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중증장애인의 생존권, 활동보조 제도화 투쟁





들어가며






들어가며







비바람과 추위, 폭력경찰의 침탈을 이겨낸 3월 20일부터 5월 1일까지 서울 시청 앞 노숙 농성투쟁, 4월 17일 중증장애인 39인의 분노를 담은 삭발투쟁, 4월 27일 중증장애인 60여명의 한강대교를 4시간 동안 기어 건너는 행진투쟁, 이명박 시장이 대외 석상에 모습을 비출 때마다 여지없이 나타나는 항의시위 등 장애인 동지들은 주체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2006년 상반기 실천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5월 1일 서울시가 공문으로 보내온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합의. 원칙을 지켜내 가면서 힘겹게 투쟁한 끝에 마침내 ‘시기상조’, ‘예산부족’의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던 서울시로부터 항복선언을 받았다. 이것은 소중한 투쟁의 성과이면서 이후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다. 그럼에도 아직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대구 장애인 동지들의 대구시를 상대로 한 선도적인 투쟁이 진행 중이며 또 아직 꼼짝하지 않는 중앙정부를 향한 지속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이글에서는 중증장애인의 생존권인 활동보조서비스 쟁취를 위한 투쟁을 중심으로 장애인 투쟁을 조망하며 이에 계급적으로 연대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장애인 시설 수용정책의 문제점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미국의 한 정신지체장애인시설에서 생활하던 장애인들이 처음으로 뉴욕거리에 나오게 되었다. 그들이 거리를 돌아보던 중,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를 본 장애인들은 불현듯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를 본 주변사람들은 옷이 젖을까봐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천정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은 곧 샤워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을 공공장소에서 마주하는 것은 흔치 않는 경험이다. 장애인은 장애인과 친화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사회와 더불어 공개적인 활동을 하기 힘들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참사사고를 시점으로 한 장애인이동권투쟁 이후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저상버스는 심각히 부족하며 제대로 된 엘리베이터를 갖춘 지하철역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애인을 사회와 격리시켜 수용하려는 정책은 주변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들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보건복지부 2005년 통계에 따르면 19,840명의 장애인이 시설에 입소하여 생활하고 있다.1) 이것은 미등록 복지시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통계이기에 실제로는 이보다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장애인시설―비단 장애인 시설만은 아니다―은 그간 온갖 인권유린과 비리의 온상이었다. 법인을 사유화하고 온갖 비리를 저지른 최성창 이사장에 대한 7년간의 투쟁을 통해 잘 알려진 “에바다” 뿐만 아니라, 2005년 중증 장애아동을 옥탑방에 감금한 “지인 언어치료원” 사건, 그리고 얼마 전 목사가 장애인 6명을 죽이고 여성장애인을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장애인들의 기초생활급여와 후원금까지 가로챈 것이 알려져 충격을 던져주었던 “김포 사랑의 집” 사건은 그나마 널리 알려진 경우다. 그 외 장애인 복지시설과 관련한 크고 작은 인권침해와 비리는 그 수도 많고 양상도 심각하다. 인권침해 사례를 열거하면 성폭력, 강제구금, 강제노역, 폭행 살인 또는 치사, 암매장, 아동학대, 협박 등. 비리 사례는 공금(국고보조금) 횡령, 후원금 횡령, 임금 착취, 무자격 시설장 및 직원 고용, 원생 장부 조작, 유령직원, 공무원 뇌물 수수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지경이다.2) 이러다 보니 사람이 죽어가는 참극이 공개되어도 세인들의 별다른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성을 담지해야 할 사회복지시설은 영리추구 수단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시설설치의 초기 비용을 제외하면 거의 돈이 들지 않는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다. 법인 및 신고시설은 전액 국고나 지방비로 운영할 수 있고 미신고시설의 경우에도 생활인이나 가족의 입소비나 이용료,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액, 종교단체나 개인, 기업의 후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게다가 ‘나눔과 베풂’이라는 간판으로 포장할 수도 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장사가 아닌가! 사회복지시설은 열악한 근무 조건하의 사회복지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수용된 장애인으로부터 시설 운영자를 위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수용시설’에 불과하다.3)



