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가 가린 시스템의 책임
최근 고용노동부에 가면 볼 수 있는 현수막이 있다. “떨어지면 죽습니다.” 국무회의에서 노동부 장관이 노동재해를 줄이기 위해 직을 걸겠다며 명함에 새긴다고 했던 말이다. 노동부 산업안전업무 관계자의 명함 뒤편에도 비슷한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국무회의가 중계되는 장면, 현수막과 명함을 마주할 때마다 불편함이 쌓인다. 이 구호가 불편한 이유는 단순히 표현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안전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문구는 공포를 통해 행동을 통제하려는 방식이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공포가 효과적인 교육 수단인 것은 아니다. 반복적으로 노출될수록 사람들은 무뎌진다. 안전은 공포가 아니라 이해와 실천을 통해 지켜져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문구가 사고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곧 “조심하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로 읽히기 쉽다. 이런 구호는 시스템의 책임을 지우고, 위험을 감수하는 개인에게 침묵의 압박을 가한다. 또한 이 표현은 사고를 경험했거나 동료와 가족을 잃은 노동자와 가족들의 상처를 다시 건드릴 수 있다. 안전을 말하면서 노동자의 감정과 존엄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는 모순이다.
“떨어지면 죽습니다.” 이 문장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왜 떨어지는지, 무엇이 없어서 떨어지는지, 그 조건을 바꿀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현수막 아래에 작게 적힌 ‘안전모·안전대 착용’, ‘작업발판·안전난간 설치’ 같은 문구들은 이 정책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대책은 존재하지만 주요 메시지가 아니다. 실행은 부연이고, 경고가 중심이다. 현장은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안전 고리를 걸 수 없는 공정, 보호구를 착용하면 작업이 불가능해지는 구조, 작업을 멈출 권리가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위계. 이런 조건 속에서 “지켜라”는 말은 해결책이 아니라 책임 전가로 작동한다. 국무회의 발언과 이후 보도는 단호했다. 산재 사망은 줄여야 하고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는 반복됐다. 그러나 그 말들이 현장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구체성이 현실화하기는 더디기만 하다. 그래서 이 정부의 산재 정책은 강경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가볍게 느껴진다. 구호는 무겁지만, 그것이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는 현장에 남겨두기 때문이다. 말은 바뀌었지만 정책이 현장에 도착하는 방식은 익숙하다. 정책은 존재하지만 현실에 맞게 조정되지 않은 채 내려온다. 구호는 분명한데, 그 구호가 내려앉는 자리에서 현장의 현실과 맞물리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어쩔 수 없는 일!?
현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 즉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는 작업중지권의 ‘급박성’ 요건을 완화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시정조치요구권을 명문화해 위험 발견 시 개선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노동자가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고 작업을 멈출 수 있는 권리가 산업안전보건법에 처음 포함된 것은 1995년이다. 당시 경총은 작업중지권은 인사경영에 대한 침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사업장 임단협 체결에도 집단적인 대응을 하기도 했다. 당시 노동계는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인사경영에 침해라면 당연히 침해해야 한다고 대응했다. 1995~96년 작업중지권 쟁취는 전노협의 핵심 요구였다. 전노협은 단체협약 요구안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작업중지를 행하는 실천투쟁을 공동으로 진행했고 많은 사업장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 사이의 논쟁에서도 경영권을 이유로 작업중지권을 축소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기업의 경영 자유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생명권보다 우선하는 경영권은 헌법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일터에서는 여전히 생산과 업무를 우선하는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다. 위험이 눈앞에 있어도 ‘일이 먼저’라는 논리가 우세하며, “이 정도 위험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가 팽배한 것이 현실이다.
“위험 작업을 신고하는 앱이 있어요. 신고했더니 관리자가 찾아와서 ‘그거 왜 네가 신고했느냐, 네가 신고했으니 대책을 내놔 봐라’ 하더라고요. 내가 ‘위험하다고 신고한 사람이 대책 내놓는 사람인가, 회사가 대책을 내놔야지’ 했더니, ‘네가 신고했으니 네가 대책 내 봐라’ 이러는 거예요. 그 뒤에 불려갔더니 내가 신고했던 사진들을 스크린에 띄워 놓고 자기들은 의자에 근엄하게 앉아 있더라고요. 저한테는 목욕탕 의자에 앉으라고 하는데, 순간 모욕감을 느꼈죠. 제 다리가 기니까 앉으면 다리를 포갤 수밖에 없는데, 그걸 가지고 또 뭐라 하는 거예요. ‘여기가 예절 교육 시간입니까? 발표하러 온 시간 아닙니까?’ 하고 화를 냈죠.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하려 해도 관리자들이 한마디씩 거들면 이길 수가 없잖아요. 강압적으로 대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데, 결국 스트레스로 응급실까지 실려 갔습니다.”
