적 무원칙․몰계급성을 극복하지 못한 때문이고, 대중 역시 독점부르주아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간명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지만, 거기에 만족하기에는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고, 너무나 반동적이다.



3. 독점자본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지배, 혹은 백치화


사실, 어떻게 해서 오늘날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극소수의 투쟁하는 활동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거의 대부분이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개혁’이라는 그들의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자 선동에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에 반하여 그토록 열광하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구명(究明)하고 대처하는 일은 노동자계급의 정치학에 주어진 절실한 과제 중의 하나다.

여러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우선 독점자본의 보편화되고 강력해진 대중매체에 의한 이데올로기 조작이라는 측면에서 간단히 접근해보고 싶다.   

독점자본의 대중 이데올로기 조작기구로서의 TV, 신문 등 대중매체에 의한 대중의 우민화는, 주지하는 것처럼, 이미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오랜 주제이다. 이때 지탄의 대상이 되는 대중매체란 이른바 3S, 즉 스크린(Screen), 섹스(Sex), 스포츠(Sports)을 가리켰고, ‘우민화’는 탈정치화(脫政治化)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되면, ‘대안’은 당연히 이들 매체를 통한 정치․경제․사회 문제 등에 대한 보도와 논의의 증대, 정치적 토론 및 담론의 활성화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를 관찰해보면, 대중을 우민화시키고 있는 것은 결코 3S로 불리는 스크린이나 섹스, 스포츠 혹은 각종의 오락이나 연예 프로그램과 같은 소위 '비정치적'인 프로그램이나 기사들만이 아니고, ‘우민화’ 역시 결코 ‘탈정치화’가 아니다. 아니, 독점자본 지배 하의 대중매체에 ‘비정치적인’ 프로그램이나 ‘탈정치화’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그리고 물론 모두가 대중의 자주적․비판적 사고를 마비시켜 정치적으로 무력화․백치화시키거나, 그렇게 무력화․백치화된 사고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함으로써 그들 대중을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복속시키는 방향으로 정치적이다. 3S로 상징되는 소위 '비정치적' 프로그램의 역할이 전자라면, 엄숙하게 이루어지는 논쟁․토론의 역할은 후자이다.

3S로 상징되는 소위 ‘비정치적’ 프로그램의 역할은 너무나 명백하고 또 그간에도 문제가 되어 왔기 때문에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예컨대 일본에서 얼마나 대중의 말초신경에 호소하면서 그들의 이목과 따라서 정신을 사로잡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일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정말 상대적으로만이고, 갈수록 더욱 그렇지만― 아직 도덕적 근엄주의가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1983년이었던가? 벌써 한 20여 년 전에 내 자신이 도쿄에서 겪은 경험을 예로 들자면 이렇다.

낮에는 업무상 만나야 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밤이면 그들 중의 누구와 뒷골목의 선술집에서 낮에 나누지 못한 얘기를 나누고 또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다가 숙소에 돌아와 잠에 곯아떨어지는 게 주머니 얇은 나의 해외여행 패턴이다. 그런데 어느 날 초저녁 시간에 숙소에 돌아오게 되었고, 허실삼아 TV의 스윗치를 돌렸더니 서너 명 남녀가 나란히 서서 요리강좌를 하고 있었다. 말로 하는 설명이야 사실상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요리과정을 실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국의 요리가 궁금하기도 하여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내가 정말 어이없어 놀라기까지는 불과 1․2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볼 때는 정말 ‘말짱’했는데, 출연자 중의 한 여자가 뭐라고 하면서 무언가 재료를 가지러 뒤돌아 가는 모습은 앞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완전히 발가벗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보니까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발가벗은 몸에 앞치마만 두르고 요리강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화면에 붙잡아두기 위해서.

몇 차례 일본을 여행하면서 그보다 더 어이없는 장면도 목격했지만, 너무나 민망스러워서 차마 여기에서 소개할 수가 없다.

요즈음에는 한국에서도 케이블 방송이나 ‘스카이라이프’라는 것이 널리 보급되고 시청률 경쟁이 참으로 치열해지면서 심야에 사실상 가족 아무나 하고는 함께 볼 수 없는 화면을 내보내고 있지만, 내가 일본에서 겪었던 것은 그러한, 말하자면 ‘닫힌 채널’의 심야방송 얘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상파 방송’이라고 부르고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따라서 보다 높은 도덕적 규율이 요구되고 있는 채널의 초저녁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러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결코 도덕적 근엄주의를 설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일찍부터 일본에서 이른바 3S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겠는가를 얘기하려는 것일 뿐이다.

