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러 못다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보리라
- 상촌 신흠
감수성은 윤리적인 거라고 말하려다
제길, 감수성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염치라고 말했습니다
- 백무산, <감수성>
1. 조선 후기의 인물인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은 노래, 혹은 시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사람을 상상한다. 그 사람은 학문이 고상한 경지에 다다른 도학자적인 인물도 아니며, 흥에 겨워 몸을 흔드는 풍류인도 아니다. 다만 그는 ‘시름이 많은 사람’일 것이며, 그러한 시름을 풀기 위하여 노래할 뿐이었다는 것. - 이것이 바로 노래를 처음으로 만든 이에 대한 신흠의 추측이다. 그러면서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보리라’라고 하였다. 신흠 자신도 이 시조를 ‘노래’로 남겼다. 노래는 이렇게, 너도 부르고 나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평등해진다. 다른 곳에서 평등의 근거를 찾는 위선은 통하지 않는다. 노래란 애초에 평등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말은 언제나 곤궁하다. 언제나 말하고자 했던 것을 다 말하지 못하고, 말하지 않으려던 것까지 늘 말하게 되기 마련인 것이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란 것의 물성이다. 더욱이 시름이 많은 사람에게는, ‘말’이야말로 늘 성에 안차는 자식 같은 것이다. 때려서 키워도 좀처럼 다듬어지지 않으며, 부드럽게 일러도 늘 거친 것이다.
장바닥의 욕지거리나, 거칠고 투박한 거래와 흥정의 말들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차마 노래(시)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오백 원만 깎아달라며 옥신각신하는 언어들, 혹은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거짓말을 했다며 쉽게 ‘입에 걸레를 물고 마는’ 언어들, 이 누추하고 각진 언어들 사이에서 시의 탄생을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불모지일 것이라고 믿어왔다.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언어들이 아니면 시에 쓰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들로 가득한 협곡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곳’ 역시 ‘시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 평등한 사실 속에서 무언가 투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백무산 시인이 읊조린 것처럼, ‘제길, 감수성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고작) 염치’정도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염치를 ‘고작’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가늠해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2. 운 좋게도 프리뷰 기회를 얻어 이성혁의 평론집 [미래의 시를 향하여]를 출간에 앞서 읽었다. 이 책의 부제는 ‘노동시와 아방가르드’이다. 그러니까 절대 여러 주제를 아우르고 있는 책이 아니다. 몇 가지 목차의 제목들을 살펴보자. <아방가르드와 시적인 것의 정치성>, <‘삶권력’에 저항하는 노동시의 현재성>, <노동의 생활과 ‘삶미학’의 구축> 등등. 삶과 노동, 정치성, 아방가르드와 같은 몇 가지 키워드들은 이미 정도의 중첩성을 내포하고 있다. 상당히 협소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여태 이 평론집만큼 노동시에 대하여 집요하고 꾸준한 고민을 보여준 작업물을 목격한 일이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눈을 뜬 듯 한국시의 또 다른 지평에 대해서 새로이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토록 무지했던 만큼 이 평론집이 전체적인 시적 경향을 아우르지 않고 노동시에만 천착한 편협한 작업물이라고 생각했다. 백무산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그저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협소함과 편협함이야말로 이성혁의 비평이 가진 미덕임을 깨닫는다. ‘노동시’에 대한 그의 편협함, 또는 ‘집중’은 좀처럼 언어화되기 어려운 침묵의 시간 속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고 성취하려는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많은 평론가들이 감히 편협해지기를 꺼렸던 영역에서 그는 십자가를 지고 완전히 편협해졌다. 그러므로 노동시에 대한 비평이 드문 지금 상황에서 그가 취하고 있는 외골수의 태도는 매우 소중하다.
