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백혈병 역학조사

자본의 책임과 피해 노동자의 권리는 어디로 갔나

사람들은 보통 역학조사라는 말을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기사에서 본다

사람들은 보통 역학조사라는 말을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기사에서 본다.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이 집단 식중독에 걸려 그 원인에 대한 역학조사를 했다더라, 어느 지역에서 조류독감이 의심되어 이를 확인하는 역학조사를 했다더라는 식이다. 역학조사는 이처럼 주로 전염병의 발생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비단 전염병뿐 아니라 질병의 원인을 찾고, 질병이 발생하는 양상을 알아내기 위한 조사는 모두 역학조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역학조사는 산업안전보건법 제43조 2항에서 말하는 “근로자의 질병과 작업장의 유해요인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하 산안공단)이 실시하는 “직업성 질환 역학조사”를 뜻한다.



1. 역학조사 진행 경과


2007년 6월,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 노동자 황유미씨의 가족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험 유족보상을 청구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황유미씨의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인지를 평가해 달라고 산안공단에 의뢰했고, 산안공단은 2007년 7월부터 11월까지 황유미씨의 작업 환경을 조사했다.

2007년 12월 28일 황유미씨의 백혈병 업무 관련성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에 대한 “역학조사 평가위원회”가 열렸다. 평가위원회는 이번 역학조사에서는 업무 관련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할 수 없다고 보고, 우리나라 전체 반도체 노동자들의 림프조혈기계암 발생위험도를 평가하는 역학조사를 실시한 후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산안공단은 2008년 3월부터 12월까지 반도체 제조업에서의 림프조혈기계 암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2008년 4월 28일 삼성 반도체에서 백혈병을 얻어 사망한 이숙영, 황민웅씨의 유족들과 현재 투병 중인 김옥이, 박지연씨 등 네 명의 노동자가 새롭게 산재보상을 청구했고, 근로복지공단은 황유미씨와 마찬가지로 산안공단에 네 명 각각의 업무 관련성 평가를 의뢰했다.

정리해보면,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을 계기로 2007년 여름부터 이루어진 역학조사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산재 보상을 신청한 다섯 명의 노동자들이 걸린 백혈병이 과연 업무상 질병인지를 가늠하기 위한 조사이고, 다른 하나는 반도체 산업 노동자 전반에서 백혈병을 비롯한 림프조혈기계 암의 위험도를 살펴보기 위한 조사였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전자를 “개별역학조사”라고, 후자를 “집단역학조사”라고 부른다.

산안공단은 2008년 12월 23일 역학조사 평가위원회를 열어 집단역학조사 결과를 검토하고, 이어 12월 29일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 건강실태 역학조사 결과 발표회”를 통해 결과를 세상에 알렸다. 다섯 명에 대한 각각의 개별역학조사 결과들은 2009년 2월 25일 평가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친 상태이며, 3월 초 현재 산안공단이 각 평가위원들의 심의 의견을 종합하고 있는 중이다. 예상컨대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무렵이면 산안공단에 개별역학조사를 의뢰했던 근로복지공단으로 공식적인 회신이 도달해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반올림의 요구


반올림은 2007년 11월 발족 직후부터 정부가 나서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제대로 조사할 것을 요구하며, 제대로 된 조사를 위한 요건들을 제시해왔다. 가령 2007년 12월 반올림이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부에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삼성반도체 퇴직자, 협력사와 비정규직 등 전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모든 공정을 포괄하여 조사해야 한다는 것. 둘째, 조사 과정에 피해 노동자나 (유)가족 또는 그들이 추천하는 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 셋째, 백혈병뿐 아니라 반도체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건강 실태와 작업환경상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개선책을 찾아내려는 연구들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 넷째, 이미 병에 걸려 산재보험 보상을 청구한 노동자들의 경우, 모든 조사들이 완전히 끝난 뒤에는 설령 보상을 받더라도 너무 늦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의 질병이 업무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않는 한 지체없이 산업재해로 인정하여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2008년 한해 동안 반올림은 노동부와 산안공단을 향한 공개질의, 면담, 항의방문, 기자회견, 집회 등을 통해 집단역학조사와 개별역학조사에 대한 참여를 보장하거나 최소한의 정보와 자료를 공개하라고 꾸준히 요구해왔다. 한편으로는 사업주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자료들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반올림이 전현직 노동자들의 제보를 통해 어렵게 획득한 정보와 자료들을 일일이 정리하여 제공하는 노력도 기울여왔다.



