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함에서 읽어낸 혁명

[명숙의 무비,무브](8) <레미제라블>과 2013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까? 사람들은 절망에서 허덕이지 않기 위해 떨어지면서 지푸라기든, 작은 돌이든 잡는다. 대선이후 많은 사람들의 허한 가슴을 힐링으로 채웠다던 그 영화<레미제라블>을 나는 대통령선거일에 봤다. 개봉한지 이틀째이던 12월 19일, 영화가 끝난 시각이 밤 10시반경이라 박근혜 후보의 당선자 윤곽이 확실하다는 기사 때문에 영화를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한탄으로 영화는 내 머리 저편으로 날라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한편으로는 놀라웠고, 한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의 삶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어낼 때 사실은 자신이 얻고 싶었던 ‘답’인 경우가 많이 있다. 몰랐던 게 아니라 알고 있었으나 그걸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그 답을 입 밖으로 선뜻 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뮤지컬 재현 영화?

영화의 호불호는 사실 취향의 차이이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영화다. 그런 면에서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아쉬워도 반가울 거고, 반대로 뮤지컬 영화를 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토리의 전개가 극적인, 그래서 연결이 부자연스러워 보여 영화가 엉성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나는 전자에 속한다. 그래서일까? 뮤지컬 영화로서 처음 시도하는 ‘현장녹음’이 못내 아쉬웠다. 현장 녹음이다보니 배우의 연기나 몰입도가 높았지만 성량이 부족한 배우가 부르는 노래는 뮤지컬을 볼 때만큼은 흡인력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했다. 노래하는 배우를 관객의 시선이 움직이듯이 표현한 카메라 앵글이나 중요한 솔로 부분에서는 롱 테이크를 사용하는 등의 방식은 훌륭했다. 특히 판틴 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가 ‘I dreamed a dream’를 부르는 장면은 뮤지컬 무대 같은 느낌을 주도록 조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놀라운 가창력과 연기로 인해 뮤지컬 영화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뮤지컬 같기는 한데, 도대체 감독은 무슨 역할을 한 것이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영화의 기본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동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자연스런 극 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빅토르 위고의 소설원작을 뮤지컬로 재구성한 카메론 매킨토시가 이번 영화의 제작자라는 점이 한 몫 했지 않았을까 싶다.

[출처: 레미제라블 화보]

실패했지만 혁명을 읽어내다

영화 제목인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어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비참한 사람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장발장 이야기다. 굶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가 5년을 구형받고 탈옥을 시도하다 19년을 감옥에서 산 장발장이, 출소 후 신부님의 자비를 보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지만 여전히 그를 쫓는 경찰 자베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내용이다. 또한 장발장이 공장장이자 시장으로 있을 때 고용된 판틴이 해고되어 자신의 아이 코제트를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고, 이에 대한 속죄로 코제트를 부양하다가 코제트가 사랑하는 혁명군인 마리우스를 장발장이 구해내지만 혁명은 실패하고 둘은 결혼한다. 줄거리만 본다면 주된 메시지는 어쩌면 신부님과 장발장이 보여준 무한한 사랑일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기서 혁명을 읽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선의 결과가 보여준 우리 사회의 보수성과 보수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국사회의 ‘비참한’ 현실이, 영화에서 드러난 1832년의 비참한 현실이 흡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승리를 기약하는 혁명군의 노래가 울려퍼질 때, 이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는 아니라는 희망, 혁명으로 이루어낼 내일은 다시 올 것이라는 희망을, 사람들은 읽고자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소년병 가브로쉬가 바리케이드 앞에 나가서 총알과 총을 가지러 가다가 죽는 장면이다. 다들 의기소침해 있을 때, 그는 프랑스대혁명의 역사를 되새기듯 “우린 왕의 목도 딴 적이 있다”며,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말라며 앞서 나가다 죽는다. 영화 전체가 장발장의 가부장적 보호와 종교적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봉건적 사고가 주를 이루는 것에 비하면 이 부분은 다르게 보인다. 소년이 촉매제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의 당돌한 태도와 혁명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노래가사에서 혁명의 주체는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세워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이렇게 읽는 것이 원작에서 의도하는 바나, 영화제작자나 감독의 의도와 조금 거리가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영화에서 가브로쉬의 죽음은 희생양으로 읽히기도 한다. 뮤지컬과 다르게 영화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서신을 전달해주고 은전을 받은 이가 소년이기 때문이며, 은전은 자비와 희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소년 가브로쉬의 삶은 소설 레미제라블에서는 매우 큰 분량으로 다뤄진다. 위고는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싸우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1848년이 아닌 1871년을!

