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바에 바치는 헌사

시리아 내전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건설하려 했던 쿠르드 프로젝트가 막을 내리고 있다. 수년 동안 이 혁명을 취재해 온 한 기자가 묻는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20191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튀르키예가 로자바(Rojava)로 알려진 시리아 쿠르디스탄의 쿠르드 주도 자치지역에 군사작전을 개시하도록 사실상 허용했다. 기자들과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지역을 외부와 연결하는 유일한 국경 검문소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허술한 부교 앞에서 눈물 어린 셀카를 찍은 뒤, 이라크의 호텔로 이동해 중동에서 직접민주주의와 여성 주도의 통치를 실험했던 이 지역의 대담한 프로젝트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극적인 기고문을 써 내려갔다.

당시 나는 그런 비관적 선언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쿠르드인들은 휴전 협정과 무관하게 튀르키예의 드론과 이슬람주의 민병대가 계속해서 쿠르드 정치체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시리아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가 점차 잔혹한 통치를 회복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되면서 우리는 로자바 혁명이 상처를 입고 타협을 거듭하면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 위에 휘날리는 깃발이 바뀌었을 뿐 혁명은 지속했다.

그러나 7년 뒤, 아사드를 축출한 이슬람주의 세력이 로자바를 겨냥하자 나 역시 서둘러 로자바를 떠나 이라크로 향해야 했다. 예전과 똑같은 울퉁불퉁한 도로를 따라 같은 임시 국경 검문소로 향하면서 나는 공포와 향수,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이전에도 수없이 오갔던 그 길에서 나는 2016년부터 2018년 사이 로자바의 쿠르드 자치가 출현하자 튀르키예가 건설한 시리아-튀르키예 국경 장벽을 다시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제 그 장벽은 로자바의 사막 마을과 쿠르드인들의 진정한 역사적 근거지인 험준한 산맥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수많은 기사 제목에서 반복되는 익숙한 표현처럼 쿠르드인들은 "산 말고는 친구가 없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거대한 국경 장벽은 로자바의 쿠르드인들을 전통적인 산악 피난처와 완전히 단절시켜 그들을 그 어느 때보다 고립시켰다.

다른 세상이었다면 쿠르드인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은 아사드 축출 이후 손을 잡고 협상 테이블에서 전후 갈등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5년에 걸친 내전이 낳은 전술적 차이와 전장의 원한이 비극의 무대를 마련했다.

202412월 자신의 군대가 아사드 동상을 무너뜨린 직후부터, '개혁된 지하디스트' 아흐메드 알 샤라(Ahmed al-Sharaa)는 빠르게 미국 주도의 지역 질서 안으로 편입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트럼프와 농담을 주고받고, 2006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다 체포됐던 자신의 체포를 지휘했던 바로 그 장성과 뉴욕 무대에 함께 서게 됐다.

그러나 시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아사드와 연계됐거나 이스라엘과 연결됐다고 여겨진 소수 종교 공동체를 상대로 한 보복이 이어졌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오늘날 알 샤라의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주의 쿠르드 세력 사이의 충돌을 예고한 피비린내 나는 전조였다.

쿠르드인들이 알카에다 분파인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ayat Tahrir al-Sham)과 그 지도자 알 샤라를 경계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조직은 오랫동안 소수자를 상대로 배외주의적 폭력을 자행해 왔다.

동시에 쿠르드 당국은 다마스쿠스와의 재통합을 바라는 아랍 주민들을 강하게 탄압했고, 그 결과 로자바는 점점 경찰국가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수만 명의 이슬람국가(ISIS) 연계 무장대원들은 미국과 무관심한 서방을 대신해 쿠르드군이 운영하는 열악한 수용소에서 계속 방치됐다. 이러한 현실은 로자바가 내세운 급진적 풀뿌리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상과 갈수록 뚜렷한 대비를 이뤘다.

2026년 첫 몇 주 동안 쿠르드군이 전쟁 중 ISIS로부터 탈환했던 아랍 도시들은 불과 몇 시간, 길어야 며칠 만에 정부군에 넘어갔다. 이전까지 쿠르드와 함께 싸웠던 아랍 전사들이 집단으로 이탈했기 때문이다.

쿠르드 주도 행정부가 세웠던 행정기구와 인도주의 기관들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 친정부 무장세력은 도망치는 쿠르드인들의 목을 베었고, 전사한 여성 전투원의 시신을 훼손했으며, 버려진 휴대전화를 해킹해 가족들에게 조롱 섞인 메시지를 보냈다.

