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논쟁들은 국가 규모의 팽창이라는 민주주의 작동의 범위 확대와 이해관계의 집단화라는 현상을 핵심적 배경으로 하였다. 즉 국가 규모가 팽창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구상이 어려워지고 여론을 수렴하는 대의제적 장치들에 대한 구상이 필요로 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해관계가 집단화됨으로써 각 집단과 계층의 이익을 집약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해졌던 것이다. 따라서 정당정치는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해 온 근대 민주주의의 산물이자 사회적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정당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중정당이 아니라 지배 엘리트들의 모임이었으며 이것을 대중화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대의제에 근거하고 있는 정당정치의 발달은 그 발전과 더불어 대의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오늘날 정당정치는 국민들의 국회의원에 대한 반감과 정치에 대한 혐오, 그리고 점차 낮아지는 투표율이 보여주듯이 더 이상 주권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의 내적 분열과 투쟁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정당들이 사회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집약하고 표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목표를 실현한다는 ‘대의’라는 고유의 역할을 벗어나 직업정치인들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과두제적 정치자본의 독점체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뚜렷하게 등장하는 투표거부와 정당혐오증은 이런 정당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은 인터넷과 같은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지배 권력의 정보독점을 넘어서 나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무지’를 통해서 생산되는 ‘정치권력’을 해체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이해와 욕망을 따라 다양한 사회 운동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의 배경에는 대의제라는 고유한 한계의 지점이 놓여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주권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오는, 과두제적인 정치꾼들과의 투쟁이 놓여 있다. 하지만 정당정치의 위기가 ‘정치 불신’이나 ‘혐오증’으로 이어지는 것은 정치꾼들의 ‘정치자본에 대한 독점’을 강화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평론은 지속적으로 ‘선거’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이번 19대 총선은 서울시장 선거 이후 기대를 모았던 선거였다. ‘불법사찰’과 같은 이명박정권의 폭정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지난 서울시장 선거 이후 야권연대와 통합진보당 결성, 안철수 효과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실적인 절실함도 있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제주 강정마을의 평화가 짓밟혔으며 삶은 더욱 빈곤해졌다. 그런데도 총선에서 ‘빨간 색’ 외투를 새로 뒤집어 쓴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었으며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패배했으며 진보신당과 녹색당의 새로운 실험은 제도권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총선 이후 작금의 정치현실은 더욱 암울하다. 통합진보당은 관행으로 눈감아왔던 비민주적이고 정파이기적인 패권주의가 드러나면서 전국민적 심판대에 올랐으며 제도권 정당 정치는 보수와 자유주의 진보로 채색되어가는 반면, 비제도권은 여전히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진보평론 52호는 “승리인가 패배인가”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19대 총선을 평가하고 향후 진행될 대선을 전망하고자 했다.
우선, 정병기는 이번 총선을 분석하면서 ‘새누리당’의 승리가 선거 제도 자체의 문제로부터 나온 결과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정당 투표에서 야권 연합이 더 많은 표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수대표제’에 의한 민의의 왜곡 효과라고 규정하면서 선거 제도 자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진보정치운동 진영의 의회 정치세력화가 ‘의회-선거’로의 몰입을 가져옴으로써 정치세력화의 기본적 토태가 ‘사회세력화’임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사회적 토대의 정치세력화를 근거로 한 진정한 진보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배성인은 이번 총선이 이전 선거와 별반 차이가 없는, ‘중대선거’도 ‘정초선거’도 아니라고 단정하면서 이번 총선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라는 두 개의 보수정당과 통합진보당이라는 자유주의 좌파 정당이 구조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이를 위해 그는 각 정당의 정책들을 비교·분석하면서 ‘통합진보당’을 ‘자유주의 좌파 정당’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이번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의 승리는 진정한 좌파의 승리가 아니다. 