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밖 모처, ‘경찰과 그 공포 속’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 대회

당 대회 장소를 특정하지 못하는 2차 당 대회

기억은 엇갈리기 마련이다더구나 기록도 일관되지 않았다.

조선공산당 2차 당 대회가 그렇다우선 일제 관헌이 자료에는 당 대회 장소가 서대문형무소밖 독립문 부근 (김준연등 32인 예심종결결정), 서대문 형무소 부근 (김준연등 28인 판결문), 혹은 천연동 (김철수 신문조서 3으로 기록되었다일반적으로 사건장소가 주소까지 특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회의장소가 특정되지 않고 있다.

회의를 주재하였고 당시 책임비서였던 김철수의 기억과 진술도 다르다김철수 본인이 직접 기록하거나 구술한 자료집인 ⟪지운 김철수⟫에 나온 기록을 보면 마찬가지로 정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없다.

예컨대 같은 책 116쪽은 현저동에서 당 대회를 마칠 적에 제일 좋았네 그래 가지고 인제 그거 내가 모스크바 당 대표로 모스크바 가서 그 당 승인 맡아 올 적에 오죽 좋았겄어.’ 234쪽에서는 공산당 제2차 당 대회를 서대문 감옥 앞집에 가서 했어’ 236쪽에서는 ‘2차 당 대회를당 대표 회의는 서대문 감옥 아랫집에서 밤을 새우고 했네.’ 라고 기술되어있다김철수가 위의 구술을 하던 시기는 당 대회로부터 5~60년 후의 일이니 정확한 장소를 기억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당대에 나온 다른 자료인 1929년 11월 1일자 동아일보 호외를 보면 당 대회 장소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호외 1단의 기사를 보면 시내 죽첨뎡 차모의 집에서’ 라고 기술되어있다.

우선 기사에서 나온 차모라는 사람이 눈에 뜨인다죽첨뎡의 차모라 함은 우선조선공산당의 마지막 책임비서였던 차금봉이 떠오르는데 차금봉은 1928년 현재 경성부 죽첨정 3정목 443번지에 살고 있었다지금의 지도에는 지번이 멸실되어 정확한 특정은 어렵지만 대략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1번 출구와 5호선 충정로역 10번 출구 사이의 부근으로 추정된다. 

1928년 현재 차금봉의 주소지. 출처 : 한내

위의 기사에 주목한 것은 회의의 성격이 극도의 보안이 유지되어야하는 회의이기 때문이다. 2차 당 대회는 비밀결사인 조선공산당의 지도부 선출과 당 사업을 심의 의결하기 위해 조선공산당의 핵심간부들이 모이는 회의이기 때문이다또한 2차 당 대회가 개최되던 1926년 12월 6일은 일경에 의한 조선공산당에 가해진 강력한 탄압이 진행 중이던 때에 진행된 대회였다김철수의 회고대로 경찰과 그 공포 속에서’ 결사의 각오로 치러진 대회였기에 신뢰할만한 사람과 장소가 보장되어야 했다. 1차 대회처럼 대낮에 적의 허를 찌르는 담대한 전술을 펴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이러한 위험한 부담을 기꺼이 감수할만한 지지자 혹은 당원이 제공하는 장소에서 회의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타당하다고 생각된다당시의 가옥구조를 고려하면 방음이나 드나드는 사람들이 주변의 눈에 뜨이기 쉬웠기에 보안이 보장된 주변 환경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동아일보 호외에 죽첨정 차모의 집이라고 쓰인 것도 당시 일제관헌이 기자들에게 제공했던 발표가 기사의 재료였을 터인데 그렇다면 체포된 가담자 누군가의 진술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그 가담자의 진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기사의 집주인의 신변에 더 이상 위협이 가지 않을 상황도 고려했을 법 하다그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 기사가 나오던 시점인 1929년 11월 1일 장소 제공자로 추정되는 차금봉은 이미 일제 관헌의 고문으로 인하여 옥중사망 되어 이미 고인이 되어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의 추론은 위에 밝힌 대로 김철수 본인의 회고나 일제 관헌의 기록과 배치되는 점이 많다그렇다면 어디일까김철수는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진술할 때에는 천연동으로 말하고 있다하지만 천연동은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그리고 일제 관헌이 자료에서 말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부근이나 독립문 부근으로 보긴 어렵다오히려 김철수의 회고를 따른다면 서대문 감옥 앞’ ‘서대문 감옥 아랫집’ 등의 회고로 보아 현저동일 가능성이 높다더구나 김철수 본인도 현저동에서 당 대회를 했다고 회고 하지 않았던가당시의 현저동은 지금의 법정동인 현저동과 무악동을 포함하고 있다현저동과 무악동이 분리된 것은 1975년 10월의 일이기에 김철수가 구술한 현저동은 지금의 무악동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1923년 왼쪽 위부터 현저동, 천연동일대 지도. 출처 : 한내

