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감금의 피해자 한종선 씨의 기록 담아
총리 귀하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 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전두환.
장애인과 걸인을 단속과 보호조치 대상으로 규정한 이 지휘서신을 보낸 뒤부터 전국의 복지원 수용자 수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박정희 정권 시대에 만들어진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해 경찰과 구청 등이 수용 의뢰를 하고 사회복지법인이 공적 기금으로 대단위 민간 시설을 운영하는 ‘대감금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감금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었다. 실제로 장애인과 걸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구 수용되었다. 수용자의 수에 따라 시설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이 받는 공적 기금도 비례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정부도, 사회복지법인도 감금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부는 사회불안요소로 불리는 사람들을 치울 공간이, 사회복지법인은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중요했다.
하지만 정작 ‘대감금의 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그러나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대우와 칭송을 받았다.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길 잃은 양 떼였고 원장은 양 떼를 이끄는 선한 목자였다.
‘대감금의 시대’의 참상은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며 만천하에 드러났다. 형제복지원은 1986년 말 기준으로 3164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시설이었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경남 울주군 원장 소유의 땅에 목장과 운전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180여 명의 원생을 강제노역에 동원했는데 원생 김아무개 씨가 1986년 뭇매를 맞고 숨졌다. 이 사실을 부산지검 울산지청에서 일하던 한 검사가 밝혀내고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언론보도 등을 보면 형제복지원은 모든 원생을 군대식으로 편제하고 힘을 잘 쓰고 원장에게 잘 보인 일부 원생에게 소대장 등의 직함을 주면서 서로 간에 폭력, 체벌, 감시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그곳에서만 12년 동안 513명, 한 달에 3~4명꼴로 원생들이 죽어나갔다.이 과정에서 형제복지원의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허위로 기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들 중 많은 수가 굶주려 죽거나 맞아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형제복지원에서 죽은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부산 지역 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형제복지원 사건 등 당시 복지원의 처참한 인권실태는 정부가 노골적으로 축소·은폐에 나서고, 한국사회가 6월 항쟁으로 들끓으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988년 1월 형제복지원이 폐쇄되면서 수천 명에 이르던 원생들은 다른 시설로 옮겨지거나 아무런 대책 없이 사회로 대거 내쫓겼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지음, 문주)는 이러한 망각에 맞서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한종선 씨가 당시 경험을 기록하고 언론개혁시민연대 전규찬 대표,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상임이사가 그 기록의 의미 등을 설명한 책이다.
한종선 씨는 1984년 누나와 함께 10살의 어린 나이로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한 씨는 아버지가 자신과 누나를 파출소로 데려가 형제복지원에 입소 의뢰를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 신상기록카드에는 아버지가 3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자 인근 주민이 신고해 누나와 함께 입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곳에서 한 씨 가족은 철저하게 파괴됐다. 한 씨는 최소한의 의식주만을 제공받으며 온갖 종류의 구타와 체벌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곳에서 성폭행 등을 당한 누나와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잠을 자다가 뒤늦게 끌려온 아버지는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여 정신병동으로 옮겨졌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진 뒤 한 씨는 서울 소년의 집으로 이송, 서울 마리아 갱생원을 거쳐 1992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구두 가공 노동자로부터 배달원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쳤지만, 공사판에서 산업재해를 당한 후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한 씨는 수급 신청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오랫동안 헤어졌던 누나와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후 한 씨는 매달 누나와 아버지에게 병문안을 가며 가족이 함께 사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한 씨는 자신의 가족을 파괴한 형제복지원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 당시 원장의 횡령 액수가 무려 11억 4254만 원에 달해 무기징역까지 가능했지만 원장은 2년 6개월만 복역했다. 형제복지원만 폐쇄되었을 뿐 형제복지원을 운영하던 사회복지법인은 원장의 가족들이 대를 이어가며 부와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한 씨는 견딜 수 없었다.
▲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 "파렴치한 지탄엔 가슴 아프다"라고 항변한 내용을 1991년 3월 한 중앙일간지가 보도한 내용.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살아남은 아이’에서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상임이사는 형제복지원 사건과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세상에 폭로된 양지마을 사건 등을 이야기하며 왜 이런 문제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지, 왜 이런 사건이 쉽게 묻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박 상임이사는 사회복지시설장을 중심으로 경찰과 검찰, 법원, 언론 등이 촘촘하게 그물망처럼 짜인 ‘침묵의 카르텔’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 ‘침묵의 카르텔’은 철저하게 차별적인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권유린 사건이 터져도 경찰도, 검찰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부랑인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의 말은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시설의 장이나 직원들의 말을 신뢰한다. 즉, 1981년 전두환이 국무총리에게 보낸 지휘서신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차별적인 인식은 현재까지도 위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과거에 있었던 형제복지원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대감금의 시대’를 바로 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2천 명을 넘게 수용한 시설이 있고 이 시설을 위해 해당 지자체에서는 전체 복지예산의 30% 이상을 쏟아 붓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관광지를 찾는 것처럼 이 시설을 찾아 견학하거나 봉사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사회에서 격리된 채 살아가는 장애인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할 대상으로, 그곳에 있지 않으면 자기 생명조차 유지하기 힘든 나약한 존재로 낙인이 찍힌다.
그러나 이 책은 묻는다. 차별, 배제, 격리, 수용, 그 모든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해서인가? ‘살아남은 아이’에서 한종선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희망한다. 누나, 아버지와 산골짜기 농가 하나를 얻어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을... 가난해도 좋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는가?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들에게.”
(기사제휴=비마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