그가 보기에 이번 총선에서 실종된 것은 ‘노동정치’로, 오히려 전선 자체를 우경화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것은 과거 민주노동당이 울산, 마창지역에서 승리했는데 이번에는 모두 패배했으며 통합진보당이 승리한 지역이 서해권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실종된 노동정치를 복원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사회를 지향하는 좌파정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보신당 녹색위원장 김현우는 애정과 아쉬운 마음으로 진보신당의 ‘모호했던’, 참패로 귀결된 총선 대응을 짚어본다. 이는 변혁지향 그룹의 독자적 정치조직 형성과 세력화를 지향하는 세력과의 조우를 위한 제안의 의미가 크다. 그가 주문하는 것은 막연한 ‘진보’라는 개념과 결별하고 ‘노동중심성’ 혹은 노동정치를 복원하되 ‘반자본주의 연대사회’와 ‘반자본주의 공동전선’을 명확히 해야 하며 진보신당의 재창당에 제한되지 않는 좌파정치의 재구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이하게 녹색당 평당원이면서 아나키스트인 하승우의 반정당의 정당’, 거꾸로 가는 정당, 녹색당의 출범과 총선 실험에 대해 진솔한 고민을 담았다. 4개월 만에 창당에 성공한 녹색당은 자기 욕구를 드러내지 못했던 시민들의 채식, 성소수자, 인권, 생태 등의 다양한 이슈가 모여 스스로 행복을 향유할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 미숙한 녹색당은 선거에서 사건을 만들지 못했고 재창당을 길을 걷고 있다. 국가중심 사고에 익숙한 한국에서 이후 녹색당의 진로는 험난한 여정이 예고되지만 낮은 것에 강한 당이기에 여전히 희망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또한, 발언대란의 “아직도 갈 길이 먼 탈핵 한국”에서 이헌석은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거대한 대중운동만이 핵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정세는 어쩌면 총선과 무관할 수도 있지만 총선 이후 정치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제주도 현지인의 분석을 통해 제주 해군 기지 문제를 소개했으며, 역시 철도공사에 근무하는 당사자의 눈을 통해 지하철 9호선과 KTX의 민영화 문제를 고찰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진보진영에서 활동해온 손호철을 통해 통합진보당의 뼈아픈 현실을 짚어보았다.
일반 논문으로는 한국 근대화를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동적 모순 관계를 중심으로 재검토한 최형묵의 논문과 대학의 기업화와 시간강사법을 분석한 임순광의 논문, 장애인 당사자주의를 비판한 김도현의 논문, 그리고 성소수자와 욕망의 정치를 분석한 윤수종의 논문으로 구성했다.
이번 호에는 기획 번역을 다시 구성했다. 시몬 베이유의 글 “모든 정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와 미하엘 하인리히의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서평” 두 글을 실었다. 베이유는 “집합적 정념을 만들어내는 기계”로 정당을 규정하며 정당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하인리히의 서평은 <자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차이에 주의할 것과 철저한 마르크스 이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서평은 <피로사회>, <민주주의에 反하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를 실었다. 세 서평 모두 꼼꼼 읽기와 따져 읽기 및 얽어 읽기를 해나가면서 지금 여기서 읽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독자들을 위해 중요한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목 차
특집 : 승리인가, 패배인가, 19대 총선 평가 및 대선 전망
- 19대 총선에 나타난 이념 균열과 지역 균열 및 대선 전망(정병기)
- 4.11총선에 대한 주요 정당 평가와 좌파정치의 과제(배성인)
- ‘진보’와 ‘노동’을 넘어 반자본주의 노선 분명히 할 때: 진보신당의 총선 평가와 전망에 대한 의견(김현우)
- 녹색당의 실험: 진행 중인 희망의 실패(하승우)
발언대
아직도 갈 길이 먼 탈핵 한국(이헌석)
정 세
- 제주해군기지 틈으로 본 우리시대의 생명평화(윤용택)
- 지하철 9호선에서 KTX까지: 민영화가 파괴하는 사회(박흥수)
- 통합진보당과 진보정당의 미래(손호철)
일반논문
- 한국 근대화의 재검토: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동적 모순관계를 중심으로(최형묵)
- 대학의 기업화와 시간강사법(임순광)
- 장애인 당사자주의의 비판적 이해를 위하여(김도현)
- 성소수자와 욕망의 정치(윤수종)
기획번역
- 모든 정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시몬 베이유)
-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3권 서평(미하엘 하인리히)
서평
- 성과사회, 자기착취, 그리고 피로사회(“피로사회”)(강수돌)
- 스스로, 그리고 함께 가지 않는 한 우리는 존엄할 수 없다(“민주주의에 反하다”)
(이승원)
-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우파 바람에 맞서다(“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명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