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골라 골라 썩은 감자 골라 - 대선 제대로 보기

1. 머리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숙연히 선서할 사람을 우리는 선출해야 할 시점에 있다. 문제는 방금 인용한 대통령의 직책을 수행할 만한 ‘지성’과 ‘인격’을 지닌 후보자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신한국당의 후보자로 나섰던 이한동은 자신이 내무장관 재직 시 현대중공업 노사분규에 1만 명을 투입해 사태를 진정(진정과 진압을 구별하여야 하지 않을까?) 시켰다면서 자신은 “정의가 있되 질서가 없는 나라보다 정의가 희생되더라도 질서가 있는 나라를 택하겠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옳다“면서 “우유부단해 결단을 안 내리는 건 나쁜 결정보다 더 나쁘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가 국민의 자유와 복리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할 수 있을까? 무질서를 질서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질서도 질서 나름. 그 내용과 방식을 분별해야 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질서란 박정희 식 질서가 아닐까?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절차인 ‘개방적 토론과정을 통한 최대한의 합의도출’이 우유부단으로 보일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신한국당 경선에서 탈락한 이한동씨는 물론 현재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는대선 후보자들 가운데 다가오는 21세기에 대통령의 취임 선서를 진정으로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지성’과 ‘인격’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대통령은 대선 후보자 자신의 ‘전인격’은 물론 민중의 지속적 관심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닌가? 나아가 대선이라는 꽃을 숲이라는 보다 크고 근본적인 맥락에서 사고하고 대응해야 하지 않을까?
  

      
      △ 1987년 12월 13대 대선 포스터(중앙선관위 자료)
    
2. 대선을 보는 관점

  “不學未必爲夜長 六經未必爲太陽”.  
학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밤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고 육경을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해가 뜨는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학문을 성실히 하든 게을리 하든 주야의 시작과 끝과는 관계가 없다. 즉 양자 사이에는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다. 세속적인 흥망성쇠와 물리적 시간의 흐름은 별개라는 것이 행간의 뜻일 것이다.

  이번 대선은 물론 대선 일반을 차원이 다른 동시에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시간의 두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시간의 두 차원이란 ‘유한한 당대의 생존에 직결되는 시간의 차원’과 최종적 결정권은 없으나 책임을 져야 하는 우리 현세대의 경계 너머 후대의 차원‘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시간 의식을 가질 때 이 사회에서 진행 중인 대선 과정은 껍데기뿐이요 본말의 전도임을 알 수 있다.

대선의 쟁점이 집권 여당 대선후보의 아들 병역문제였다가 그 문제의 호도책으로 국민회의의 한 의원의 명함표기문제가 제기되다 이제는 ‘대쪽’, ‘행동하는 양심’에 ‘산신령’까지 전-노의 사면운동에 강박 관념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이렇듯 대선의 쟁점이 축소, 왜곡된 것은 노-자간 계급적 역학관계와 그 잠재적 폭발성을 명시(明示)해 줌과 동시에 암시(暗示)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계급적 역학관계의 독립변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독자적 조직력과 독자적 의식성이다.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남한 민중은 10년 전 6-8월의 민주화투쟁 이래 1990년 전노협을 결성하고 이어서 어용노총을 대체할 수 있는 민주노총의 결성에 이르는 양적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조직과 지도력과 실행력은 중대한 과제로 남아 있다. 조직의 지도력과 실행력의 제고와 내실화는 민중의 독자적 의식 수준,  민중의 과학적 계급의식과 건실한 정서 그리고 인간 일반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상호 의존성에 입각한 윤리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중의 독자적 나아가 독창적 의식의 파도가 넘어야 할 암초는 경제주의, 지역할거주의, 민족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인간중심주의이다.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이 휴머니즘의 배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휴머니즘을 생태계 내에 위치 지워 질적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창출해야 하고 그런 방향으로의 모색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론에 기초한 윤리 의식을 가질 때 앞서 언급한 시간의 두 차원에서 현존 자본주의를 경제주의적이고 기술 결정론적으로 수용하는 수동적이고 야만적인 삶이 아니라 ‘현존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과학적인 계급의식의 발양(發揚)이 가능하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진정한 ‘인류의 역사시대’를 열면서 ‘인류역사의 전사(前史)시대’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대선과 이런 내용을 가지는 민중의 독자적 의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생각하면서’ 삶을 영위한다고 할 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소비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음식의 소화흡수 그리고 영양소의 산화에서 온다면 이것의 기초는 식물의 광합성이다. 광합성의 재료인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태양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면 태양(계)의 기원은 무엇인가? ‘별과 별 사이의 먼지(Interstellar Dust)'이다.