이성혁이 평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시들은 현재 한국 시단의 주류적 경향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 그가 거론하고 있는 시인들 중에서 현재 주요 문학 계간지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이들은 송경동이나 백무산 정도이다. 그래서 시풍이나 시인들이 구사하고 있는 어휘군이 상당히 낯설다. ‘채무’, ‘철야’, ‘하청’과 같은 노동세계의 생활언어들이 숱하게 등장하며. 쇳가루가 날리는 곳에서 일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여러가지 공업용 기계들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투쟁’과 같은 단어를 골라 넣은 선동시들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제도권 문학에 비추어 보면 얼핏 고상한 예술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하지만 이성혁은 이 시들을 통해 ‘제도권’ 예술이기를 포기하면서 도리어 ‘삶정치적’인 예술이 되어버리는 삶의 영역들을 포착한다. 그는 강병길의 [도배일기]를 읽으며 도배장이로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시인이 자신의 노동 과정에서 포착하는 시적 진실에 주목한다. 또한 이에 대한 상세하고 충실한 해설을 통하여 그것이 삶과 분리되지 않은 예술임을 밝힌다. 그는 최근의 사회적 문제들과 얽혀 있는 한국의 정치시들을 언급하며 그 특성들을 밝히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발전적 비판과 전망이 혼재하고 있다. 진은영을 위시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 담론과 미적으로 충만한 정치시가 가질 수 있는 느슨함을 지적하며, 투쟁의 주체가 투쟁의 장을 직접적으로 시화(詩化)하는 작품들의 잠재성을 탐구한다.
사실 문학의 제도화에 책임이 있는 문단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시의 언어는 특수한 사건이나 불편한 경험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대중의 취향에 맞는 자기 몰입적이고 안온한 아름다움의 성취를 위해 단어를 고르는 과정이 누락되어 있기에, 문학의 소비에 망설임이 없는 일반적인 ‘시 애호가’들의 평균적인 감수성으로는 향유되기 어려운 대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 시들은, 이성혁의 주장에 따르면, 삶과 정치의 정확한 합일점을 지켜나가고 있는 작품들이다. 심화되고 있는 자본의 압박 속에서 ‘시름도 하도할샤’ 쓰인 시들이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진실로 풀기’ 위하여 ‘나도 불러보리라’라는 의연한 직립의 자세를 보여주는 시들이기 때문이다.
3. 미래의 시에 대한 분명한 상을 그리려는 이성혁의 시도는 나로 하여금 도리어 처음으로 노래를 만든 사람에 대해 상상했던 신흠의 옛시조를 떠올리게 하였다. 최초의 사람이 노래를 만들게 된 이유는 ‘시름’이었으며, 결국 시름이 비롯된 ‘삶’ 때문이었음을. 그것은 삶 자체를 시적인 것으로 고양하고자 하는 아방가르드의 미래지향과도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한 제1원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제1원인을 잊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분히 문학과 삶을 분리하여 사고하기 일쑤이고, 그래서 문학은 자꾸만 고고하고 지적인 것이라는 부담에 스스로 빠지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평가의 주장이 ‘미적일 뿐 정치성이 떨어지는’ 몇몇 제도권 문학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과 문학이 괴리되지 않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염치를 지키자는 것이다.
백무산 시인의 말처럼, 감수성이란 것이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염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성취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삶은 애초에 하나라는, 우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을 지켜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염치를 지키는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 하나의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은 비평가가 꿈꾸고 있는 ‘만인에 의한 시 쓰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 평론집에서 노동시를 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노동시가 ‘만인에 의한 시 쓰기’의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노동시가 가진 측면들의 확장이다. 문학제도 바깥으로 탈주하는 작품들의 범람을 꿈꾸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의 문예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제 이성혁의 평론집, [미래의 시를 향하여]를 통해 ‘창조적 자발성의 조직’인 시에 대한 믿음에 또 한 권의 견고한 신뢰를 보탤 수 있게 되었다. 온갖 몰염치 속에서도 시가 지금까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평가가 이토록 다양한 ‘염치 있는’ 시들을 언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자꾸만 노래를 불러야만 풀리는 시름에 젖는다는 슬픈 사실을 생각하면, 세계의 문예화를 향한 시의 노정에 패배는 없으리라는 쉬운 전망을 제시하고 싶어진다. 이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반드시 황망하고 민망한 것이 되지 않도록, [미래의 시를 향하여]의 후속 작업과 노동시와 노동시의 외연 확대에 대한 비평작업이 좀 더 분주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