시설 비리에 있어 국가 기관은 공범이다. 한국 정부는 사회복지시설을 민간에 위탁한 채 보조금을 주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한 것으로 행세하고 있다. 그나마 주어진 관리 감독 책임마저 내팽개치고 있다. 심지어 시설장들과의 유착을 통해 깊은 공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설은 지방의 토호 세력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근대적 형태의 사회복지시설의 탄생 초기부터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권력층과 깊은 담합 관계를 맺으면서 공생관계를 형성해 왔다. 바로 그 수많은 수용시설 비리와 인권유린이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4) 얼마 전 “김포 사랑의 집” 사건도 지방자치 단체의 묵인이 없이는 결단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애인 복지시설은 장애인의 진정한 재활과 자립생활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장애인을 격리하고 밖에 나오면 공중전화를 건다거나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성인을 양성해내고 있다. 장애인을 여남 관계없이 똑같은 추리닝과 짧은 머리를 강요하고 심지어 지급되는 음료수는 오줌을 많이 싼다는 이유로 지급하지 않는 등 신체의 자유마저 억압하는 시설은 형기 없는 감옥과 다름이 없다. 장애인이 사회복지 시설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상인을 자처하는 ‘비장애인’의 편견일 뿐이며 이것은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대표적인 폭력이다. 장애인이 태어났을 때 그것을 한 가정의 문제로 치부하고 가정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시설에 수용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분명히 폭력적인 사회이다. 정부와 언론이 “장애인의 달”이라고 떠들 던 그때 부산의 40대 아버지와 서울의 70대 할아버지는 장애를 지니고 있는 자신의 아들과 손자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5)











활동보조인서비스(Personal Assistance Service)는



중증장애인의 생존권이다







장애인 운동사에 있어 자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 Movement)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부터이다. 이것은 베트남전 반대 운동, 흑인, 여성운동 등 진보적 투쟁의 성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투쟁은 낭만주의적 이상향을 지닌 한계가 분명한 투쟁이었지만 일정한 성과를 남겼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립생활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조정하며, 자신의 생각에 의해 삶의 전부를 관리하는 일로서 장애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함을 뜻한다. 여기서 핵심적 개념은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 당사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장애인 자신의 생활 전반에 있어 선택권 및 자기결정권은 장애인이 보장받아야 할 기본인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디서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 어떤 생활양식을 선택할 것인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의 생활전반에 부딪치는 제반 상황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그 생활 전반에 걸쳐 방향을 설정하여 스스로의 삶을 주도하여 나갈 뿐만 아니라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신변처리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내의 일상적 참여 활동 및 사회적 역할 수행 등의 문제가 모두 포함된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대안하나를 제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장애인문제를 논의하는 관점의 진일보와, 사고틀의 획기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노숙자 등 사회적 소수자 문제의 접근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이런 배경 하에서 탈시설화 운동이 제기된다. 이것은 수용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을 시설로부터 퇴소시켜 지역사회로부터 이주시켜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수용시설에서 장애인의 생활은 주도적인 선택권이나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6) 그리고 이것은 무조건적인 시설의 즉각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설 수용위주의 장애인정책을 전면개정하고 위한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데 장애인의 자립생활은 장애인 자신이 생활전반에 걸친 제반 상황을 혼자 힘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인(Personal Assistance)이 있다면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을 혼자 처리하기 위해 하루 종일 걸린다면 이는 분명히 비생산적인 것이다. 거기에다가 기본적인 신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인도 상당수이다. 여기에서 ‘활동보조를 필요로 하는 (중증)장애인’이라는 개념을 통계적으로 구체화하려 한다. 법적으로는 중증장애인을 “장애등급 1,2급과 다른 장애가 중복된 정신지체인 및 발달장애인” 등으로 규정하고 있는데(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 보건복지부 지침), 이러한 접근은 장애등급의 형평성과 신뢰도가 취약한 현실에서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좀 더 실제적인 자료는 보건복지부의 2005년 장애인실태조사 내용을 근거로 추출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전국의 등록 장애인수는 약 167만 명(서울시 등록 장애인수 약 29만 명), 80%에도 못 미치는 등록률을 감안하면 전국의 장애인수는 약 215만 명으로 추정된다.