TV나 신문 등에서 토론이니, 대담이니, 시사칼럼이니 하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정치적 담론은, 그것이 대중을 '탈정치화'나 그에 따른 정치적 백치상태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가 큰 만큼, 그만큼 더 대중을, 그리고 그 대중의 '탈정치화'나 '정치적 백치화'를 걱정하는 지식인들을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의 포로, 따라서 그들의 정치적 지배의 포로로 만들고 있다. 서로 정치적 의견․견해를 달리하며 공방을 벌인다는 토론이나 논쟁이란 것이 사실은 동일한 전제, 부르주아 사회를 절대화하는 그러한 전제에 서서의 논쟁이고, 토론이고, 대립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부르주아 정치판, 이데올로기판의 이러한 구성에 상응하는 것이다. 즉, 부르주아 정치판․이데올로기판이 여․야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서 서로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독점자본의 정치적 분파에 불과하고,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집단에 불과한, 그러한 구성 말이다.

일본을 예로 들면, 오늘날 자민당과 공명당이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있고, 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 8월 10일에 고이즈미가 중의원을 해산했을 때 대부분의 언론이 민주당 정권의 등장 가능성을 점치다가 자민당이 압승하니까 짐짓 ‘경악’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설령 민주당이 제1당으로 되어 민주당 정권이 등장했던들 그들이 오늘날 극우로 치닫고 있는 일본사회에 어떤 조그마한 방향선회라도 시도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극우 자민당과 동일한 ‘개헌 소신’을 가진 정치인을 당 대표로 뽑고 있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러한 방향선회는 그 시도 가능성조차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480명 의원 가운데, 대략 보아서, 공산․사민당의 16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전체 의원이 그렇게 동질성을 가진 위에서의 대립이고 투쟁인 것이다.

TV나 신문 등 대중매체에서의 정치적 토론․논쟁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이해의 대변자는 물론 철저하게 배제된다. 형식상 '노동자계급의 대표'가 참여하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단지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이어서, 기껏해야 사민주의자들이고, 충분히 노동귀족화한 노조관료거나 '합법 노동자 정당'의 간부, 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자임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주아 강단이나 연구직을 차고 앉아 그 안락함을 즐기고 있거나 그에 연연해 하는 지식인 나부랑이들, 즉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이다. 그러니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할 리가 없고, 독점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지배는 더욱 강화된다.

상황이 그러한데, TV나 신문지상에서 그들과 그들의 아류가 벌이는 토론․논쟁이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리라 기대하고 있으니, 그렇게 바라는 자 자신까지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포로가 되고, 정치적 백치가 될 수밖에!



4.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독점자본의 대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배 혹은 그 대중의 정치적 백치화에 대해서 간단히 말했지만, 그것이 3S에 의한 것이든, 정치적 담론을 통한 것이든, 이러한 지배 혹은 백치화 방법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사회적 아젠다(agenda) 및 대중의 사고의 아젠다와 사고(思考)의 틀의 독점자본에 의한 장악이다. 그들이 그 아젠다와 사고의 틀을 장악하고 있으니, 대중은 그들이 보여주는 것, 그들이 지시하는 쪽을 바라보고,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이 암시하는 대로 사고하며 지배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저들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저들이 설정하는 아젠다, 저들이 설정하는 사고의 틀을 거부하고 돌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두에 설 수 있고, 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전위이다. 그런데 합법주의적, 의회주의적 노선을 걷는 '노동자계급 정당'의 주요한 특징은 자기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적․정치적 아젠다를 밀고나가는 대신에 저들 독점부르주아지들이 설정한 아젠다에 자신들을 맞춰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제 사고의 틀조차 저들 독점부르주아지가 설정한 그것 속에 갇히게 된다. 혹은, 사고의 틀의 상당 부분이 이미 저들 독점부르주아지의 그것과 공명하고 있기 때문에 합법주의, 부르주아의회주의에 자신들을 내맡기기로 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회․국가에서 이러한 합법주의적․의회주의적 노동자정당이 노동자계급을 대표하고, 그 정치적 성향과 방향을 결정해가게 되면, 혁명적인 노동자 정치는 머지않아 소멸한다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다.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뿐 아니라 일본의 공산당이나 사회당이 그 전형적인 모습․과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도달하는 곳은 서유럽에서처럼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포로로 잡고 있는 독점부르주아지 좌파로서의 사회민주주의이던가, 일본에서처럼 노동자계급 정치의 무력화․왜소화다.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의 지도이념은 이미 오래 전에 '맑스주의'의 그림자까지를 청산하고 케인즈주의로 바뀌었다.