3. 집단역학조사의 문제점


1) 조사 진행 과정의 문제점


첫째, 노동자의 알 권리와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았다. 반도체 제조 노동자들의 림프조혈기계 암에 대한 집단역학조사는 고 황유미씨의 산재신청과 그 이후 반올림이 꾸준히 제기해 온 백혈병 집단 발병 대책 요구를 계기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집단역학조사 실시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 피해 당사자 또는 추천 전문가의 참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직접적인 조사 참여는 고사하고, 구체적인 조사 계획이나 경과는커녕 노동부와 산안공단이 확보한 자료의 목록조차도 열람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최소한 최종결론을 확정하기 전에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토론하는 장치로서의 ‘공청회’를 갖자는 제안조차 묵살되었다.

둘째, 사업주의 왜곡과 은폐를 막을 장치가 없었다. 집단역학조사는 사업주가 제공하는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 제기 당사자들을 포함,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다보니 사업주가 제공한 정보에 은폐나 왜곡이 없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아무런 장치도 없는 셈이었다. 반올림이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노동부와 산안공단은 ‘회사의 영업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 건강 보호’라는 역학조사의 상위 목표가 ‘기업의 이미지와 이윤 보호’에 의해 훼손되고 있음을 말할 뿐이다.


2) 분석과 조사 결과 발표의 문제점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반올림은 역학조사를 수행해온 산안공단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를 버리지 않으려 애썼으며, 조사에 내실을 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협력해왔다.

그러나 2008년 12월 29일 산안공단이 집단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한 자리에서 반올림은 단상 위로 뛰어올라가 공단이 배포한 자료를 찢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림프조혈기계 암의 위험이 높은 집단의 문제점을 희석시켰고, 그나마 드러난 문제점의 의미조차 축소하여 서술했다.

첫째, 고위험 집단의 존재를 통계로 뭉뚱그렸다.

공단은 조사 대상자 전체를 분모로 계산한 발생률이 전체 인구의 발생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지 낮은지에 대한 결과만을 발표하였다. 가령 삼성반도체의 경우 자료가 확보된 52,315명 중에서 찾아낸 림프조혈기계 암 환자 수는 19명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계산법은 실제 암 위험이 높은 집단의 문제를 희석시키는 것이다. 가령 삼성반도체에서도 수동 작업이 많고 설비가 오래되어 누출사고가 잦기 때문에 일명 “사고 라인”이라고 불리던 1~3라인에서 반올림이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5명의 백혈병 환자가 존재한다. 5만 명이 넘는 삼성반도체 전체 노동자 중에서 15개 생산 라인에서 일한 노동자들, 그 중 특히 위험한 1~3라인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생각해보라. 1~3라인 근무자들 중 5명의 발생률을 구하면 삼성반도체 전체 5만여 명 중 19명의 발생률보다 훨씬 높게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둘째, 건강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동자 집단의 건강 수준에 대한 역학조사들의 결과는 종종 일반 인구 집단에 비해 건강하다고 나오곤 한다. 대상 사업장이 건강에 이로운 환경이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취업 단계에서 좀더 건강한 이들이 입사하는 데다가 근무 중에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 퇴사나 이직을 통해 그 현장을 떠나기 때문에 결국 건강한 노동자들만이 남게 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를 ‘건강 노동자 효과’라고 부른다.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는 건강에 유해한 노동환경이지만 노동자들의 건강은 오히려 일반 인구 집단보다 더 좋게 조사되어 자칫 노동환경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단조차 29일 발표회 자리에서 건강 노동자 효과를 감안하지 못한 것이 이 연구의 한계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보고서 요약본에서는 ‘건강 노동자 효과를 감안하지 못한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질병의 위험도가 이번 조사에서 낮게 나타났다고 하여 그 질병의 실제 위험이 낮으리라고 섣불리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라는 최소한의 주의조차 단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셋째, 백혈병 위험의 축소 왜곡을 조장하였다.