이런 인과의 연쇄 관계를 볼 때 대선을 포함하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민주주의의 뿌리는 사상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노동3권과 같은 기본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일반 상식을 넘어서는 ‘이성’, ‘도구적 이성’이 아닌 앞서 지적한 인식의 수평선을 확대해가는 의미의 ‘이성’에 의해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신성한 주권인 선거권을 행사합시다’라는 식의 구호의 함정을 간파해야 한다.

선거권 행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계급적 대립 관계에 있어서 각각에 유리한 삶의 조건을 평화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 제5항의 이른바 이적표현물의 제작, 수입, 복사, 소지, 운반, 배포, 판매, 취득 항목에 가위눌린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조항의 ‘정신’을 악몽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구체적 실천의 한 가지가 ‘선량’을 제대로 선출하는 것이다.

자신의 계급적 지위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돈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러한 경제적 곤궁의 뿌리를 인식하고 있는 ‘의식이 잠들지 않은 민중’이라면 선거의 ‘쟁점 형성’에 주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진)

3. 광주민주화투쟁과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야만성

  앞서 논의한 민중의 독자적 의식으로 대선의 ‘쟁점형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축소, 왜곡되고 있는 쟁점. 집권 여당의 대선후보 아들의 병역문제와 전·노 사면문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문제의 다른 표현이다. 국방의 의무(헌법 제39조)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으로부터 도출된다.

‘의식이 잠들지 않은 민중’이라면 국가 안보의 존재 이유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유지하고 실현하는 것임을 명백히 인식할 것이다. 국가 안보를 빌미로 자신들만의 질서와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서 ‘기본적 인권’의 파괴를 ‘우유부단하지 않게’ 서슴지 않고 단행하는 세력의 뱃속을 간파할 것이다.

  과연 한국의 안보가 물리력에 있어서 북한보다 열세일까? 현대전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전자전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 답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미국은 이미 1956년부터 소련영토 깊숙이 정찰기를 발진(發進)시켰고 1960년대 초 CIA와 공군의 주도로 비밀리에 Corona라는 첩보위성 계획을 추진했다. 오늘날 그 기술 수준은 거의 환상적이다. 미국의 사진 정찰위성인 KH-Ⅱ는 해상도가 높은 비디오 영상처리체제를 이용해서 목표물의 열 방출을 감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신지의 현재시간(real time)으로 영상을 전송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 정찰국이 시험하고 있는 “극초 스펙트럼 감지장치”(hyperspectral sensors)는 목표물의 형태, 온도, 운동은 물론 심지어는 화학적 구성까지도 탐지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은 걸프전에서 시험된 기술을 개선시켜서 궁극적으로는 미군의 직접 개입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첨단 전쟁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원격 조정하는 무인 전투기와 항공모함, 사이버 우주공간에서의 해킹으로 적국의 교통-통신-금융망을 파괴-마비시키기, 국방성-에너지성-첨단연구 프로젝트국 등이 개발 중인 무기로서 적을 살해하지 않고 무력화시키는 “비 살상무기”같은 것들이다.

전쟁이 물리적 화력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 역시 하나의 결정 인자라고 할 때 기본적 인권의 침해와 유린, 국가안보의 존재이유가 유명무실해진다면 그 결과는 자명해진다. 요컨대 ’의식이 잠들지 않은 민중‘은 일그러진 병역문제보다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남북한통일시대에 대비한 자주국방의 문제, 방위력의 성격과 수준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최근 우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는 ‘대인지뢰의 궁극적 사용금지’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미국이 대인지뢰의 사용, 제조, 저장, 이전의 전면금지와 지뢰철폐와 관련해서 예외적으로 ‘한반도에서의 계속 사용’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한국정부는 과연 무얼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땅의 정상배들은? “천천히 움직이는 대량살상무기”인 대인지뢰는 현재 약 50개국에서 생산-수출되고 있으며 세계 65개국에 최소 1억개 정도가 매설되어 있는데 대인지뢰로 매년 15,000명 이상이 죽거나 불구자가 되고 있으며 이들 중 다수가 어린이들이다.

