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든 환한 불빛, 그 아래 가장 어두운 곳에 서 있습니다

빛을 만드는 노동자 故 김충현 1주기 기획연재 ③

[편집자주] 오는 6월 2일은 고 김충현 노동자 사망 1주기가 되는 날이다. 김충현은 발전소의 다단계 하청구조와 외주화된 위험, 고용 대책 없이 추진된 석탄발전소 폐쇄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고 김용균 노동자 사망 이후에도 발전소 2차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은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투쟁은 적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114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함께 김충현 대책위를 꾸렸고, 장례투쟁과 65일간의 노숙농성 끝에 발전산업 고용·안전 협의체를 통한 발전소 하청노동자 직접고용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러나 합의 이행을 위한 노사전 협의체는 여전히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원청의 책임 있는 후속 조치는 멈춰 서 있다.

김충현 노동자 1주기를 맞아 우리는 다시 묻는다. 노동자의 죽음 이후 사회가 어렵게 만들어낸 약속은 왜 아직도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는가. 위험의 외주화를 멈추기 위한 합의는 왜 다시 미뤄지고 있는가.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는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고용·노동안전 현실을 바탕으로, 지난 1년의 투쟁과 변화, 남겨진 과제를 돌아보는 기고 5편을 연재한다.

 지난해 6월 6일,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며 “이재명 대통령,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외치고 있다. 김충현 노동자 사망 직후 노동·시민사회는 빠르게 모여 거리로 나섰다. (모든 사진 출처는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

지난해 6월 12일, 100여 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한 김충현 대책위가 출범했다. 김충현 노동자가 세상을 떠난 지 열흘 만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 역시 그때 왜 그렇게 빨리 태안으로 달려갔는지, 각자의 활동으로 바쁜 동지들이 그렇게 빨리 모일 수 있었는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했을 것이다. 김용균 이후에도 발전소는 달라지지 않았고, 또다시 노동자가 혼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는 이 죽음을 개별 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책위는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고인을 혼자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 그리고 이번만큼은 죽음의 이유를 끝까지 묻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와 산재 희생자 가족들의 단식까지 이어지며 어렵게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정규노동자의 안전과 원청의 책임은 여전히 미흡했고, 산업재해는 끊이지 않았다. 김충현 노동자의 죽음은 노동자들만의 분노가 아니었다. 국민들 역시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가”라는 깊은 우려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대책위는 빠르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지난해 6월 8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김충현 노동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김충현 대책위는 조문이 애도의 말에 머물지 않도록, 정치권과 정부가 발전소 하청노동자의 현실과 위험의 외주화 문제 해결에 책임 있게 나설 것을 촉구했다.
양한웅 대표가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발전소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조문을 마친 뒤 태안화력발전소 현장을 돌아봤다.

산재 사망이든 사회적 참사든, 희생자의 죽음은 존엄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남겨진 가족에게는 충분한 위로와 진상규명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정부는 말로는 사고 진상규명과 작업장 안전 개선을 이야기했지만, 김용균 이후에도 발전소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사측은 사고 원인을 돌아보기보다 변명과 면피에 급했고, 정부 역시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여러 번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기업과 정부를 꾸짖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김충현을 기다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연대하는 사람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 투쟁인데, 동료를 잃고 생계와 고용불안까지 감당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 가고 있겠는가.

유가족의 슬픔과 분노는 대책위 출범의 중요한 계기였다. 어머니가 영정을 안고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바라보던 눈빛은 지금도 잊기 어렵다. 그리고 장례 이후 이 싸움을 길게 이어온 것은 김충현 노동자의 동료들과 한전KPS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그 곁을 지킨 연대 단위들이었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지나며 이어진 농성과 선전전, 거리의 시간들이 결국 발전산업 고용·안전 협의체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었다. 

지난 1년은 연대의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을 지켰고, 누군가는 거리 선전전에 나왔다. 새벽마다 피켓을 들었고, 대통령실 앞 농성장을 지켰다. 특히 한전KPS 비정규직 동지들의 용산 노숙농성과 순회 집회, 선전전은 김충현 노동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우리는 몸으로 시간을 밀고 갔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정직한 투쟁이었다.

지난해 9월 10일 김충현 노동자 기억식에서 김용균 동상과 김충현을 기억하는 식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태안화력발전소를 더 안전한 일터로 만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뜻은 또 다른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하나를 확인했다. 우린 고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고가 난 며칠 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용산 대통령실 인근 도로까지 나와 유족과 대책위의 요구를 직접 전달받았다. 진상규명과 직접고용, 위험업무 2인1조, 발전소 폐쇄 대책 요구가 전달되었고, 이후 국무총리 훈령을 통해 발전산업 고용·안전 협의체와 정의로운 전환 협의체가 출범했다. 그리고 법원과 고용노동부는 한전KPS 불법파견 문제를 인정했다.

협의체는 긴 논의 끝에 직접고용과 노사전협의체 구성 일정까지 합의했다. 그러나 지금도 노사전협의체는 꾸려지지 못했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노동자의 죽음 위에서 어렵게 만들어낸 사회적 약속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100여 개 단체와 노동자들이 함께 만든 사회적 약속이다. 그 약속은 누군가의 선의가 아니라, 노동자의 죽음 위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책임이다.

곧 김충현 노동자 1주기다. 정부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특별한 시혜가 아니다. 죽음 이후 어렵게 만들어낸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환한 불빛 아래, 가장 오래 어둠 속에 서 있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이다. 그 약속이 더 늦기 전에 현장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말

양한웅은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이자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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