[2005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의한 등록 장애인 및 추정 장애인수]



(단위 : 명)


















구분


등록 장애인수


등록률


2005년 실태조사



1,669,329


77.7


2,148,686




* 자료출처 : 보건복지부. 2005년 장애인실태조사.







장애인의 64.6%는 거의 모든 일상생활을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할 수 있으나, 나머지 35%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거의 모두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7%, 대부분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9%에 이르고 있다. 합계인 16%의 장애인은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7)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중 실제로 도움 제공자가 있는 경우는 86.7%이며 없는 경우는 13.3%이다. 도움제공자의 대부분인 92.5%는 가족구성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족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 2004년 서울시 연구에 의하면 장애인 가족의 64.6%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59.4%는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요약하면 전체 약 215만 장애인중 35%에 해당하는 75만 명이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중 34만 명은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 75만 명 13.3%인 10만 명은 실제 도움 제공자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나머지 65만 명 중 92.5%인 60만 명은 가족구성원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는 계산을 얻을 수 있다. 위의 통계자료와 이를 통한 추산은 대략적인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지만 조사자료의 신뢰도 문제와 통계적 접근의 위험성도 명확한 인식을 요하는 일이다. 이러한 실태조사나 일상생활수행능력(ADL, Activities of Daily Living)측정―목욕, 위생, 식사, 배변, 착탈의, 보행, 계단 오르내리기, 의자 오르내리기 등―에는 중증장애인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환경적 요인과 당사자의 욕구파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기초자료 이상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상의 수치로부터, 활동보조를 필요로 하는 중증장애인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 그 절대다수가 도움 제공자가 없거나 가족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참한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들 중증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특별한 실태조사가 요구된다는 것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8)



중증장애인은 일상적인 삶에서 자신의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중증장애인은 혼자서는 외출, 식사9), 배변, 청결유지, 착탈의, 컴퓨터 작업, 의사소통 등 일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활동보조인서비스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장애인시설에 수용되거나,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인 제도이다.10) 성년이 훨씬 지나서도 가족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 욕구와 꿈을 갖는 것이 새로운 고통인 삶, 수십 년 세월을 골방에 갇히거나 시설에 처박혀 인간이하의 삶을 강요당하는 것이 중증장애인의 처절한 현실이다. 이런 삶을 ‘생명의 유지’라고는 할 수는 있을 지라도,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증장애인의 일상활동을 돕는 행위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자원봉사자(volunteer)를 떠올리기 쉽지만, 자원봉사와 활동보조인은 많이 다르다. 자원봉사의 경우 장애인이 주체가 되기보다는 비장애인 자원봉사자의 여건과 의지에 장애인의 욕구가 종속되게 된다. 중증장애인은 봉사자를 그저 ‘고마운 사람’으로 여기고 봉사자의 서비스 제공 행위를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중증장애인은 동정과 시혜의 대상일 뿐이다.11) 중증장애인은 ‘착한 사람들’의 도움에 의존해서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중증장애인은 활동보조의 조력으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당당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12)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제도화되면, 중증장애인도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더 이상 절망적이지 않게 가족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며, 골방에 틀어박혀 TV만 보고 살거나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의미 없이 살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활동보조인서비스는 중증장애인에게는 생존권과 같다. 활동보조인서비스가 모든 중증장애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초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는커녕 장애인 수용시설 신축 계획을 내고있는 보건복지부를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투쟁해내자.13)











소수자운동과 계급투쟁의 마주침







장애인 운동은 소수자 운동이다. 여기서 ‘소수’라는 것은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수’와 대비하기 위해 사용하는 불가피한 용어이다. 이를테면 여성운동에서 여성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그런데 사회적․정치적으로 여성은 소수자(minority)이다.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이주노동자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존재하며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소수자운동은 사회적․정치적 소수자를 주체로 한 고유의 영역을 지닌 정체성운동의 일환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소수자운동과 계급투쟁은 쉽게 조화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소수자운동과 자율주의를 강조하면서 계급과 계급투쟁을 전적으로 폐기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수자운동을 ‘포스트주의’류 혹은 청산주의와 같은 것으로 선험적으로 판단하며 제대로 개입하고 연대하지 않았다. 자율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횡적연합만을 강조하고 노동자계급과 노동자대중투쟁을 무조건적으로 폐기하고 탈주체화 하려는 소수자 운동에 대해서 맑스주의자로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명확하게 비판해야 한다.14) 하지만 한편에서 장애인의 문제를 계급의 문제로 환원하여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장애인 문제에도 투영되는 것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기계적인 도식화이며 실천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계급적 관점을 확실히 견지한 맑스주의자들이 그간 소수자 운동에 대해 무지하고 실천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소수자’라는 단어만 들어도 이것은 기존의 노동자 계급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해체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할 것이 아니다. 소수자 운동이 지닐 수 있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기존의 계급 개념을 더욱더 풍부히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명확한 관점을 토대로 소수자 운동과 연대하는 중에 ‘노동자계급’의 현재적 의미가 현실적으로 더욱더 의미있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하고 다소 조야하지만 장애인 투쟁과 노동계급의 투쟁이 마주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해 보려한다.