로흘라트 아프린(Rohlat Afrin) 시리아민주군(SDF) 여성보호부대 사령관. 출처: Mahfil

타브카(Tabqa)에서는 친정부군이 세속주의와 여성해방을 상징하는 여성 전투원 동상을 무너뜨리며 승리를 자축했다. 전선 양측 모두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전쟁에 지친 쿠르드인들은 아랍군 포로 21명이 처형된 일을 환영하며 눈물 흘리며 웃는 이모지가 덧씌워진 시신 더미 사진과 냉소적인 밈을 공유했다. 시리아 내전 초기의 혼란기처럼 이웃은 이웃과 싸웠고, 녹슨 권총과 ISIS로부터 노획한 급조 전차를 들고 흐릿한 휴대전화 영상에 그 장면을 담았다.

더 이상 다민족 국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로자바는 다시 하나의 울퉁불퉁한 도로를 따라 흩어진 고립된 전쟁터 마을들의 집합체로 돌아갔다.

이 같은 급격한 군사적 후퇴는 단지 슬픔과 복수심이 폭발한 결과만은 아니었다. 내가 처음 로자바를 찾은 2018년 이후 사람들은 늘 혁명 초기 시절을 그리워했다. 혁명이 준국가적 통치 프로젝트와 군사적 팽창으로 제도화되기 전, 사람들은 임금도 받지 않은 채 혁명이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한 이웃 간 연대 정신으로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나섰다. 2026년 초 폭력이 되살아나자 혁명 정신도 함께 되살아났다.

지역 당국이 전면적인 군사 동원을 발표한 밤, 사실상의 수도 카미슐로 거리에는 환희가 넘쳤다. 나는 불안정한 평화가 이어지던 시절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고 저항적인 주민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미군이 남기고 간 장갑차와 낡은 삼륜 오토바이를 몰고 거리를 질주하며 쿠르디스탄 깃발을 흔들었고, 모스크 스피커에서는 쿠르드 혁명가요가 울려 퍼졌다. 거의 모든 사람이 AK-47 소총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히잡을 쓴 노파와 슬리퍼 차림의 어린 소녀, 상점과 집 앞에 선 주민들까지 모두 총을 쏘아 올리며 사소해 보이는 승리를 축하했다. 지역군 최고사령관의 TV 인터뷰나 이웃한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 구호 차량이 도착한 일조차 축하의 이유가 됐다.

그러나 이 혁명적 저항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쿠르드 강경파 조직인 혁명청년단의 복면을 쓴 젊은 무장대원들은 지역 당국의 뚜렷한 감독도 없이 아랍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을 즉석에서 검문검색했다. 역설적으로 로자바는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혁명 프로젝트를 위해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치도록 독려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강한 쿠르드 민족주의에 의존했다.

실제로 로자바가 내세운 민족 간 참여민주주의는 ISIS와의 전쟁에서 쿠르드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이후 계속되는 이슬람주의 반란을 강경하게 통제해야 했다는 현실 때문에 언제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제 최전선의 일부 전투원들은 "민중의 형제애"라는 구호를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그들은 민족 간 협력이라는 유토피아적 꿈이 아니라 쿠르드인과 쿠르드인의 집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말했다.

내가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돌아가기 위해 떠나던 날, 분위기는 침울했다.

카페인을 들이켜고 줄담배를 피우던 쿠르드 병사들이 눈 덮인 들판이 서서히 진흙으로 변해가는 익숙한 국경 도로를 따라 나를 태우고 갔다. 전면적인 민족 간 유혈사태를 피하게 했음에도 많은 쿠르드인이 자신들에게 매우 불리하다고 여긴 미국 중재 휴전 및 통합 협정의 일환으로 알 샤라의 이슬람주의 부대가 처음으로 카미슐로에 들어오고 있었다. 복면을 쓴 병사들은 장갑차 위에서 이슬람주의 경례를 뜻하는 검지손가락 하나를 치켜든 채 시내 중심부로 진입했고, 쿠르드 여성들은 쿠르드 저항을 상징하는 평화의 손짓으로 맞섰다.

쿠르드 행정부가 엄격한 통행금지를 시행한 탓에 우리가 들은 총성은 모두 축하 사격뿐이었다. 정부군이 상징적으로 옛 시리아 쿠르드 수도에 들어오자 현지 아랍인들이 하늘을 향해 도전적으로 총을 쏘아 올렸다. 정부군의 중화기는 시야 밖에 배치된 채 통합 협정이 실패하면 언제든 다시 불을 뿜을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귀향길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게 느껴졌다.