온갖 연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림프조혈기계 암 중에서 비호지킨림프종의 위험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암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반도체 산업 현장에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백혈병과 림프종은 모두 ‘조혈모세포’에서 기원하는 암이기 때문에, 림프종의 위험이 명확히 높게 나왔다는 사실은 백혈병을 포함한 림프조혈기계 발암물질이 반도체 산업 현장에 존재할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이는 발표회 자리에서 공단 측에서도 분명히 인정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공단은 정작 중요한 보도자료와 보고서에는 이러한 설명과 해석을 전혀 담지 않았다. 그 결과 수많은 언론들이 조사 결과를 오해하여 ‘림프종 위험은 높으나 백혈병은 괜찮다’라는 틀린 기사들을 보도하기에 바빴다. 이런 보도들 중에는 ‘백혈병이 작업환경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라는 식의 심각한 왜곡에까지 이르고 있다.

더군다나 공단이 내놓은 보고서와 보도자료는 엄연히 백혈병 위험을 시사하는 내용조차 그 의미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가령 공단은 “여성의 백혈병 위험도 분석 결과…, 인사자료 코호트에서 표준화사망비는 1.48, 표준화암등록비는 1.31로 일반인구집단에 비해 약간 높았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라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여성에서 백혈병 사망 위험이 1.48배, 발생 위험이 1.31배 높게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높았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라고 일축되어서는 안 되는 의미있는 결과이다.

왜냐하면 백혈병이나 림프종은 모두 발생률이 지극히 낮은 질환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역학조사처럼 어느 집단에 위험요인이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기 위한 시작 단계의 연구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학문적으로도 옳은 태도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보고서나 논문을 쓸 때, 자신의 연구 결과가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결론과 토론 부분을 작성한다. 그에 비해 공단이 내놓은 이번 보고서에는 결과를 해석할 때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안내, 최소한의 해석 오류를 막기 위한 설명은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3) 정부기관과 전문가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서의 문제점


집단역학조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산안공단은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고 올바른 대책을 내오기 위한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외형상 노사로부터 물리적인 등거리를 유지하는 기계적인 수준의 객관성을 유지했다. 또한 피해 당사자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연구결과가 왜곡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왜곡보도를 정정할 수 있도록 사후에라도 노력해 달라는 요구조차 묵살했다.

이런 태도는 사실상 힘없는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힘있는 자본의 눈치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산안공단은 “일하는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지킨다”는 목표 아래 “산업재해예방의 중심 전문기관”을 조직의 비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반도체 집단역학조사 과정에서 우리는 산안공단조차 “비지니스 프렌들리” 이명박 정권의 기조를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4. 개별역학조사의 문제점


개별역학조사는 故황유미(2007년 6월 산재신청), 故황민웅, 故이숙영, 김옥이, 박지연(2008년 4월 산재신청)의 업무 관련성 판정을 위한 조사로, 본인 및 유족 진술, 회사 제공 자료, 현장방문, 과거 기록 등을 바탕으로 직업력, 작업 내용, 유해요인에 대한 과거 및 현재 노출 평가 등으로 이루어졌다.


1) 조사 진행 과정의 문제점


개별역학조사 과정 역시 집단역학조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알 권리와 참여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사업주의 왜곡과 은폐를 막을 장치가 마련되지 못했다.