일본의 노동자계급은 그 당의 조직․운영이 철저히 ‘합법주의적’일 뿐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집회․시위의 양태까지도 철저히 시민주의, 즉 합법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예컨대, 폴리스 라인은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선(線․善)으로 되어 있다. 공산당은 아직 맑스주의의 깃발을 놓고 있지 않지만 사실상 사민주의 정당화되어 있다. 사회당은 승승장구할 것처럼 보였던 지난 세기 90년대 초에 정권을 담당하면서 부르주아 정당과 대차(大差) 없음을 노동자 대중에게 입증함으로써 해체의 운명을 맞아야 했고, 이제 사민당이라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서 간혹 ‘탈시민주의적 실천’(?)이 이루어지지만, 이는, ‘우찌게바’(內ゲバ) 즉 내부폭력이라고 해서 트로츠키주의자들 내부의, 때로는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폭력적 종파투쟁이어서, 노동자계급의 아젠다 장악에 기여하기보다는 거꾸로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를 불러오면서 그 아젠다 장악을 더 어렵게 만드는 행위들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운동에서 내부의 사상․이념․이론적 투쟁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적어도 거대한 힘을 가진 부르주아지와 대중을 두고 대적하는 동안만이라도, 그야말로 사상․이념․이론적으로 수행되어야지 일본의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벌이는 식으로 살벌한 폭력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부르주아지 및 그 국가권력과의 ‘소토게바’(外ゲバ) 즉 외부폭력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그 반대이다. 대표적인 두 노동자계급 정당의 활동은 철저히 의회주의적이고, 합법주의적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러면, 열려 있는 합법공간을 내팽개치라는 얘기냐”, “러시아의 볼쉐비키도 의회에 진출하고, 의회를 이용하지 않았느냐”, “하물며, 시대와 조건이 달라지지 않았느냐”는 항변이 필시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소환주의와의 투쟁에 못지않은 청산주의와의 강고한 투쟁을 통해서만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시대와 조건이 달라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언제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과제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지만, 그것이 ‘변하고 있는 현실’ 혹은 ‘변해 있는 현실’이라는 것 속에 변하지 않고 있는 그 무엇인가까지를 묻어버리려는 주장이 될 때, 그것은 강변이며, 기회주의자들의 깃발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일본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후하(不破哲三)는 일찍부터 ≪역사에 거스르는 흐름에 미래 없다≫는 글로 쏘련 및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형식을 빌어 부르주아 의회주의로의 일본공산당의 노선전환을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지만, 이야말로 전형적인 청산주의, 아니 기왕에 밟아온 청산주의의 심화․완성이고, 일본공산당의 오늘날의 사민주의적 정당으로의 전락, 참담한 무력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본공산당 내외의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현재의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좌절하는 대신에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말 분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의 좌익운동의 오랜 전통과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 그 자체가 그러한 투쟁을 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제넘게 한마디 한다면, 조직과 운동 방식에서 의회주의뿐 아니라 합법주의 그 자체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오랜 합법주의를 거부하고 여러 형태의 소토게바를 벌인다면, 당연히 사회와 노동자 대중의, 따라서 그들의 사고의 아젠다를 재장악해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0년대 말부터 강제된 극악무도한 파쇼 지배, 그 지배 하에서의 좌익운동의 몰살 때문에 한국의 노동운동․민중운동의 사상․이념․이론적 깊이는 일본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강고한 파쇼 지배를 뚫고 힘차게 회생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아직은 상당한 활력을 유지하고 있다.

운동이 아직은 내부의 합법주의․의회주의․청산주의와의 투쟁을 전개해가면서도 우찌게바보다는 소토게바를 벌여나가고 있기 때문이고, 그를 통해서 사회와 노동자 대중의 아젠다를 철저히는 잃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의 이러한 경험, 특히 지난 80년대 이래의 경험이 일본의 노동운동 활동가 동지들에게 작은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일본의 사태 진행은 역시 합법주의․의회주의로 경도돼가고 있는 한국의 일부 활동가들에게 경종이 되었으면 한다. ≪노사과연≫



정세

역시 ‘개혁’의 마력을 보여준 일본 선거



채만수 | 소장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6호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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