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유럽'은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연합을 정당화했나

1970년대에 좌파 정당들과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회적 유럽'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그러나 이 용어는 이후 유럽연합(EU)이 신자유주의적 신념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수사적인 주의 분산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출처 : Unsplash, Guillaume Périgois

작년 말프랑스 정치인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가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그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단일 통화의 기초를 마련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자크 들로르와 관련된 주요 아이디어 중 하나는, 1970년대 세계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좌파 정당들과 노조가 현 상황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모색하면서 제안된 '사회적 유럽개념이다그러나 들로르와 그의 위원회가 '사회적 유럽'이라는 슬로건을 받아들이면서 이 개념은 급진적 의미를 상실했고결국 유로존의 신자유주의 틀에 대한 알리바이로 전락했다그 결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렐리 디아나라(Aurélie Dianara)는 에브리 대학교(University of Évry) 연구원이자 『사회적 유럽가지 않은 길긴 1970년대의 좌파와 유럽 통합 (Social Europe, the Road not Taken: The Left and European Integration in the Long 1970s.)』의 저자이다이 인터뷰는 Jacobin Long Reads 팟캐스트의 녹취록을 편집한 것이다인터뷰 전체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다니엘 핀: 1970년대에 사람들이 '사회적 유럽'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기 전로마 조약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영국아일랜드덴마크 같은 국가들이 가입할 때까지 유럽 프로젝트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전후 유럽 통합은 보통 유럽연합의 공식 담론에서 장 모네(Jean Monnet),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와 같은 유럽의 선각자적인 인물들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 프로젝트로 묘사된다하지만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주로 보수적인 기독교 민주당과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주도한 경제 프로젝트였다사회주의 세력은 초기에 미미한 역할을 했으며공산당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까지 유럽 기관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1957로마 조약이 체결되어 오늘날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설립되었다이 조약은 벨기에프랑스서독이탈리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가 창립 회원국으로서 공동 시장과 관세 동맹을 결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이 조약은 많은 논의와 준비 과정을 거쳐 성사되었고경제 통합이라는 자유주의적 비전이 다른 사회적 비전들을 희생시킨 채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조약의 248개 조항 중 사회 정책에 관한 조항은 12개에 불과했고그 중에서도 실질적인 관련성이 있는 조항은 단 세 개뿐이었다그중 하나는 유럽사회기금(ESF)을 설립하는 것이었지만자금이 부족하여 1960년대 후반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또 다른 중요한 조항은 EEC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임금을 규정한 것이었으나이것도 1970년대 후반에 가서야 제대로 적용되었다마지막으로노동자의 사회적 보호와 노동 조건에 대한 조항이 있었지만이것도 나중에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결론적으로당시 유럽 지도자들은 경제적 번영이 사회적 진보를 자연스럽게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고, EEC가 바로 그런 번영을 창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하지만 이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사회적 결핍이 심각했다.

다니엘 핀: 그 당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공산주의 좌파 정당들은 유럽 통합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고어떻게 대응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유럽 통합은 20세기 유럽 좌파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특히 특정 시기에는 그 논쟁이 더욱 격화되었다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마셜 플랜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2차 세계대전 직후 시행된 마셜 플랜은 미국의 차관으로 자금을 조달해 유럽 복구를 도운 프로그램이었다이 플랜은 당시 유럽 통합을 목표로 한 다른 계획들과 초기 냉전의 역학 관계와 맞물려 있었다.

공산당과 노동조합은 마셜 플랜과 1951년에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그리고 유럽경제공동체(EEC)와 같은 유럽 통합 프로젝트를 강력히 반대했다그들에게 이러한 계획은 소련을 고립시키고유럽을 미국 주도 하에 서방 블록의 일부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프로젝트로 보였다.