개별역학조사는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과거 작업환경을 추적하여, 그 중에 백혈병에 영향을 미칠 만한 유해요인이 있었는지를 찾아보는 것을 골자로 한다. 따라서 산안공단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과거 작업환경에 대한 노동자와 사업주 양측의 진술과 자료를 수집한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과거의 작업환경에 대해 상세한 정보와 신뢰할만한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은 물론, 반올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연락을 해오는 퇴직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사용한 화학물질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X선을 이용한 제품 검사를 했던 노동자는 X선이 방사선의 일종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평소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안전보건에 대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게다가 다섯 명의 산재 신청 노동자들 중 세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노동조합조차 없는 사업장에서 그들의 과거 작업환경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동료들이란 결국 “회사”가 선별해준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직업력(업무내용, 작업환경)이나 과거 유해물질 노출 사실에 대해 산안공단은 회사가 제시하는 자료들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고, 회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중요한 정보를 은폐하고 왜곡할 수 있는 여지가 활짝 열려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번 개별역학조사 과정에서 회사는 피해 노동자들이 주장한 유해요인 노출 사실들을 부정하기 위한 자료들을 대대적으로 내놓았다. 반올림에서는 산안공단이 회사 측 자료를 단순히 취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엄정하게 조사하여 검증할 것과, 회사가 주장하는 내용을 다시 피해 노동자들에게 되돌려 사실 은폐 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산안공단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믿고 맡겨 달라’는 것 뿐이었다.


2) 유해요인 노출 평가의 한계


과거의 작업환경에서 어떤 유해요인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를 확실히 평가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이를 위해 산안공단에서는 삼성반도체의 과거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검토하고,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유해요인을 평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장들은 작업환경측정을 할 때 설비 가동을 줄이거나 작업장을 깨끗이 치우기 때문에, 실제 작업환경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유해요인을 저평가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삼성반도체의 2006년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에서도 실인원 20인이 배치된 공정에서 1명만 작업할 때 측정을 수행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제대로 측정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작업환경측정은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지정하고 있는 몇가지 물질에 대해서만 측정이 이루어지며, 간헐적인 비정형 업무나 사고로 인한 “순간 고농도 노출”, 그리고 호흡기 노출 이외에도 피부 등 다양한 흡수 경로가 고려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암 물질 노출 가능성을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제한적인 자료다. 따라서 과거 작업환경측정 결과에서 특정 발암물질을 찾아냈다면 이를 근거로 백혈병의 업무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작업환경측정 결과 특정 발암물질이 없었다고 해서 백혈병 유발 요인에 노출되지 않았으리라 단언할래야 할 수 없는 자료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별역학조사 과정에서 산안공단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실시한 측정 역시 과거 작업환경측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좀처럼 밝혀내기 어려운 백혈병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도록 면밀하게 짜여진 조사라기보다는 벤젠이나 방사선 등 ‘널리 알려진 발암물질’을 몇 개 뽑아서 그 농도를 한번 재보았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각종 제보와 증언, 그리고 반도체 공정에 대한 몇몇 문헌들을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발암물질 노출 가능 상황을 설정하여 시뮬레이션을 하거나, 단시간이지만 고농도의 유해요인에 노출될 수 있는 간헐적인 작업을 평가하는 일은 없었다. 수십 종의 화학물질과 방사선들이 고온, 고압 환경에서 상호작용을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산물이나 발암성의 상승효과 등에 대한 검토도 전혀 없었다.


3)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한계


개별역학조사의 목적은 다섯 노동자들의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인지를 가늠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 산안공단이 수행한 조사로는 업무상 질병인지 아닌지를 결론지을 수 없다.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조사였던 것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4조에서 “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업무수행 과정에서 유해ㆍ위험요인을 취급하거나 노출된 경력이 있을 것. 둘째, 유해ㆍ위험요인을 취급하거나 노출되는 업무시간, 종사기간 및 업무 환경 등에 비추어 볼 때 근로자의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인정될 것. 셋째, 유해ㆍ위험요인에 노출되거나 취급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질병이 발생하였다고 의학적으로 인정될 것.