이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당시 현저동은 비밀스런 당 대회를 성사시키기에 적당한 장소라는 점이다당시 당 대회에 참석한 인원은 코민테른에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16명이 참석하였다각 도의 대표들인 대의원들과 당 대회를 준비해온 중앙집행위의 성원들이 그들이었다아마도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회의 참석자를 제외하고 회의진행을 돕는 몇 명이 더 있다고 가정할 때 16명 보다 많은 인원이 회의 장소에 모였을 가능성이 있다이들 대부분은 오랜 기간 사회주의 운동에 종사해왔던 이들이며 일경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그런 처지의 이들이 모이기에 현저동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을까서대문 형무소의 바로 맞은편 현저동에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이들의 옥바라지를 위한 숙박시설등이 있었다또한당시 서대문 형무소에는 25년 1차 검거와 26년 2차 검거 외에도 많은 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구속된 상황이었기에 면회객을 가장한 이들이 모이기 위한 장소로도 일경의 특별한 의심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된다이러한 조건이 현저동을 당 대회 장소로 지정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은 추론에 불과하다조선공산당이 개최한 공식적인 4차례의 당대회중 장소가 특정되지 않은 당 대회는 2차 당 대회가 유일하다정확한 당 대회를 특정하는 자료는 필자가 부족함으로 아직 보지를 못하였다하지만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을 연구하는 다수의 연구자들은 천연동을 당 대회 장소로 지목하고 있다그러나 이들 연구자들이 말하는 천연동에 대한 근거는 따로 밝히지 않고 있다아마도 일제관헌의 재판기록이 근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다만 반병율의 ⟪남한에 남은 항일 혁명가 김철수의 삶과 한국전쟁⟫에는 당 대회 장소가 아현동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3차 당 대회 장소와의 착각 때문이 아닌가 한다.

2차 당 대회

2차 당 대회는 안팎의 어려운 조건에서 성사시킨 대회였다하지만 동시에 사회주의 운동진영의 통일과 단결을 바라는 열망 하에 치러진 대회였다.

체포를 면한 유일한 중앙집행위원이었던 김철수의 불굴의 용기와 대의에 대한 헌신도 있었지만 운동선의 통일과 방향전환을 주장하던 당 외부 세력의 대규모 입당으로 세력교체가 이루어진 대회이기도 했다.

당외 세력의 대규모 입당으로 세력교체가 이루어진 배경에는 그동안의 주류였던 화요파와 서울파라는 양대 세력이 더 이상 조직적인 세력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화요회를 중심으로 하는 화요파 공산그룹은 북풍파와의 연합으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1차 당 대회 이후 김재봉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세력이었지만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탄압에 의해 조직원의 상당수가 구속되거나 해외 망명을 하게 되어 조직적인 활동이 어려워졌다서울파 공산그룹은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승인이후 공산당에 참여를 주장하는 신파와 그 반대인 구파로 분열되었고 그 결과 다수파인 서울파 신파에 의해 서울파 공산그룹의 정파활동은 축소되었다.