이들은 유럽 통합 초기 프로젝트를 자본주의부르주아가톨릭군국주의그리고 식민주의라고 비난했다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그리고 7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태도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공산주의 노동조합이 가장 먼저 EEC와 공동시장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는데외부에서 투쟁하고 폐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내부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조르지오 아멘돌라(Giorgio Amendola)가 이끄는 친유럽 개혁파가 있었고이탈리아 공산당을 시작으로 다른 공산당들도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프랑스 공산당도 이탈리아보다는 늦게 입장을 바꾸었지만점차 유럽 공산주의 개혁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러 공산주의 노조와 정당들은 유럽 기관에 대표를 파견하고 유럽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좀 더 복잡한 상황이 있었다유럽 사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유럽 통합에 대한 태도에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다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의 정당들은 경제 및 정치적 통합에 찬성하며전후 통합 계획을 지지했다반면영국 노동당과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당은 초국가적 유럽 통합에 반대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또 다른 진화를 겪었다. 1950년대 초쿠르트 슈마허(Kurt Schumacher)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보수주의성직주의카르텔(capitalism, conservatism, clericalism, and cartels) 등 유럽의 4대 C를 비난하며 유럽 통합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그러나 로마 조약이 체결될 무렵독일 사회민주당은 입장을 바꾸어 조약에 찬성표를 던졌다.

영국 노동당은 1973년 영국덴마크아일랜드가 EEC에 가입한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이거나 분열된 태도를 유지했다나는 이러한 분열이 1970년대 유럽 좌파가 유럽 통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결국 사회적 유럽을 실현하지 못한 여러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니엘 핀 : 1970년대의 경제 위기와 전후 호황의 끝은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전후 호황의 종말은 유럽 지도자들이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변화를 고려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유럽 공동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그러나 그들을 같은 방향으로 이끈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는 서유럽에서 노동자 운동학생 운동페미니즘 운동환경 운동과 같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고이는 유럽 지도자들에게 사회적 문제를 더 많이 고려하게 만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요소는 제3세계 국가들이 신국제경제질서라는 명분 아래 권력과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점이다이 역시 유럽의 결정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통화 체제가 붕괴되었고전후 호황은 소진되었다이러한 시기는 서유럽에서 30년 동안 복지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특징짓던 전후 타협이 해체된 시기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대안과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1970년대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여러 가지 길이 있었고그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였다. 1974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경제학자 군나르 미르달(Gunnar Myrdal)과 오스트리아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두 사람은 매우 대조적인 경제적 사상을 대표했지만그만큼 그 당시에는 다양한 대안들이 가능했다.

이 시기를 기회로 삼아 유럽 좌파는 '사회적 유럽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유럽 좌파는 정치적 성공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서유럽 전역에서 정부를 이끌었으며전통적 텃밭인 스칸디나비아는 물론 서독네덜란드영국그리고 1980년대 초에는 프랑스에서도 정권을 잡았다이탈리아와 룩셈부르크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연립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동시에 서유럽 공산당은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선거적 성공을 거두었다유럽의 노동조합들도 조합원 수와 영향력 면에서 정점을 찍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유럽 좌파는 유럽 통합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내부로부터 유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긴 1970년대 동안사회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그리고 조금 덜하지만 공산주의 정당들도 유럽 정책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위해 초국가적 협력 방식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이 창설되었다이는 냉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기독교민주주의공산주의 전통을 가진 노동조합들이 하나로 통합된 조직으로약 4천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게 되었다이듬해에는 오늘날 유럽사회당(PES)의 전신인 유럽공동체 사회당연맹이 설립되었다.

다니엘 핀 말한 것처럼이 시기는 유럽과 세계 정치에서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던 순간이었다그런 맥락에서 유럽 좌파는 자신들의 목표를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유럽 협력을 위해 어떤 주요 제안들을 내놓았는가당신이 언급한 '가지 않은 길또는 '여러 가지 않은 길중 어떤 계획들이 실현에 가까웠던 적이 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 1970년대에 제안된 '사회적 유럽프로젝트는 주로 유럽의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그리고 주요 노동조합특히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에 의해 구상되었다이 프로젝트는 경제를 규제하고 계획하며 민주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노동 시간을 단축하며유럽 차원에서의 사회 및 재정적 조화를 이루는 등의 제안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예를 들어유럽 기관들을 활용해 경제를 규제하고 계획하며 민주화하는 것유럽 차원에서 사회적·재정적 제도를 조화시키는 것생활 수준과 노동 조건을 향상시키고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것 등을 목표로 삼았다이러한 일련의 제안들은 대체로 자본보다는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힘의 균형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 프로젝트는 환경 문제도 포함했으며좌파가 반민주적이거나 비민주적이라고 간주한 유럽 기관의 민주화를 위한 제안도 포함되었다또한 국제 경제 질서를 제3세계에 유리하게 재조정하려는 열망도 있었다이러한 계획들이 실현에 가까웠던 적이 있었는가대답은 '있기도 하고없기도 하다.‘