그런데 이번 개별역학조사는 다섯 명의 노동자들이 백혈병을 일으킬 만한 유해요인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지도 못했고, 노출되지 않았다고도 결론내릴 수 없는 수준의 결과를 남겼다. 이는 조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산안공단의 잘못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백혈병을 비롯한 직업성 암의 경우, 종전과 같은 역학조사로는 업무상 질병 여부에 대해 답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직업성 암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많을 것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백한 발병 원인에 대한 인류의 지식 자체가 척박하며, 한가지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요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하기 때문에 단편적인 현장 조사로 업무관련성을 입증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5. 반도체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


산안공단은 다섯 명의 백혈병 노동자들에 대한 개별역학조사 결과를 정리하고 평가위원회의 심의 의견을 모아 근로복지공단으로 회신할 예정이라 한다. 그러면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보상 여부를 결정할 것이란 얘기다. 근로복지공단의 입장은 “명확한 유해요인을 찾지 못했다면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산재보상은 사회복지의 일환으로 모든 노동자가 응당 누릴 권리다. 결국 산안공단이라는 기관이 대한민국 대표 산업보건전문가로서 수행한 개별역학조사의 근본적 한계와 부실한 조사를 수행하고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로 인해, 그리고 산재보험을 관리하는 근로복지공단이라는 기관이 재정 지출을 줄이는 데 급급하여 반노동자적 행정을 일삼는 관행으로 인해,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은 치료와 보상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하게 될 처지에 놓였다.

개별역학조사가 백혈병의 업무 관련성에 대한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은 이를 시행한 산안공단의 책임이다. 산안공단은 자신의 책임이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권리 박탈로 전가되는 것을 방조해서는 안 된다. 산안공단은 집단역학조사에서 발견한 백혈병 위험과, 반도체 산업에서 유사 질환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를 보완하여, 업무 관련성을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결론을 근로복지공단으로 회신해야 한다.

한편, 과연 어떤 질병에 대해 작업환경 속의 유해요인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산재보상의 치료권을 박탈하는 것이 올바른가, 사회복지의 일환으로 산재보험제도가 제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근로복지공단이 “명확한 유해요인을 찾지 못했다면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 앞으로 이 땅에서 직업성 암으로 산재보상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노동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점에서 설령 산안공단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근로복지공단이 스스로 신속한 보상을 통해 노동자의 치료와 그 가족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산재보험제도 본래의 취지를 살려 삼성반도체 백혈병을 산재로 승인해야 한다. 아마도 반올림의 2009년은 이 정당한 요구를 외치며 싸우는, 그리고 싸움의 폭과 깊이를 한층 넓히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해가 될 것 같다. 끝으로 약 1년 전, 2008년 4월 28일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네 명의 백혈병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산재신청을 하면서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를 옮기며 글을 맺을까 한다.


“지금까지 노동부 산하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사회공공보험인 산재보험을 관리하고 운영함에 있어서, 일하다 다치고 병들고 죽은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키는 데 애쓰기보다는 보험 재정을 아끼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결과 8천억 원의 흑자를 남겼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천억의 흑자 뒤에는 치료와 보상을 받을 최소한의 권리조차 짓밟힌 노동자들의 고통과 한숨이 있습니다. 산재보험을 통해 치료와 보상을 받는 것은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입니다. 이 권리를 지켜주라고 만든 기관이 이 권리를 짓밟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참으로 끔찍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삼성반도체에서 희귀질환인 백혈병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보았기에, 백혈병이 개인 질환이라는 회사의 근거없는 주장에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해규모와 원인을 정확히 밝히기보다는 돈으로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회사의 행태를 보았기에, 우리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고통받게 되리라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리고 재해 노동자에게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제도가 바로 산재보험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 역시 그 정당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 어떤 것도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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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정옥 |반올림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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