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로부터 9년여의 죽고 죽이는 학살극. 몇 명의 민간인이 죽어나갔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비극의 흔적이 아직도 섬 곳곳에 남아있다. 2002년, 대통령이 직접 국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과와 위로의 뜻을 표현했고 기념관도 세워졌으며 위령제가 열렸지만 비극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반세기, 이제 4.3은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거나 혹은 봉인되고 있다.
정부의 사과를 시작으로 4.3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는 듯 했으나 그 초점은 ‘희생’과 ‘비극’에 맞춰졌다. 해방직후의 혼란한 정국, 분단의 비극, 좌우의 이념대립 같은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들로 4.3의 연원은 간과된다. ‘몇 명이 죽었다더라’, ‘그리도 잔인하게 죽었다더라’에 집중된 말들은 4.3을 해방이후 있었던 숱한 비극의 역사중 하나로 만들고 있다.
4.3을 만든 사람들
‘노동자 역사 한내’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4.3 역사기행을 준비한 까닭은 그 ‘희생’의 기억 너머에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다. “4.3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농투성이 촌로들이 희생된 비극에 그치는 것일까”. 한내의 두 번째 4.3 역사기행은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 무장군 사령관 이덕구의 가족묘. 훼손된 비석은 토벌대에의해 부서진 이덕구의 할머니 것이다. |
2003년 기공식을 시작으로 5년만에 완공된 4.3 평화기념관의 초입에는 아무런 이름도, 문장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누워있다. 봉기, 항쟁, 사건, 사태, 폭동 등등. 4.3을 일컫는 수많은 이름 중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상징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음에도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다분하다. 혹자는 공산주의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라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미군정과 독재정권의 정치적 노림수에 희생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학정과 모리에 저항한 민중들의 항쟁이라 칭한다. 아직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던 이들은 아무것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세우지도 못하고 눕혀놓았다. 백비는 마치 역사를 봉인한 관처럼 누워있다.
한내의 이승원 사무처장은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순박한 양민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건이라는 인식으로 4.3이 봉합되는 일”을 경계했다. 이승원 사무처장은 “노무현 정부의 4.3 특별법 제정이후 4.3을 희생의 역사로만 기억하며 용서 혹은 봉합만을 강조할 뿐 항쟁의 원인, 주체, 계기에 대한 연구와 탐구가 없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특별법 제정 이후 희생자 유가족들도 정부차원의 보상금을 요구하는 등 4.3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움직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내 역사기행단이 찾은 곳에서 나타난 이름들은 4.3이 단순한 희생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간직한 ‘항쟁’의 역사임을 웅변한다.
해방 직후의 제주도는 전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돼 건국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기행단의 해설강사를 맡은 송시우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은 미군정과의 마찰, 좌우익의 대립 등 순탄치 않았던 육지의 인민위원회 활동과 달리 제주의 인민위원회는 대다수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미군정과도 비교적 협조적인 관계를 구축하며 명실상부한 건국준비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4.3항쟁을 주도했던 남로당도 당시의 어떤 정당보다 많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의 3.1운동 기념대회에도 3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당시 30만이 채 되지 않았던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인원이다.
▲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안세훈의 묘. 훼손이 염려돼 묘비도 없이 안장됐다. 현재는 어느 농가의 과수원 한 가운데 있어 방문도 쉽지않다. |
47년 3.1 기념대회를 주도하고 미군정에 의해 체포된 안세훈은 제주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인사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 투쟁사’ 논문은 안세훈(또는 안요검)을 항쟁을 이끈 남로당의 당부 책임자로 소개하고 있다.
1948년 8월부터 사살된 이듬해 6월까지 무장군 사령관으로 항쟁을 주도한 이덕구는 해방 직후 일본에서 귀국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귀국 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으며 동시에 조천면 민주청년동맹의 책임자를 역임했다. 당시 이덕구가 가르치던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이덕구에 대해 “사람이 무던히 좋았지 사상 운동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고 그를 회고했다.
결국 4.3항쟁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이 높아가던 중,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모리와 폭정에 제주인민들이 본격적인 저항에 나선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송시우 부위원장은 “해방 후 6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제주도로 귀국했는데 이 때 대량 유입된 지식인들과 이들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이 새로운 나라를 염원하던 제주도민들의 의지와 결합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극렬한 좌익과 정부의 다툼에 무고한 양민이 희생됐다는 단편적인 해석이 아닌 것.