1970년대에 이러한 제안들 중 일부는 유럽 의제에 반영되었다예를 들어유럽 좌파의 노력 덕분에 1974년 유럽공동체가 최초의 사회 행동 프로그램을 채택하게 되었다그 결과 유럽 사회 기금의 강화와 더불어 직업 훈련 및 근로 조건을 위한 다양한 유럽 기관들이 설립되었다가장 중요한 진전은 성평등과 직장에서의 건강 및 안전 문제였으며유럽 이사회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이 두 분야에 관한 일련의 지침들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1970년대 동안 좌파가 구상한 '사회적 유럽프로젝트의 주요 제안들이 실제로는 결코 실행되거나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시기에 유럽 좌파가 벌였던 두 가지 대표적인 투쟁의 사례가 있는데그들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첫 번째는 완전 고용을 지지하는 대안 경제 전략을 위한 싸움이었다유럽 좌파는 특히 임금 손실 없는 노동 시간 단축이라는 요구를 부각시키기로 했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유럽 좌파의 대규모 캠페인이었다이 싸움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유럽노동조합연맹(ETUC)은 이를 지지하는 첫 범유럽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그러나 이 캠페인은 결국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유럽 이사회는 1984년에 이 주제에 대해 구속력이 없고 매우 야심적이지 않은 권고안을 채택했을 뿐이다.

또 다른 중요한 싸움은 직장과 경제의 민주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당시 매우 중요한 주제였으며이는 1980년 다국적 기업에서 노동자의 정보 및 협의 권리에 대한 유럽 지침 제안으로 이어졌다이 제안은 이를 추진한 네덜란드 출신의 사회민주주의자 헨크 브레델링(Henk Vredeling) 사회 담당 집행위원의 이름을 따 브레델링 지침으로 불렸다.

물론 이 지침은 고용주들과 경제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유럽 기관 내부에서도 중요한 반대에 직면했다결국이 지침은 1986년 유럽 이사회에서 수년간의 논의 끝에 폐기되었다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한 후속 지침이 나오긴 했지만그것들은 긴 1970년대 동안 유럽 좌파가 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덜 야심찬 내용이었다.

다니엘 핀 이제 위기와 가능성의 순간에서 유럽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발전한 방식을 살펴본다면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기 전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1980년대 초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정부에서 장관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

오렐리 디아나라 자크 들로르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매우 잘 알려진 정치인이다그가 작년 말 사망했을 때정치계와 언론계 엘리트들은 그를 한결같이 위대한 유럽인으로 칭송했다들로르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기 전, 1980년대 프랑스 좌파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그의 정치적 궤적은 1970년대 급진적인 물결을 타고 1980년대에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전환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1981프랑스에서 좌파가 승리하여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다미테랑 정부는 처음에 산업과 금융의 국유화일자리 창출최저임금 인상 등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했지만결국 경제적 압력에 직면하여 신자유주의로 전환했다들로르는 재무부 장관으로서 이러한 전환을 이끌었다. 1983그는 긴축 정책으로의 전환을 주도했고이는 프랑스 좌파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자크 들로르는 사회 기독교주의자로서 프랑스 국립은행에서 일했고국가계획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1970년대 초에는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대통령의 샤반델마스(Jacques Chaban-Delmas) 총리 밑에서 특별 고문으로 일하다가, 1974년 사회당(PS)에 입당했다.

