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밤을 새다시피 뒤척이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다시 부산역 앞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영선동으로 향했습니다. 낯선 마을을 찾다 보면 새로운 환경에 대해 불안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택시기사님은 이렇게 이른 시간 영선동은 왜 가냐고 옆자리의 저를 수상한 눈초리로 묻습니다. 그냥 간다고 그러자 뭐 볼게 있어 가냐고 그러시면서 저의 카메라를 슬쩍 쳐다봅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커다란 다리를 건너고 또 한참을 달려 언덕길 어딘가에서 내려놓습니다.
날선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새벽입니다. 일 나가시는 분들을 위해 일찍 문을 연 식당이 눈에 띄어 아침식사를 청하고 날이 밝아오길 기다렸습니다. 여전히 해가 뜰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 식당 문을 열고나섭니다.
도로를 끼고 더 올라가니 백련사라는 절이 나옵니다. 이제 집들은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길들만 이어져 있습니다. 멀리 바다위에 뜬 배위의 불빛과 남항대교가 눈에 들어옵니다. 해변위로 정박해 있는 배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절에서 추위를 피하고 내려와 조금 걷다보면 해변과 맞닿은 골목길이 나옵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불 켜진 방의 포근함이 전해옵니다. 전날의 피곤함을 훌훌 털고 일어나 아침 출근을 서두르거나 가족의 식사를 챙기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고긴 계단의 모습은 영화와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장소입니다. 리듬을 타고 휘어지는 계단의 발견은 낯 설은 곳에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아직 해가 뜨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도로와 맞닿아 있는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 다시 바다 쪽을 바라봅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옥상위로 하얀 빨래가 걸려있고 어린 부부가 난간에 걸쳐 앉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상상을 또 합니다.
마침 문을 열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 등교를 하다가 저를 발견하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쏜살같이 골목안쪽으로 사라집니다.
이제 주변이 뿌옇게 밝아옵니다. 해뜨기 직전의 바람이 정말 새 차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카메라를 누르는데... 갑자기 카메라가 먹통입니다.
배터리가 거의 다 된 거 같습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왔는데 낭패입니다. 한 장 찍고 갈아 끼우기를 반복합니다. 영선동 흰여울 길을 걸어 다시 해변과 맞닿은 곳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출발을 해야 합니다.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남에 담벼락 물탱크 옆에서 바람을 피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웬 아주머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지나갑니다. 정말 수상 한가 봅니다.
이 마을이 생기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부산이 커다란 도시로 확장 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 터진 이후부터였을 것이고 특히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들이 닥친 이후 이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더 커다란 도시로 성장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산은 지리적으로 해변을 끼고 산지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서울에서는 뉴타운과 재개발로 보기 어려운 달동네들이 부산 곳곳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선동을 한국의 산토리니라 합니다. 사진으로 보면 그만큼 아름다워 보이는 곳입니다. 하지만 조망권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부산역이나 근처 자갈치시장 같은 곳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터전을 가꾼 곳이라 합니다. 해변 가 주민들에게 주어진 멋진 풍경들은 가히 환상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골목길 담장너머 푸른 하늘과 탁 트인 바다가 훨훨 펼쳐지고 멀리 남항대교 사이로 드나드는 배들의 모습이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 해가 다 떠오르고
이제 서울로 출발할 열차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닥난 배터리로 찍은 몇 장의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렇게 마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밀려나자 이를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구입해 노점상과 재개발 될 지역을 찾다보니 그만 중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골목에 들어서면 나만의 상상에 곧잘 빠져 듭니다. 이 동네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낡은 창틀 사이로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피리소리와 담벼락에 쓰여 진 낙서들 그리고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네 어귀의 자그마한 구멍가게까지 궁금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일방적인 개발로 결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낸 가치는 그 무엇보다도 존중받아야 할 문화인 것입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저 멋진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하거나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다를 벗 삼아 절벽위에 걸터앉은 집들이 언제까지 고단한 이들의 삶에 보금자리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올해 이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마치 레고처럼 잘 조각된 해안가의 집들을 허물고 군데군데 커다란 단독주택을 짓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제 저 멋진 풍경들도 애초부터 여기 살던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듯 아쉽게도 개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