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떠남에 음악과 벗이 있다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훌륭한 음악가가 아니면 어떠랴. 선율에 맞춰 자신의 감정과 사랑과 삶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래서인지 특별하지 않은, 아니 약간은 뻔한 이야기 구조에도 <이탈리아 횡단밴드>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자연, 음악, 사랑이 적절히 버무려진 함께 떠나기
동네 ‘마라테아’에서 밴드를 했던 사내 4명(니콜라, 살바토레, 로코, 프랑코)은 결혼식에서 연주를 하다 즉흥적으로 밴드를 다시 결성한다. <이탈리아 횡단밴드>는 이들이 바실리카 해변에서 열리는 ‘스칸자노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담은 영화다. 차로 가면 2시간도 안 걸리는 곳이지만 그들은 당나귀에 짐을 싣고 10일간 걸어서 재즈페스티벌에 가기로 한다. 가는 동안 기존의 분주하고 복잡했던 생활과 거리를 두기 위해, 긴급한 경우만을 빼고는 휴대폰도 쓰지 않고, 밥도 해먹고, 한데서 잔다는 나름의 원칙도 지키면서 말이다. 길고 어려운 여행을 선택한 건 음악에 푹 빠져보기 위해서였을 게다.
사실 영화에서 인물들의 마음의 갈등이나 서로의 갈등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해결되는 과정은 섬세하지 않을 뿐 아니라 뻔해서, 드라마틱한 갈등과 해결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싱거운’ 영화일 수 있다. 밴드의 리더격인 니콜라는 학교 선생으로 아내와 잘 지내는 듯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삶을 드러낸 적은 별로 없다. 그는 밴드를 하면서 자기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찾고, 그것을 위해 결단(결혼기념일 대신 밴드 지키기를 선택)하는 변모를 보인다. 아내는 그 변화에 함께 기뻐한다.
의대를 다니다 중퇴한 살바토레의 심리적 변화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음악의 힘과 아름다운 마리아와의 환상적인 섹스를 경험하면서 자신감을 얻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과거 잘 나가던 배우 로코는 자신의 현재를 솔직하게 멤버들에게 고백하며 허세를 벗어던지고 동네에 정착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잘생긴 외모임에도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후 말하기를 거부했던 프랑코는 여행에 함께 한 기자 트로페아와의 소통에서 따스한 시선을 느껴 사랑과 말하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작위적인 설정이 눈에 띄는 트로페아, 남부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아버지와 항상 비교당하던 그녀는 여행을 흠뻑 즐기며 프랑코와 사랑을 만든다. 조금 어수룩한 그/녀들은 여행에서, 음악에서 자신을 되찾고 벗도 되찾는다. 세련되지 않은 심리변화와 갈등해결이 눈에 거슬리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음악과 자연이 영화의 엉성함을 메워주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자연과 음악이 메워주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특히 프랑코와 트로페아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 알리아노 호수 샤워실의 귀여움. 천으로 가려 만든 샤워실에서 샤워하는 트로페아의 뒤로 펼쳐진 광활한 자연의 모습은 ‘저런 곳에 가면 나도 자연인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배경이 된 바실리카는 이탈리아 남부로 개발이 덜 된, 이탈리아 사람들도 즐겨 찾지 않는 소박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제는 ‘바실리카타 해안에서 해안으로’(Basilicata Coast to Coast) 이지만 한국에서 개봉할 때는 제목을 <이탈리아 횡단밴드>로 바꿨다. ‘로마’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영화라는 것도 알 수 있고, 어렵게 멤버들이 바실리카타 해안에서 해안으로 횡단하는 모습을 담는 것인 듯하다. 한국에서 바꾼 작품명은 원제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내용과 색도 잘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이탈리아 전체를 횡단하는 내용을) 기대하게 만드는 잘된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낯선 음악, 수다
사실 이탈리아 음악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영화 초반부에 나온 결혼식 노래는 가사는 재밌었지만 음악적 감동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이탈리아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가득했고 갈라진 보컬의 목소리가 너무 낯설어, ‘음치인 나도 저 정도는 부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조금은 덜 소란스럽고 다듬어진 보컬의 노래가 연주와 잘 어우러져 음악에 빠질 수 있었다. 특히 마리아와 함께 멤버들이 밤을 보내며 부른 노래와 마지막 날 페스티벌을 놓친 후 부른 노래는 감미로웠다. 이 영화에 나오는 노래의 매력은 ‘엄마가 만들어준 샌드위치’처럼 포장하지 않은 가사에 담긴 과장되지 않은 일상, 위트 넘치는 수다스러움과 연주이다.