당시 사회당은 프랑수아 미테랑의 지도 아래분열된 프랑스 사회주의 세력을 재편하고 있었다사회당은 프랑스 공산당(PCF)과 공동 프로그램을 채택하며정부와의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그 시기에 사회당은 자본주의와의 결별을 주장하며당시 미테랑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다. 1970년대에프랑스 신좌파 — 흔히 제좌파라고 부르는 — 의 흐름 속에서 들로르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사회주의 계획과 노동자 자기관리를 기반으로 한 분권화된 형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상황은 크게 변했다. 1981년 5프랑스에서 23년간 이어진 우파 정부가 끝나고 좌파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고공산당 장관 4명을 포함한 사회주의 정부가 출범했다들로르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새 정부는 출범 초기에 산업과 금융의 광범위한 국유화공공 부문에서의 일자리 창출최저임금 인상케인즈주의적 경기 부양책 등 여러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도입했다하지만 동시에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Kohl)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를 비롯한 프랑스의 주요 교역 파트너들은 당시의 경제 위기에 대응해 긴축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는데이는 프랑스 좌파의 정책과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그 결과프랑스는 점점 더 무역 및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통화 가치 하락과 투기 압력도 계속되었다프랑스는 대출을 확보하고 지출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당시 유럽 통화제도(EMS)의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통화 정책에 대한 여지가 제한적이었다.

1983년 3프랑스 정부는 프랑화 평가절하를 세 번 겪은 후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고수할지아니면 EMS 잔류를 위해 프로그램을 포기할지 선택해야 했다결국 프랑스는 프로그램을 포기하고긴축예산 삭감국유화 철회금융 규제 완화를 기반으로 한 급격한 경제 정책 전환을 단행했다.

이러한 긴축 정책으로의 전환(프랑스어로 tournant de la rigueur)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좌파에게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이 전환은 유럽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자크 들로르의 영향력 아래에서 추진되었다.

다니엘 핀 : 1980년대 중반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된 자크 들로르는 어떻게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이라는 개념을 채택하고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변형했는가그는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자크 들로르는 보통 위대한 유럽인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이는 그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유럽 사회적 대화를 제도화하고유럽의 사회 및 결속 기금을 강화하며사회 분야에서 유럽의 권한과 규제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1985년에 새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들로르는 경제 자유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그 핵심은 단일 시장 프로젝트로상품자본서비스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모든 남은 장애물을 제거해 유럽공동체의 기존 내부 시장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다이 프로젝트는 모든 유럽 정부의 지지를 받았고특히 마거릿 대처와 헬무트 콜 정부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다양한 기업 로비의 압력특히 유럽 산업 원탁회의(ERT)의 영향은 단일 시장 프로그램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3년에 창설된 ERT는 초기에는 볼보(Volvo), 네슬레(Nestlé), 피아트(FIAT), 필립스(Philips) 등 유럽 최고의 다국적 기업 17곳의 CEO들로 구성되었다이 프로그램의 이론적 근거는 1986년 단일유럽법(Single European Act)에 의해 제도화되었고그 방향은 자유 시장 지향에 매우 중점을 두고 있었다그 이후 몇 년 동안 자본 이동의 자유화은행 및 보험 부문의 규제 완화에 관한 중요한 지침들이 채택되었다.

동시에자크 들로르와 그의 집행위원회가 단일 시장 프로그램의 성공을 발판으로 사회 분야에서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추진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그는 1970년대에 사회당에서 활동하며 사회적 유럽 프로젝트를 잘 알고 있었고이를 구상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그러나 그의 의제 중 사회적 측면은 경제적 측면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예를 들어자크 들로르가 집행위원회에서 제안한 패키지들은 유럽 기관 내부와 회원국 간의 긴 협상 끝에 채택되어 경제 및 사회적 결속 기금이 증가했다그러나 이러한 기금은 여전히 제한적이었고유럽 공동체 전체 예산 역시 제한적이었다오늘날에도 EU의 전체 예산은 유럽 GDP의 1%를 간신히 넘을 정도로 매우 적다.

또 다른 사례는 1989년에 채택된 노동자의 기본 사회적 권리 헌장이다이 헌장은 몇 년간 유럽 좌파와 노동조합이 요구해온 것이었으며몇 가지 사회적·경제적 권리를 선언했다하지만 이 헌장은 구속력이 없었다같은 해 헌장을 이행하기 위해 채택된 사회 행동 프로그램 역시 단 47개의 수단으로 구성되었으며이는 단일 시장 프로그램에 비해 매우 적은 수였다이 47개 수단 중 대부분은 구속력이 없는 권고안과 의견에 불과했다.