국경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함께한 쿠르드인들은 끝까지 싸우겠다고 단호하게 맹세했다. 그러나 더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다마스쿠스가 점차 통제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떠나던 날 내려놓은 총은 지금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주민들은 통합 협정에 계속 반발하며 소규모 충돌과 시위를 이어가지만, 북부 시리아는 빠르게 레반트에서 가장 조용한 지역이 됐다. 이란군의 포탄 하나가 카미슐로 외곽에 우연히 떨어졌을 때도 친구들과 양치기들은 그 곁으로 걸어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쿠르드어와 쿠르드 문화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긍정적인 진전이다. 하지만 이는 이 지역 소수민족이 한때 꿈꾸었던 실질적인 정치·재정 자치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기관에 쿠르드어 간판을 유지하는 일이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를 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는다.

무엇보다 로자바가 수만 명의 여성에게 부여한 급진적 자율성은 이 혁명이 남긴 가장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는 성과다. 자치 여성 전투부대와 이에 상응하는 정치·시민사회 조직들은 여성혐오적 이슬람주의를 내세우는 알 샤라 체제에 복종하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예상치 못했던 해방과 변화를 경험하며 성장한 여성들에게 결혼생활에 갇힌 가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1월에 만났던 쿠르드 여성 전투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리아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했지만, 이제는 바로 그 시리아 국가군에 통합해 달라는 해시태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그들은 세계가 알고 있던 로자바가 끝났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지역의 석유 자원을 넘겨주면서 더 이상 급여를 지급할 돈도 남지 않았다. 여성만을 위한 자치 공간들은 문을 닫게 되고, 재정 지원도 끊길 것이다. 혁명을 위해 삶을 바친 사람들, 무장투쟁밖에 모르고 살아온 전사들, 쿠르드 행정부 대학에서만 자격을 인정받는 교사들까지 이제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다마스쿠스의 통제 아래 차례로 편입되는 정치·시민사회 조직 사무실에서는 문자 그대로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다.

혁명이 끝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와 함께 끝났는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끝났는가, 아니면 왕정복고와 함께 끝났는가. 더 넓게 보면 시리아혁명은 반정부 세력이 보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압도당하면서 끝난 것인가, 아니면 아사드 축출로 완수된 것인가. 로자바 혁명은 쿠르드인들이 ISIS를 격퇴했을 때 끝났는가. 자치를 쟁취하고 유프라테스강까지 시리아 영토의 3분의 1을 장악했을 때였는가. 아니면 반대로 다마스쿠스의 통제 아래 다시 들어갔을 때 끝난 것인가.

쿠르드 운동의 이론가들은 로자바 혁명이 애초부터 개인의 마음과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따라서 공식적인 국가 통제가 되돌아오더라도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전쟁의 현실 속에서 혹독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그 주장은 1월 충돌 당시의 한 장면도 떠올리게 한다. 새벽녘, 잠을 이루지 못한 쿠르드인 친구 한 명이 다급히 방으로 뛰어들어 우리 집 아래 버려진 공사 현장에서 아랍어를 쓰는 남성 세 명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나는 처음에 그가 그들을 당시 카미슐로 전역에서 쿠르드인들이 의심하던 친정부 잠복조직의 일원으로 생각했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그는 난민들(아랍인 한 명과 알라위파 두 명)을 코뮌으로 데려가 음식과 담요를 마련해 주고 피란민으로 등록시켜 야간 순찰대가 그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자바에서 여러 차례 그랬듯이 나는 또다시 최악부터 짐작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혁명은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외부인에게는 언제나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내 마음도 바꾸어 놓았다. 나는 로자바에서 보낸 세월과, 희망과 지혜, 연대와 우정, 동지애는 물론 배신과 죽음, 패배까지 모두 로자바 혁명의 일부였음을 가르쳐 준 이 혁명에 언제나 감사할 것이다.

카미슐로 동쪽으로 눈 덮인 들판을 지나며 나는 혁명이 끝났기에 오히려 전쟁이 길어질수록 퇴색해 보였던 성과들을 다시 평가할 수 있게 되리라는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생각을 했다.

로자바 프로젝트는 짧았고, 결함도 많았으며, 사방에서 포위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랍의 봄 이후 중동을 규정한 고결한 이상들이 역사적으로 응축된 순간이었다. 로자바가 결국 10월혁명보다는 파리 코뮌에 가까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하나의 혁명이었다.

[출처] Homage to Rojava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맷 브룸필드(Matt Broomfield)는 프리랜서 언론인이자 평론가다. 그는 로자바(Rojava), 즉 시리아 쿠르디스탄(Syrian Kurdistan)에서 3년 동안 거주하며 활동했고, 바이스(VICE),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뉴 스테이츠먼(New Statesman), 자코뱅(Jacobin)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이 지역을 취재했다. 그는 로자바 인포메이션 센터(Rojava Information Center)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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