장애인 운동은 몰역사적이며 초월적인 성향을 띠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운동에 있어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에는 구체적인 전선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운동은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선에서 그치는 이벤트적인 성격을 벗어나기가 힘들다.15) 장애인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스스로의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는 장애인의 경우를 보자. 이들은 대체로 비참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빈곤층의 가정에 장애인이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 가정은 그날로부터 모든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태어난 장애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하층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장애인은 그 소수자적 위치로 인하여 교육권과 노동권에 있어서 심각한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활동보조인서비스만으로 모든 중증장애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 소득보장이나 노동권 보장 등이 없다면 중증장애인은 나이가 40, 50을 넘어도 가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낮은 교육률과 열악한 노동현실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계급적 조건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기능하고 있다. 장애인 학생 중 교육을 받고 있는 재학생은 약 58,000여명으로써 장애인 교육 수혜율은 약 26.9%에 불과하다.16) 장애인 174만 명 중 경제활동 인구는 69만여 명(경제활동 참가율 38.2%)에 그치고 있다. 그중 중증장애인의 취업률(13.2%)은 경증장애인(52.3%)의 1/4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다가 취업한 형태도 저임금의 단순노무직(27.6%)과 농어업(19.0%) 및 자영업(40.2%) 중심의 열악한 구조이다. 그리고 취업 장애인의 월 평균수입(115만원)은 전체 취업자(258만원)의 44.5% 수준에 불과하다.17) 상황이 이러한데 보건복지부는 지속된 저출산·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이 우려가 된다며 국가의 부족한 노동력은 장애인, 여성 및 고령자로 충당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호돌갑을 떨고 있다.18) 행간을 읽어보라. 이것은 자본의 위기를 여성과 노인의 비정규직화도 모자라 장애인의 비정규직화로 해결하겠다는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요는 장애인 문제의 해결 역시 신자유주의와 정면대결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는 것,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일삼으며 경쟁과 효율의 가치를 일상화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는 가운데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사회복지는 피착취계급의 투쟁과 저항 속에서 가능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회복지는 이미 파산을 선고했다. 그렇다면 장애인운동의 방향도 신자유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조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당연히도 ‘국가’의 문제를 이론적․실천적으로 우회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장애인 투쟁주체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경찰폭력으로 외화된 국가폭력의 실체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국가의 본질에 대해 실천적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투쟁하고 있다. 계급적 좌파의 분발을 촉구한다. 장애인투쟁은 이미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투쟁으로 도약하고 있다!



활동보조인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도 노동운동과 장애인운동이 마주칠 수 있는 조건을 확인할 수 있다. 활동보조인은 하찮은 직업이 아니다. 중증장애인의 일상활동을 보조한다는 것은 결코 쉽거나 가벼운 일이 아니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이후에 가능한 고도의 숙련노동이다. 그러하기에 활동보조인은 공인된 교육기관에서 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활동보조인은 노동자로서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을 전제로 해야 한다. 활동보조인이 저임금, 위험, 고용불안 등 직업적 불안요소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장애인 이용자는 활동보조인과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활동보조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때 활동보조인의 사용주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의 고용주가 되는 관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할 때만이 활동보조인은 장애인 이용자와 함께 자신의 권리와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정부에 맞서 단결할 수 있다.19) 요컨대 활동보조인은 중증장애인이 장애로 인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급여를 받고 도와주는 사회복지 노동자라 정의할 수 있다.