다니엘 핀 : 들로르가 위원장직에서 물러날 무렵유럽 공동체는 유럽연합으로 전환되었고새로운 회원국들이 추가되었다이 과정에서 유럽 공동체는 질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들로르는 1985년부터 1995년까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그가 물러날 즈음유럽연합은 마스트리히트 조약(Maastricht Treaty)에 의해 창설되었고유럽연합으로 전환되었다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단일 통화즉 유로화(Euro)를 도입하기 위한 경제 통화 동맹(EMU)이 창설된 것이다들로르는 유로화를 설계한 핵심 인물로 기록되었다.

1988유럽 이사회는 경제 통화 동맹을 실현하기 위해 들로르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설치했다. 1년 뒤들로르는 보고서를 발표했고이 보고서는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반영되었다이 조약은 정부의 예산 적자를 GDP의 3% 이내로공공 부채를 GDP의 60% 이내로 제한하는 규칙을 도입했다하지만 실업률이나 사회적 지표를 고려한 규칙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새로운 조약의 핵심은 영국과 덴마크를 제외한 회원국들이 2000년까지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권한 아래 단일 통화를 채택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이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왜냐하면 유럽 정부들이 통화 발행과 환율 조정 등 국가 경제 및 통화 주권의 핵심적인 부분을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또한 처음으로 수렴 기준(Maastricht Criteria)이라고 불리는 규정을 공식적으로 도입해회원국의 경제 정책에 강제적 규칙을 적용했다예를 들어정부 예산 적자는 GDP의 3% 이내로공공 부채는 GDP의 60% 이내로 제한했다또한회원국들은 인플레이션율을 낮게 유지해야 했다들로르가 유감스럽게도조약을 설계한 협상가들은 실업률이나 다른 사회적 측면과 관련된 기준을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 시기에는 안보 및 외교 정책 분야에서의 통합 강화사법 및 치안 분야에서의 긴밀한 협력 등 다른 질적 변화도 있었다하지만 주요 변화는 단일 시장과 경제통화동맹으로이는 EU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헌법적으로 명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니엘 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 마련된 단일 시장과 프레임워크는 '사회적 유럽'이라는 개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명한 사실은조세 및 사회적 조율 없이 무역을 자유롭게 하고서비스 규제를 완화하며자본이 EU 내에서 (또는 어떤 형태의 지역 무역 지역 내에서자유롭게 이동하도록 허용하면노동자들과 국가 복지 제도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다단일 시장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사회적 권리임금과세재분배를 둘러싼 바닥을 향한 경쟁을 촉발시켰다.

유럽 좌파는 이미 1970년대에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들은 경제 자유화가 아닌 사회적 규제와 상향 조정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 강화경제 계획을 이야기했다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단일 시장 프로그램은 이러한 좌파의 요구와는 반대로 경제 자유화를 촉진했다사회적 유럽의 목표는 여전히 경제적 자유화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1986년 단일유럽법(Single European Act)과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경제를 자유화하고 예산 엄격성을 부과했지만노동조합과 유럽 시민들에게 약속된 유럽 통합의 사회적 차원은 계속해서 뒤처졌다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사회 정책에 관한 합의가 부속서로 포함되었지만이는 사회 분야에서 유럽의 권한을 거의 증가시키지 못했으며신생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 헌법화를 상쇄할 수 없었다.

조약에는 사회 프로토콜도 포함되어 있었으며이는 고용주노동조합유럽 기관 간의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제도화했다그러나 이는 고용주들의 저항과 유럽 기관 및 정부의 압력그리고 사회 운동의 부재로 인해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프로토콜이 도입된 첫 20년 동안 부모 휴가시간제 근무기간제 고용에 관한 세 가지 지침만 통과되었고그 결과는 매우 빈약했다오늘날 명백히 보이듯이유럽은 1970년대 유럽 좌파가 추구했던 사회적 유럽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으며사회적 차원은 자유 시장과 사유 재산 확대와 양립할 수 있도록 맞춰진 신자유주의적 유럽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니엘 핀 :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유럽은 유로존 위기로 인해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자크 들로르가 위원장으로서 남긴 유산은 이 위기에서 어떻게 작용했는가?

오렐리 디아나라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들로르 보고서에 따라 설계된 경제통화동맹(EMU)은 20개국의 통화 정책을 초국가적 수준으로 이관했다이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하던 통화 수단을 잃게 되었다또한 마스트리히트 기준에 의해 투자 능력도 제한되었다.