비현실적 떠나기의 현실성
이 영화가 재미없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얘기 중 하나는 이들이 왜 떠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그들이 떠난 이유를 뚜렷이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인생이란 여행은 너무 짧다. 그래서 길게 가기로 했다. 우린 낭비할 시간이 많으니까”라고 할 뿐. 하지만 그 이유를 우리는 역추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도 살면서 자신의 어떤 행동과 감정의 이유를 뒤늦게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일이 하기 싫어지고 슬퍼질 때, 왜인지 모르다가 나중에 해답을 발견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 위 대사는 역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인생은 여행이라도 하면서 길게 음미해보지 않으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음미할 수 있을 정도로 낭비하지 않으면 그 뜻을, 인생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함께 답을 찾아, 질문을 찾아 떠난 ‘생명평화대행진’
지금 한국에서 함께 답을 찾아, 아니 질문을 찾아 떠난 이들이 있다. 지난 10월 5일 제주 강정에서 시작한 ‘생명평화대행진’은 한 달간의 긴 여정으로 다른 세상, 다른 우리, 다른 나를 꿈꾸는 떠나기이다. 서로 다른 의제로 싸웠던 그/녀들이 행진하면서 이 땅의 현실과 마주하기도 하고, 다른 나를 만나기도 하고 있다.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 정리해고로 고통 받는 쌍용차노동자들, 막개발과 국가폭력으로 생명을 빼앗긴 용산유족들과 철거민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백발의 밀양농민들, 거대쇼핑몰에 맞서 싸우는 중소상인들, 골프장 건설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사람들, 일회용품 취급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서로 만나 마주한 현실과 삶. 굳이 한 달 간 버스를 타고 모여서 방방곡곡 힘들게 행진할 필요 없이, 시간되는 대로, 가능한대로 찾아가서 연대해도 되는 일을 그/녀들은 굳이 힘든 행진을 택했다. 그건 행진이, 함께 떠나면서 만나고 느끼는 여정에서, 작지만 거대한 한국의 고통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행진에 참여한 그/녀들이 투쟁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상처만 쌓은 것이 아니라 힘도 키웠기에, 다른 이들과 만나며 따스한 포옹만으로도 ‘치유자’가 될 수 있음을 진즉에 알았음이 아닐까? 함께 만나면서 더 치유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만남이, 여정이, 행진이,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간선언임을 알았음이 아닐까?
지난 주말 평택민회에서 강동균 마을회장님의 발언내용에 강정만이 아니라 다른 의제가 포함된 걸 들으면서 행진단이 걸어온 길을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행진이나 민회의 잘됨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자, 그리고 모두 무엇을 느꼈는지를 남기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전주에서 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해 전주버스 노동자들과 함께 3보1배를 하면서, 무엇이 전주버스노동자들의 가슴을 찌르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했다. 당장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힘의 원천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분명해진 듯했다. 물론 그래서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거기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음씨 좋은 교인들이 내준 교회 강당에서 함께 잠을 청하면서, 고단하지만 우리 모두가 내뿜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11월 3일이면 ‘생명평화대행진단’이 서울에 들어온다. 이번 주에는 수도권에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만난다. 아직도 행진에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1박2일이라도 함께하자. 그런다면 답을 당장 찾지 못하더라도 공통의 질문을 찾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함께 떠나기’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