즉 미국의 국방부가 북한의 붕괴에 대비해서 장기작전계획의 수립에 착수하면서 북한난민의 대량탈출을 논의하고 있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대인지뢰’문제를 어떻게 강 건너 불구경하듯 차렷 자세로 있을 수 있는가? 나아가 도대체 북한민중의 기아사태에 대한 지원문제, 통일과정에 있어서 민중의 삶의 조건의 진보적 변화문제를 왜 대선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고 있는가?

축소, 왜곡된 병역문제와 무관하지 않는 것이 광주민주화투쟁의 대상, 민주주의의 적인 전-노사면론이다. 광주민주화투쟁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경제성장이라는 껍데기 속에서 진행 되고 있는 인간적 삶의 타락과 파괴를 생성시킨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국가권력이 동요하는 상황 아래  민중이 억압적 노예생활을 떨쳐 버리려는 자발적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려는 흐름이 분출하는 희망이 싹트는 “역사의 개척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한편 자본을 중심으로 한 남한 자본가계급은 이 상황을 “안개정국”으로 보고 유신체제하 중복 투자된 중화학공업의 모순으로부터 기인하는 경제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정권을 창출하고자 암중모색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충류적 권력욕’으로 뒤범벅된 전-노의 군부 파시스트세력이 국가안보를 빌미로 학살을 감행한 ‘용서할 수 없는 반역’에 대한 ‘생명을 건 투쟁’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1980년 광주민주화투쟁의 잠재력을 되살린 1987년 6-8월 민주화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대선 상황에 임해야 한다. 김대중씨는 1983년 여름 L.A강연에서 “5.18은 내가 잡혀가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일으켰다”고 광주민주화투쟁의 역사적 성격을 축소시켰다. 이런 인물이기에 그는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수수했고 “도덕, 법을 지키는 것은 남도 지킨다는 믿음 때문이다. 남(김영삼씨임에 틀림없다)은 안 지키는데 나만 지킨다면 의미가 없다.”라고 발언한다.

인간세상이 그 본질에 있어서 ‘역동적인 모순의 발현과정’이기에 완전무결한 인간은 이제까지 없었고 영원한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어느 수준의 선의가 있는 직업정치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광주민주화투쟁과 관련한 그의 언행은 권력욕에 불타는 지극히 ‘속물적’인 것이다. 그는 금년 5월 11일 “전-노씨가 먼저 국민 앞에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더니 “화해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이뤄지는 것이지만 용서는 다르다. 그분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말 그 자체만 두고 평가한다면 동의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억 수수와 관련해서 “남은(도덕, 법을) 안 지키는데 나만 지킨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과 “(남들이 그런다고)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말에 과연 ‘논리의 일관성’과 ‘정치적 윤리성’이 있는가? 처자식을 나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나아가 그런 ‘생명에의 외경’을 좁은 가족의 울타리 너머에까지 연장시키는 것이 ‘생명의 논리이자 윤리’라고 할 때 당신은 이런 언행을 달리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요컨대 병역 문제와 전-노사면문제의 본질은 노-자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이며 대선의 쟁점이 이렇듯 축소, 왜곡된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픈 권력집단과 역시 그 일원인 천박한 언론의 동조 그리고 ‘의식이 잠들지 않은 민중’의 독자적인 의식과 조직력의 부족이다. 남한의 독점자본과 보수 언론은 자나 깨나 ‘고비용-저효율’의 타파와 ‘규제완화’를 주장한다. 그리고 국민회의와 신한국당은 ‘보수대연합’으로 각각 자신의 파당에 유리한 정권창출에 혈안이다.