독립적인 유럽중앙은행(ECB)은 독일의 오르도자유주의 정책에 크게 맞춰져 있었으며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으로 두고 실업률 해결보다 우선시했다이러한 상황에서 통화동맹 안에 실질적인 연대 메커니즘이 없었기 때문에이 구조는 특히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아일랜드와 같이 전통적으로 통화와 경제가 취약한 국가들에게 족쇄가 될 수밖에 없었다이들 국가는 유로존에서 가장 강력한 통화인 독일 마르크화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유로존은 심각한 부채 위기에 직면했고이 위기는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이 위기는 자유화와 통화동맹이 특히 유럽의 취약한 경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었다그리스가 가장 분명한 사례였다그리스는 경제 구조상의 여러 문제로 인해 2008년 이후 위기로 큰 타격을 받았고부채가 급격히 증가했다그 결과그리스는 시장으로부터 징벌적 금리를 부과받아 차입 비용이 증가하고 부채와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리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유럽연합에 대출을 요청하게 되었다그리스의 디폴트 위험은 그리스 국채에 대규모로 투자한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이 때문에 트로이카(Troika), 즉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ECB, IMF는 그리스가 공공 서비스(건강교육삭감최저임금 및 임금 전반의 파괴 등 엄격한 긴축 조치를 이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1,100억 유로의 대출을 강요했다.

결론적으로이 자금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로 흘러들어갔고그리스 경제는 이러한 긴축 조치로 인해 파괴되었다이는 크게 그리스가 통화 정책에 대한 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EMU 내 실질적인 연대 메커니즘의 부재와 신자유주의적 마스트리히트 기준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니엘 핀 : 유럽연합의 개혁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지난 15년간 유럽 좌파에서 중요한 이슈였다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이 논쟁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오렐리 디아나라 : 이 질문은 내가 작업 중이거나 책을 쓰면서 계속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이다긴 1970년대 동안 유럽 좌파가 사회적 혹은 사회주의적 유럽을 건설하는 데 실패한 경험은 오늘날 좌파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EU를 사회적민주적생태적 진보의 도구로 변모시킬 가능성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비관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강조할 필요가 있는 점은, 1970년대에는 노동운동과 좌파에게 훨씬 유리한 힘의 균형이 존재했다는 것이다당시 유럽 사회경제적 거버넌스의 틀도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했다당시 유럽 테이블에는 6개 혹은 9개 국가만 있었지만지금은 27개 회원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신자유주의는 유럽의 조약과 정책에 훨씬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21세기 사회적 유럽을 다시 상상하려는 시도는 점점 더 환상처럼 보인다최근 몇 년 동안코로나19 위기로 인해 유럽 지도자들은 마스트리히트 합의의 일부분을 열어야만 했다예를 들어안정 협약이 몇 년 동안 유예되었다그러나 보수 세력은 다시 이 규칙들을 강하게 재부과하려 하고긴축 정책을 재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EU가 변할 수 있다고 믿거나혹은 다른 형태의 유럽 협력과 단결로 대체될 수 있다고 믿는 좌파에게는사회적 유럽의 잊혀진 패배가 좌파 내부의 분열과 전략적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속적인 과제를 던져준다이 패배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좌파가 국제주의에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녹색급진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시민 사회 단체들이 몇몇 면에서 유럽 차원에서 더 잘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낙관하는 좌파도 있다오늘날 시민들은 과거보다 유럽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또한 기후 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최근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국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다하지만 나는 이 패배의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좌파가 신자유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유럽에 명확히 반대하는 진정한 초국가적 연합이나 블록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좌파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분명히 지향하는 공동 프로그램에 합의하고대중적인 동원에 기반한 공세를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목표에 아직 매우 멀리 있다이러한 개입이 없다면좌파가 EU를 사회적 유럽으로 변화시키거나유럽의 진보적 사회·경제·환경 전환에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바꿀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출처] How “Social Europe” Became the Alibi for a Neoliberal EU

[번역이꽃맘

덧붙이는 말

오렐리 디아나라(Aurélie Dianara)는 에브리 대학교의 연구원이고, 다니엘 핀(Daniel Finn)은 자코뱅에서 피처 에디터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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