이처럼 현실에서 노동자가 위험을 알리고 멈추는 행동은 여전히 큰 위험과 불이익에 노출된다.
노동자의 안전보다 이익과 효율이 우선하는 풍토는 사고를 반복하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임을 우리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2024년 9월 9일, 한화오션 4375호 컨테이너선 상부에서 랏싱브릿지 탑재 작업 중 노동자가 32m 높이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원청인 한화오션은 퇴근하려던 하청업체에 직접 작업을 지시했으며, 하청업체 소장이 위험성을 경고했음에도 작업은 강행되었다. 작업 공간에는 부실한 그물망만 설치돼 있었고, 노동자가 위험작업 중지를 요청했음에도 원청은 이를 거부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동자 사망 사고 대책 논의를 위해 노동부를 항의 방문한 자리에서 원·하청 노동조합과 지역대책위는 또 다른 죽음을 막기 위해 동일 직종 전체에 대한 작업 중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감독관은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전체 작업 중지는 무리”라고 답했다. “스물일곱 청년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동일한 사고가 반복되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항의에도 노동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면담 내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구조를 묵묵히 바라보는 스물일곱 살 노동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 한 감독관은 “아르곤 가스가 폭발 원인이 아니라면 작업중지로 인한 손해를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동료에게 털어놓았다. 작업중지 확대 요구를 묵살했던 당사자였다.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도 사업주의 손해를 먼저 걱정하는 노동부의 태도는 노동자 생명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경쟁과 생산성 향상을 통한 경제 발전을 절대적 선으로 여겨왔다. 그 과정에서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됐고, 기업에 제대로 된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의 감독을 느슨하게 만들고 사고 이후에조차 충분한 책임을 묻지 못하는 구조를 고착시켜 왔다.
멈춤의 권리,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선택
작업중지권은 단순한 대피권이 아니라 위험을 시정하게 하는 권리다. 위험 앞에서 몸을 피하라는 허락이 아니라, 위험한 노동을 거부함으로써 환경을 바꾸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시정조치요구권은 본래 작업중지권이 포괄해야 할 예방적·개선적 의미를 분리한 것일 뿐이다. 권리를 나누면 노동자의 개입은 다시 조건 속에 갇히고, 생명을 지키려는 행동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권리의 ‘수’가 아니라 ‘방향’이다. 작업중지권이 예방과 시정의 의미를 회복할 때 멈춤은 변화의 시작이 된다. 신고와 개입이 처벌이나 모욕이 아니라 보호와 존중으로 이어질 때, 노동자는 진정한 안전의 주체로 설 수 있다.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여러분이 일터에서 느꼈던 ‘멈추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지기 위해 국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사고 발생 후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국가가 위험을 인지한 순간 얼마나 단호하게 작업을 멈추게 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작업중지권 보장은 노동자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국가가 생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진정한 안전 메시지는 “죽을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니라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말해야 한다. 공포 대신 책임, 경고 대신 대책을 말할 때 안전은 현실이 된다. “우리는 위험 앞에 멈출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구호가 상식이 되고, 국가가 이를 뒷받침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 존엄이 우선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멈출 줄 아는 사회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회다.
최근 서울과 다른 지역 출장을 위해 기차를 자주 이용했다. 몇 달 전 청도 부근에서 발생한 열차 사고 후속 조치로 열차가 예정 시간보다 지연되는 일이 한동안 지속됐다. 20분 이상 지연되기도 했다. “지연되어 죄송하다. 안전을 위한 조치이므로 이해해 달라”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내가 이용하는 건물의 화장실에 “위험이 발견되어 청소노동자의 작업이 중지 중입니다”는 안내문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택배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물품 배송이 지연됩니다”라는 안내문자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사회를 상상했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증명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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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는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상임활동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노동자역사 한내와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