영화는 프랑스 혁명과 반동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격동의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왕정정치의 상징인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를 거대한 단두대인 길로틴으로 목을 베어버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공화정을 수립한다. 하지만 10년 만에 1799년 나폴레옹의 군사정치로, 급기야 1815년에는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집권하는 왕정복고시대로 이어진다. 영화는 반동의 시대가 시작되는 왕정복고기에서 시작해서 학생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위하는 1832년 6월 봉기까지 이어진다. 1832년은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집권한 루이 필립의 입헌군주정 시대로, 식량난과 콜레라 등의 질병 등으로 민중들은 비참하게 살아간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으로 기점으로 학생들은 다시한번 봉기를 기도하지만 이틀 만에 진압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영화에서 실패로 끝난 봉기가 1848년 혁명으로 드러난다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지금 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유신정권의 그림자에게 졌지만, 1848년의 혁명처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소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이 협력해서 만들어낸 1848년 2월 혁명은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도 평가했듯이,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빠르뜨를 선택하는 희극으로 끝났다. 공화국은 세웠지만 계급지배는 바뀌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황제 나폴레옹을 추억하며, 루이 보나빠르뜨를 선택한다. 박정희의 유령이, 박근혜를 낳은 것처럼 말이다. 반면 1871년 2개월간 파리에서 세워졌던 자치정부 파리꼬뮌은 짧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제빵노동자의 야간노동철폐, 무상교육, 여성참정권의 실현 등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2012년 12월을 겪은 한국 땅에 발 딛은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1848년이 아니라 1871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반MB로는, 살기 위해서 고공농성을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신자유주의의 횡포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큼 깨달았는가! 다시 반(反) 박근혜만을 외칠텐가? 박정희의 유령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근혜 당선자에게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이 1848년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반(反) MB라는 진창 속에서 벗어나 다시 반(反) 박근혜로 질척거릴게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곱씹어야 하지 않을까?

명곡, 하지만 아쉬운 번역

영화이야기가 이렇게 딱딱해지고 있는 것은 시기가 시기이기 때문인 듯하다. (죄송!) 그 외에도 자베르와 법치주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이쯤에서 끝내고 영화얘기로 돌아가자. 봉기이야기가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결혼으로 끝나는 황당함을 느끼더라도 영화를 보면 좋겠다. 이유는 노래 때문이다. 뮤지컬 영화인만큼 훌륭한 곡들만 들어도 영화를 본 본전은 남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 것은 혁명군이 불렀던 민중의 노래이다. 직역하면 ‘들리는가, 민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혁명군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다. 노예로 살지 않고 자유를 향해 싸울 것이며, 언젠가 내일이 열려 아침이 올 것이라는 가사다. 워낙 웅장한 노래이다 보니 가사의 내용을 모른 채 들어도 감동을 준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쉽게도 이상한 번역이 있었다. 바리케이트에 올라선 혁명군이 부르는 노래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Will you join in our crusade?”를 “사랑의 전사가 되자”로 번역해 감상의 흥을 깼다. 직역하면 “함께 운동에 참여하자”고 할 수 있는 것을 사랑의 전사가 되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씁쓸하다. 원작이 혁명의 주체인 민중을 집단적 주체로서 사유하지 못했다할지라도 노래가사를 사랑노래로 들리게 번역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투쟁으로 심박동 뛰는 민중의 소리를 2013년에 듣기를, 즐겁게 민중의 노래를 듣기를 기대하며 ....
When tomorrow c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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