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축구에 대한 악감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축구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에 대한 악감정도 당연히 없다. 다만, 대중의 탈정치화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스포츠에 대한 반감은 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스포츠 자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지대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 터져 나오는 스포츠계의 비리 뉴스나 파벌 간 다툼 따위 등의 화끈한(!) 뉴스가 아니고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월드컵에 대해서는 악감정이 좀 있다. 나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거다. 평생 빨간색하고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깃발이나 머리띠를 제외하고) 당연히 2002년 월드컵 개최 당시 빨간색 셔츠를 입는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탈리아전이 열리던 날, 나는 지하철 안에서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빨간 셔츠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매일같이 보도되는 월드컵 관련 뉴스와 끊임없이 재방송 되는 골 성공 장면 등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축구 룰까지 알게 되었다(오프사이드던가?). 덩달아 김남일 선수의 소개 멘트까지 기억하게 된 걸보면 그때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월드컵이 한 달 남은 시점인 요즘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어 오싹하기까지 하다. 납량특집이 따로 없다.
스포츠방송이냐, 세뇌방송이냐?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축구는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기 전 나는 K리그 경기에서 갈기 머리를 휘날리며 필드를 뛰던 김주성 선수나 한창 젊을 때의 황선홍 선수를 좋아하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3S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프로야구리그 만큼이나 프로축구가 순수한 스포츠의 활성화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열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야구를 꼭 좋아하지 않아도 대화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월드컵 열기는 마치 광기의 발산처럼 보일 뿐이다. 영화배우 감우성이 10년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몰라도 그걸 모르는 사람을 타박할 수는 없지만, 월드컵에 출전 엔트리의 명단을 외우지 못하면 왕따를 당하는 세상이다. 월드컵 4강 신화가 이루어질지 아닐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매국노가 된다. 월드컵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은 나라의 발전을 기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익을 위해 단말기 가격 담합이나 불법 보조금 공세를 펼치던 이동통신 3사는 한 목소리로 ‘월드컵 승리 기원’을 외치며 소비자들의 열망이 자신들의 열망인양 포장한다. ‘부~자 되세요’라며 카드 빚을 늘려놓고 삶의 의지를 꺾어놓던 금융회사들은 “세계를 다시 코리아의 팬으로 만들자!”라는 말 따위로 자신들의 본질을 은폐한다.
민주주의 국가라며 ‘인권 대통령’이라는 브랜드를 자랑하던 대통령이 평생 농사짓던 땅에서 농민들을 몰아내도 언론은 한 목소리로 월드컵 출전 선수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보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 채널이건 저 채널이건 지자체 선거에서까지도 월드컵 응원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건 완전히 전두환의 3S정책의 재현인 게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은 당연하다.
제발 ‘월드컵 바보’로 만들지도 말고, 되지도 말자
2002년 붉은 악마의 열광적인 응원을 보고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 ‘민족의 단결과 애국심을 확인한 계기’, ‘6월 항쟁의 민중의 힘을 재현한 것’이라는 등의 평가들이 있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보수나 진보진영 모두 월드컵을 ‘국민통합과 화합의 장’이라 생각하는 것에는 인식을 같이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진정한 국민통합이었을까?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의미도 들어갈 여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대~한민국’만을 외치는 것이 진정한 국민통합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대체 그 국민통합의 에너지는 왜 2002년 이후 한 번도 발휘되지 못하고 월드컵 시기에만 촉발되는가? 대체 월드컵이 그렇게 중요한 국민통합의 기제였다면, 왜 국회에서 아옹다옹 싸우는 인간들은 친선 축구경기 한 번 제대로 하지도 않고 삿대질과 몸싸움만 일삼고 있는지 모르겠다. 선거 운동원들까지 붉은 악마 머리띠(빨간색 뿔이 솟아나온 것처럼 보이는)를 하고 선전물을 돌리는 마당에.
진짜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면, 평생 논밭만 가꿀 줄 알고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은 생각도 못했던 농민들과, 갯벌에서 백합 캐는 일만 할 줄 알았지 새만금 사업 반대 투쟁은 생각지도 못했던 어민들과, 힘들게 일했어도 ‘너희는 비정규직’이라며 일할 공간에서 쫓겨나간 KTX 여승무원들과, 쌀농사 지어놨더니 칼로스에 밀려 길바닥에 쌀을 쏟아버려야 했던 농민들과, 열심히 일해도 늘어가는 카드빚에 한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왜 이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해야 하는지 설명했어야 하는 일이 먼저다.
내가 관심 있는 국민통합은 온 국민이 빨간색 셔츠에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화문에서 꼭지점 댄스를 추는 게 아니라, 대체 왜 서둘러 한미 FTA를 체결하는지,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지, 농민들을 몰아내고 미군 기지를 이전·확장하려는지 충분히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주는 작업을 통한 통합이다. 뭔가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으면서 정부가 하는 일을 욕한다고 몰아세우지 마라. 나도 선거권 있고 알만한 권리가 있단 말이다. 쳇.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