서울화요 두 세력이 처한 상황 외에도 코민테른의 배타적 지지를 얻기 위한 상호 경쟁은 그들의 운동에 대한 헌신적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주의 운동진영의 통일을 바라는 새로운 주체형성이라는 대중의 열망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이러한 과정을 통해 등장한 주체들은 북경의 혁명사일본 유학생 중심의 일월회서울 신파로 구성되었다이들은 세칭 맑스레닌주의를 의미하는 ML파로 불렸으나 이는 정당한 호명이 아니다조직 통일과정에서 노선을 통일한 그들은 이미 26년 12월 당 대회가 있기 훨씬 전인 26년 3월 5일에 레닌주의동맹을 결성하였고 자신들을 LL(Leninism League) 그룹으로 자칭하였다.

조선 사회주의 운동에 등장한 이들 레닌주의동맹 그룹은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의 파벌적 요소를 조직적으로 분별 정립하여 새로운 전위당을 건설하려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고 2차 당 대회는 이들의 조직적인 의지를 관철한 대회였다.

이들은 당 대회가 있기 전인 8월에 조선공산당의 고려공산청년회와 서울청년회의 고려공산청년동맹의 통합을 먼저 이루었다이는 6.10 만세 운동이후 안팎으로 높아진 운동의 통일을 바라는 열기와 더불어 자신들의 노선을 견지해온 레닌주의 동맹의 성과였다더구나 조직운동상의 후배그룹들인 두 정파의 청년조직이 통합을 이룬 것은 당과 서울파 지도부의 승인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그 이후 레닌주의 동맹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서울파 공산그룹의 당통일 지지그룹은 서울파 공산그룹 내부에서 다수파를 형성하여 통합에 지지입장을 넘어 당 통합과 입당을 주장하였다. 11월 정우회선언은 주장을 넘어 당 대회를 통해 새롭게 구성될 당인 통일공산당의 운동방침을 발표하기에 이른다이 과정은 서울파 공산그룹의 내홍을 가져왔으나 얼마 후 서울파는 신 구파 모두가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이로써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양대 세력 중 하나였던 서울파 공산그룹은 해산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서울파 공산그룹의 대거입당과 안광천 하필원등의 일월회와 양명등의 혁명사의 결합으로 두 차례에 걸친 탄압으로 입은 당원과 당세의 손실을 상회하는 조직적 성과를 얻어냈다엄중한 탄압이 진행되어 고문으로 인한 옥사자가 속출하고 일제관헌의 감시가 추상같던 그때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위기에 처한 당을 다시 세워놓았다.

당 대회는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의식하여 하룻밤 사이에 감쪽같이 치러야 했다전국에서 모여든 참가자들은 새벽 첫차로 귀환하여야 했기에 회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각종 보고는 대회에서 구성할 중앙집행위원회에 맡기고 안건토론을 진행하였다당 대회인 만큼 새로운 노선의 결정은 시급한 과제였다의결된 안건은 자료에 의하면 모두 11개 항목이었다.

새로운 지도부의 구성은 1차 당 대회와 마찬가지로 선거위원을 선출하여 그들이 전권으로 지도부를 선출하는 권한을 주었다당 지도부의 구성은 절대 보안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듬해 조직되는 신간회의 조직방침이 되는 민족운동에 관한 방침근우회를 구상한 여성운동에 관한 방침노동자 농민운동에 관한 방침사상단체에 관한 방침기관지 출판에 관한 방침 등등을 다루었다조건의 촉박함으로 심도 있는 토론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2차 당 대회를 통해서 당이 어떤 노선으로 당을 운영하려는 지에 대한 얼개 수준에서 논의가 되어 당 대회의 승인을 받았다부족한 지점은 중앙집행위를 통해 논의하여 당 대회를 통한 승인을 받기로 하였다감쪽같다는 표현은 적절했다일제 관헌은 이 대회의 존재를 1년 3개월 동안 알지 못하였다.

긴 겨울밤을 꼬박 지새운 회의를 마치게 되었다돌아가는 바깥 날씨는 매서웠다이날 서울의 최저기온은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날씨였다하지만 2~30대로 구성된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일경의 핏발서린 감시를 이겨내고 당 대회를 성사시켜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 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조직을 일제의 폭압으로 부터 지켜내 그 조직적 투쟁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벅찬 감회가 더 컸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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