활동보조인의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전혀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 최대 1억이 활동보조인 파견 사업비로 사용된다고 가정하고, 이를 가지고 12개월 동안 30명의 활동보조인을 고용한다고 할 때, 1명의 활동보조인이 제공받는 월 평균 임금은 약 28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즉 기본적으로 생활임금의 확보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활동보조인은 일의 특성상 부상을 입거나 장애인 당사자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있으나, 현재 활동보조인은 어떠한 보험에도 가입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활동보조인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활동보조인을 이용하는 중증장애인들이 질 높고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받기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20)



5월 25일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허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온 이후 시각장애인 투쟁이 급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시각장애인투쟁과 노동자투쟁이 결합될 수 있음이 맹아적으로나마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 상당한 비율로 발생하는 산업재해 노동자 투쟁 등에 있어서도 장애인투쟁과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내고 실천해내야 한다.











차이를 넘어 단결로 장애해방․노동해방의 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비장애인 차별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자본과 권력에 기인한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를 차별로 전화시키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노동자와 장애인들이 실천적으로 연대하자. 장애인 투쟁은 시혜와 동정의 시선에 기초한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근본적인 변혁의 관점을 지니고 장애해방의 깃발로 전진하는 동지들에게 그들의 해방과 노동해방의 길이 맞닿아 있기에 그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동지적 관계맺음을 하며 함께 싸워나가자.



마치며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에 대해 점검하고자 한다. 흔히 장애인에 대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는 근거로 ‘장애우’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장애우’라는 말은 장애인들이 쓰고 싶어하지 않는 말이다. 이것은 장애인을 무조건적으로 ‘친구’라는 것으로 전제로 한 철저히 비장애인 중심의 시각이 담긴 용어이다. 또 이 용어의 단적인 문제점은 재귀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 스스로 자신을 ‘친구’라 할 수 있는가? ‘장애우’는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21) 장애인 투쟁에 동지적 관계맺음으로 연대하고자 하는 이들은 꼭 올바른 호칭을 사용하길 간곡하게 바란다. ≪노사과연≫











중증장애인의 생존권, 활동보조 제도화 투쟁







최상철∣운영위원












1) 보건복지부, 2005년 장애인복지관련-시설 및 기관일람표.http://www.mohw.go.kr




2) 박래군, “사회복지시설 수용자의 인권에 관한 단상”, [진보평론], 제4호, 2000년 여름.




3) 사회복지 시설과 관련한 문제점은 시설인권연대 홈페이지를 참고.      http://tocommunity.org




4) 박래군, 상동.




5) “야만의 세월을 거슬러, 장애인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새 세상을 건설하자”, 2006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결의대회’ 결의문.




6) “시설생활은 매일 반복된 생활로 자기주장도 자신의 권리도 못 내세우고, 인간답지 않은 생활을 하던 중 2003년 5월에 시설장 수녀님의 권유로 그 당시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회원가입을 하였고, 그해 7월말에는 당시 ‘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2박3일 일정으로 방문을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자립생활’, ‘활동보조인’이란 말은 나에게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나에게는 다만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일일봉사자나 근무자가 오면 밥만 먹여 주고, 목욕 시켜줄 뿐, 저는 그들에게 한명의 환자일 뿐이었고,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그들은 봉사를 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6) “시설생활은 매일 반복된 생활로 자기주장도 자신의 권리도 못 내세우고, 인간답지 않은 생활을 하던 중 2003년 5월에 시설장 수녀님의 권유로 그 당시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회원가입을 하였고, 그해 7월말에는 당시 ‘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2박3일 일정으로 방문을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자립생활’, ‘활동보조인’이란 말은 나에게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나에게는 다만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일일봉사자나 근무자가 오면 밥만 먹여 주고, 목욕 시켜줄 뿐, 저는 그들에게 한명의 환자일 뿐이었고,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그들은 봉사를 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배덕민(광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나의 삶과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투쟁의 각오”,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투쟁을 위한 대토론회 자료집(2006년 3월 18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홈페이지
http://sadd.or.kr 자료실-정책자료 19번 자료. 




7) 보건사회연구원 2000년 장애인실태조사에서는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증장애인은 전체 장애인의 20.4%로 되어있다.




