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과 마틴의 마지막 날들

[워커스] 힙합과 급진주의

[출처: http://thesource.com/2018/05/19/malcolm-xs-top-10-influences-in-hip-hop-music-3/]

“맬컴 엑스는 내 역사 교과서에 없었지. 왜? 그는 모든 흑인을 깨우치고 해방시키려 했거든. 왜 마틴 루터 킹은 내 책에 매주 나왔지? 그는 흑인에게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내주라 했거든.” 래퍼 투팍은 이 가사에서 맬컴을 진정한 지도자로, 마틴을 싸울 줄 모르는 인물로 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투팍이 실제로 비판하는 것은 마틴이 아니라 미국의 교육과정에서 두 사람이 다루어지는 방식이다. 즉 과격분자 맬컴을 배제하고 마틴을 위대한 비폭력 운동가로 추앙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투팍은 마틴보단 맬컴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마틴을 싫어하거나 존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화합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마틴과 증오와 폭력을 이야기하는 맬컴이라는 이미지는 오랫동안 두 사람의 대표상으로 기억됐다. 두 사람이 미국 흑인운동의 두 조류인 통합주의와 분리주의를 대표한 인물이며, 서로의 견해를 비난하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 이미지로만 둘을 기억한다면 이들의 사상을 심각하게 오해할 수 있다. 둘 모두 말년에는 기존 견해를 수정하며 새로운 주장들을 내놓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식하며 협력하려 했기 때문이다. 오랜 투쟁 끝에 내린 가장 성숙한 견해를 외면한 채 위대한 두 사상가의 주장을 온당하게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맬컴은 강도 혐의로 복역한 교도소에서 이슬람 민족의 가르침에 빠져들었고, 출소한 1952년 이후 십여 년 동안 과격한 언사로 미국 사회를 비난하며 교단의 대표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자업자득’으로
평한 일로 교단이 내린 ‘침묵’ 징계와, 교단 지도자 일라이자 무하마드가 절제를 설교하면서 여신도들과 성적 관계를 가졌단 사실에 크게 실망한 그는 1964년 교단을 떠나게 된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약 1년간 맬컴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틴을 비롯한 시민권 운동가들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고, 투표권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메카 성지순례 과정에서 피부색을 초월한 우애를 체험한 후로는 투쟁에 공감하는 백인과도 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시사했다. 그는 자신과 마틴이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킹 목사가 없을 때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백인들은 킹 목사를 더욱 도우려 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드러나듯 자신의 존재가 마틴의 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백인들도, 시민권 운동가들도, 그가 몸담았던 이슬람 민족도 맬컴의 새로운 모습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1965년 2월 21일 암살과 함께 맬컴의 새로운 운동은 막을 내렸다.

마틴의 운동은 사회 곳곳의 인종 격리를 금지한 1964년의 민권법과 투표 차별을 금지한 1965년의 선거권법이 통과되면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내 마틴은 흑백 격리 폐지와 투표권만으로는 미국 흑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북부 도시의 흑인 빈민들을 보며 경제 정의를 위해 사회 구조가 변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사회주의를 포함한 대안들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의 변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 마틴은 베트남 전쟁 반대 활동에 열중했다. 미국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야 할 돈을 정의롭지 않은 전쟁에 쓰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폭력 조달자’로 비난하며 징병을 거부하는 청년들을 옹호했다. 미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부패했으며 곧 신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맬컴 못지않게 과격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알려진 온화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 정부와 백인들은 과격해진 마틴을 원하지 않았고, 1968년 4월 4일 그의 암살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그들처럼 될 수 있어”

맬컴과 마틴은 미국 힙합 음악에서 존경받는 흑인 지도자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둘이다. 맬컴의 이름은 정치적 메시지를 크게 앞세우지 않는 래퍼들의 가사에서도 쉽게 등장하며, 가장 사회비판적인 래퍼들의 가사에서도 마틴에 대한 존경심이 흔히 발견된다. 랩 실력뿐 아니라 왕성한 정치 활동으로도 유명한 힙합 수퍼그룹 런더쥬얼스의 멤버 킬러마이크는 조금 특별한 경우다. 그는 2015년 마틴의 생일을 기념한 칼럼에서 마틴이 단지 인종 격리에 반대한 인물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혁명가였으며, 전쟁과 빈곤에 반대했기 때문에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혁명가를 기념하는 방식은 세계 곳곳에서 경찰이 흑인과 유색인을 공격하는 것에 반대하고 미국의 ‘흑인’ 대통령이 외국에 군대와 무기를 보내 불법적 전쟁을 벌이는 데 항의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얼마 안 가 그는 그 기념 방식을 몸소 보여줬다. 그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로 부지런히 활동했고,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자 그녀가 전쟁 찬성론자라는 이유로 지지를 거부했다.

힙합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래퍼인 케이알에스원(KRS- ONE)이 그룹 부기다운프로덕션스를 이끌며 1989년에 발매한 앨범에서는 맬컴 엑스의 특별한 흔적이 발견된다. 앨범명 ‘필요한 모든 수단으로’는 맬컴이 샤르트르를 인용해 ‘필요한 어떤 수단으로라도’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말에서 따온 것이었고, 표지 사진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맬컴이 총을 들고 찍은 사진을 따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앨범을 관통하는 케이알에스원의 메시지는 백인에 대한 증오나 선전포고가 아니라 힙합계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앨범을 준비하던 중 총격으로 팀 동료를 잃었고, 이를 계기로 ‘폭력을 멈춰’라는 캠페인을 벌여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힙합계 대표적 라이벌이던 투팍과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총격 사망 이후 힙합 듀오 블랙스타가 폭력에 반대하는 곡을 발표했을 때도 케이알에스원이 인용되었다. 공교롭게도 투팍은 케이알에스원을 맬컴의 표현인 ‘미국의 악몽’으로 부르며 존경을 표한 바 있었다. 케이알에스원은 힙합을 통해 폭력과 증오가 아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는 방식으로 맬컴을 계승했다.

맬컴과 마틴은 생애 단 한번 잠시 마주쳤고, 간단한 인사말만을 주고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진지한 협력을 위해 만남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이들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투팍의 말이다. “우리는 맬컴과 마틴에 대해 이야기는 많이 하지. 하지만 이제 그들처럼 될 때야. 그들처럼 강하게. 그들도 우리처럼 유한한 삶을 산 사람들이었고 우리 모두는 그들처럼 될 수 있어.” <워커스 43호>

  1964년 3월 26일 상원에서 진행된 민권법 토론회장에서. 두 사람의 유일한 만남은 아주 짧게 진행되었다. [출처: http://www.scmp.com/news/hong-kong/politics/article/1820313/lessons-must-be-learned-different-approaches-martin-lu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