‘보수대연합’이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팽창-‘국가사회주의’사회들이 체제붕괴를 통해서 혹은 능동적으로 체제유지를 위해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내로 편입되고 편입한 결과-속에서 남한(독점)자본이 ‘반주변부’적 위상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지배형태이다. ‘자본주의적 합리화’는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에 대한 실질적 포섭’을 기조로 삼으면서 ‘협애한 개혁’과 물리적 탄압을 적절히 구사하여 민중세력을 ‘분할’하는 것이다.

‘실질적 포섭’이란 자본이 ‘노동과정’에 있어서 노동계급의 최소한의 자율성마저 박탈하여 전제적 지배를 하려는 것이다. ‘보수대연합’이 형성되어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적극 추진한다면 민중의 생존권과 기본권 그리고 행복추구권은 어떻게 될까? ‘고비용-저효율’의 근본책임이 어디에 있는데 ‘규제완화’ 타령인가?

경쟁력 강화 민간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 절대규모의 기술 개발력이 미국을 100으로 했을 때 4.7에 불과하며, 일본 과학기술청의 분석에 따르면 기술수출액 및 해외특허건수를 기초로 한 연구개발 성과지표는 미국을 100으로 했을 때 한국은 2.0이라고 한다. 또한 기업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는 미국 4.2%, 독일 4.7%, 일본 3.47%임에 비해서 고작 1.36% 수준이다. 반면에 30대그룹의 소유 토지는 작년 말 현재 총 2억1천만 평으로 서울의 1.2배에 상당하는 넓이이고 땅값의 총액이 67조원에 달한다.

‘보수대연합’에 의한 ‘자본주의적 합리화’가 적극 추진된다면 한편으로는 (독점)자본의 능률성 제고와 이윤의 제고가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야만성’의 강화를 초래할 것이다. 1960년대 초부터 그 속도를 더해 온 공동체적 책임의식의 약화, 자연생태계의 파괴, 가족 공동체의 파괴, ‘황금만능주의’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런 ‘야만적 경향’을 김대중씨의 허무맹랑한 ‘새로운 광개토대왕시대’라는 ‘민족주의적 환상’으로 저지시키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독자적 민중세력은 ‘자본주의적 합리화’로 말미암아 ‘생존권의 벼랑’에 선 민중의 입장에서 심각한 고용불안문제, ‘전인교육’문제, ‘의료보험일원화’문제, ‘환경파괴’문제를 쟁점화 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합리화’라는 관점에서 문화마저 본격적으로 시장논리에 종속되어 가고 있는 경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문화산업’이 바로 그것이고 행정 ‘서비스’, 사법‘ 서비스’ 역시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다.

민중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민중의 ‘진정한 아들들’을 키우는 것이라는 점이다. 최선의 선거권행사는 당선될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라야 할 진실 된 새싹’에 투표하는 것이다.


      
△(왼쪽) 1932년 백범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 거사 직전 찍은 사진[동아일보 사진], (오른쪽)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소위에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 말, ‘견습 사관’으로 있을 때의 모습[한겨레신문 사진]

4. 청년학생의 ‘졸지 않는 역사의식’

지난 3월 <고대신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간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1위가 백범, 3위가 박정희였다고 한다. 고대생은 자신들의 저급한 역사의식에서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대들이 청소년기에 겪었던 각종 불만과 불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만만찮은 생존의 조건이 바로 4.19혁명을 산산조각내고 탄생한 5.16 파시스트 군부에 의한 유신체제의 모순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임을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조건 짓는 현실세계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상호관련성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고 그런 가운데 변화는 다차원에서 진행되면서 그 폭과 깊이가 확대, 심화되고 있는 복잡한 세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학생기의 특유한 ‘정의감’으로부터 탄생하는 ‘해방의 꿈’은 명석한 ‘과학적 분석’에 의해서 구체성을 띠며 ‘생명의 윤리를 모태로 하는 끈질긴 용기’에 의해서 영원한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

‘해방의 꿈’은 현세대에 의해서만 독점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바로 그 위치에서 ‘책임 있는 역사적 행동’이 무엇인지 깊고 넓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청춘의 정열 때문에 인식하기 쉽지 않은 진리. “人生處一世 若朝露晞”(인생이란 이 세상에 잠시 있다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임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1997년 9월 참개혁)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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