8) 남병준, “활동보조인서비스의 원칙과 제도화 투쟁의 필요성”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투쟁을 위한 대토론회 자료집(2006년 3월 18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홈페이지
http://sadd.or.kr 자료실-정책자료 19번 자료. 




9) 2006년 5월 말 대구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제도화 노숙농성 투쟁 과정에서 전의경이 식사보조를  하기도 했다.
http://agorabbs4.media.daum.net/griffin/do/kin/read?bbsId=K150&articleId=112046 그러나 활동보조와 관련한 인식이 아직 일천한 단계라 이런 사진에는 종종 ‘악플’이 달리곤 한다. 투쟁에 지속적으로 연대하고 제도를 쟁취해 나가면 대중의 의식은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이다.




10) “아침 9시50분쯤 내 담당 활동보조인이 옵니다. 청소, 빨래, 식사보조 등 씻는 것부터 옷 입고, 휠체어에 타는 것까지 활동보조를 해줍니다. 그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너무 불편합니다. 야간에는 다른 활동보조인이 있습니다. 야학수업을 마치고 오면 휠체어에서 내려주고 옷을 벗겨주고 내가 올 때까지 잠을 안자고 기다립니다. 이 두분의 활동보조인이 없는 주말에는 아무런 활동을 못합니다. 밖에서 활동할 때는 활동보조인이 없으므로 배가 고파도 밥을 못 먹고, 몸이 아파도 약을 먹을 수 없습니다. 활동하는 시간에도 활동보조인이 있으면, 밥도 먹고 신변처리도 누구에게 부탁해서 하지 않아도 되고, 사회활동 하는데 있어서도 훨씬 좋을텐데 그런 바람을 갖습니다.” 배덕민(광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 상동.




11)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점 직원이 장애인에게 햄버거를 먹여주는 사진인데, 네티즌들은 이 사진 글에 많은 지지 댓글을 달며 아직 이 사회에는 감동과 온정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진은 비장애인들에게 우리 사회의 사랑이 남아있다고 여기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대상이 된 장애인의 처지를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 먹고 있는 장애인의 심경을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그 장애인에게 활동보조인이 있었다면 사진 속 장애인은 없었을 것입니다.”


11)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점 직원이 장애인에게 햄버거를 먹여주는 사진인데, 네티즌들은 이 사진 글에 많은 지지 댓글을 달며 아직 이 사회에는 감동과 온정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진은 비장애인들에게 우리 사회의 사랑이 남아있다고 여기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대상이 된 장애인의 처지를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 먹고 있는 장애인의 심경을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그 장애인에게 활동보조인이 있었다면 사진 속 장애인은 없었을 것입니다.”


   박김영희(420장애인차별공동투쟁단 공동대표, 장애여성공감 대표), 2006년 4월20일 서울역에서 시작된 장애인차별철폐결의대회 개회 발언 중에서.




12) “활동보조인 제도화투쟁 자료집”,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홈페이지
http://sadd.or.kr 자료실-정책자료 27번 자료.




13) 장애인 수용시설에는 장애인 1인당 120여만 원의 국가예산이 투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복지부는 2009까지 271개의 장애인수용시설을 신축할 계획이다.


13) 장애인 수용시설에는 장애인 1인당 120여만 원의 국가예산이 투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복지부는 2009까지 271개의 장애인수용시설을 신축할 계획이다.


   <보도자료>, 장애인수용시설 확충 반대!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도화 쟁취!! 철창 1인 시위 돌입 기자회견, 2006년 5월 24일.




14) 고민택, “ ‘맑스주의의 변환과 확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진경, 윤수종의 주장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2호 1999년 겨울.




15) 김도현, “장애인운동의 정체성 정립을 위한 모색”, [진보평론], 제11호, 2002년 봄.




16) 교육부, “특수교육 실태조사서”, 2005.




17) 보건복지부, “장애인복지증진(Able2010프로젝트)”,
http://www.mohw.go.kr 2006년 4월 20일.




18) 보건복지부, 상동.




19) 남병준, 상동. 




20) 2006년 420공투단요구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홈페이지
http://sadd.or.kr 자료실-정책자료 21번 자료.




21) 김도현, 인터뷰-“차별에 저항하라!”, [질라라비], 2006년 4월 No.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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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 장애인 , 자본주의 , 활동보조 , 중증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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