(기행단의 일정에는 ‘제주 항일기념관’도 있었다. 제주에선 1919년 4차례에 걸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3.1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지역의 명망가부터 서울에서 유학한 학생, 노동운동가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송시우 강사는 “제주에 항일과 저항의 전통이 4.3의 근원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승만 정부가 당시 “제주도는 80%이상이 좌익”이라고 할만큼 제주도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전통이 강한 지역이었다.)
학살의 현장, 희생의 기억
반면 4.3의 기억이 ‘희생’이라는 단편에 집중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워낙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한 비극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 전역에는 4.3 당시에 희생된 이들의 흔적이 널려있다. 기행단의 한 참가자는 “가는 곳마다 4.3의 희생을 기록한 표지석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행단이 묶었던 숙소 옆 공터에도 4.3을 언급한 표지석이 서 있었다)
4.3으로 사망한 희생자가 몇 명인지는 여전히 정확히 집계되지 않는다. 송시우 부위원장의 말대로 “산간에 살던 일가가 몰살됐다면 희생을 신고하는 일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북촌 옴팡밭 학살현장에 세워진 순이삼촌 문학비 |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4.3 당시 민간인 학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생생히 증언한다.
“군인들이 이렇듯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순이삼촌’ 문학비가 서있는 옴팡밭과 인근의 북촌초등학교는 소설의 배경이 됐던 북촌학살의 장소다. 이곳에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400여 명의 사람이 죽었다.
91년 최초 발견된 다랑쉬굴에선 10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4.3 희생자 유골이 최초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곳이다. 직경 60cm의 작은 굴 입구를 지나면 나타나는 10평 남짓한 공간에 희생자들의 유해와 그들의 고무신, 비녀, 가마솥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다랑쉬굴의 ‘토벌’을 목격한 주민은 “토벌대가 처음에는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다가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검불로 불을 피운 후 입구를 막아 질식사 시켰다”고 증언했다.
서귀포시 의귀리에는 희생자들이 버려진채 최근까지 그대로 방치된 송령이골이 있다. 49년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와 민간인들을 집단으로 매장해 놓은 곳이다. 2004년 도법스님과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천도제를 올리고 방사탑을 세울 때까지 이 곳에느 정확한 숫자도 알 수 없는 유해들이 초라한 봉분과 함께 방치돼 있었다. 그 와중에 전봇대를 세우며 훼손된 봉분도 있다.
한내가 기행단에 나눠준 제주 지도에는 수많은 희생자 유적지가 빽빽히 기록돼 지도를 채우고 있다. 지도에 표시된 ‘잃어버린 마을’은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곳이다.
그리고 여전히 기억하는 이들
기행단을 이끌며 가는 곳마다 해설을 해주는 강사 송시우 씨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현직 교사다. 그의 수업은 때때로 4.3을 주제로 삼기도 한다. 계기학습을 통해 ‘집안에 4.3항쟁과 관련된 인물을 찾아보라’는 과제를 내주곤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도통 4.3에 관심이 없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한 참가자도 “제주 사람들도 4.3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송시우 부위원장은 “예전에는 4.3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도 꺼렸고, 지금은 4.3을 교과서에나 나오는 옛날 이야기 쯤으로 인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4.3을 잊는 것도 금방일 것”이라는 말도 이었다.
이승원 한내 사무처장은 4.3이 ‘이미 지나간 일’로 봉합되는 것을 우려했다. “희생의 역사만을 강조하며 봉합하는 것이 진실이고 화해가 아니라, 4.3의 주체들이 꿈꿨던 세상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역사문제연구소에서 4.3의 역사를 오래동안 연구한 김종인 씨는 “우리사회가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해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로 큰 고통을 당했던 그는 “서로를 배척하던 4.3의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우리 사회는 지금도 서로를 배척하며 자신의 입장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결국 국가로부터의 폭력에 무력했고, 넓은 시야로 근원을 찾는 과정이 삭제된 채 다툼만을 반복하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염려다.
▲ 송령이골 희생자 집단묘지를 참배하는 기행단. 기행단은 이 방문 이후 송령이골에 표지석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
그러나 한내의 이번 기행은 4.3과 역사를 다시, 제대로 기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든 듯 보인다. 이번 기행단에는 온가족이 함께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민중가수 최도은 씨는 9살 아들과 함께 제주도를 찾았다. 최도은 씨의 아들은 4.3항쟁의 역사를 전부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겠지만, 그럼에도 그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 그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을 만났다.
또 다른 참가자의 자녀들은 “단지 엄마를 따라왔을 뿐”이라면서도 방문하는 모든 곳의 사진을 꼼꼼하게 찍고 강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기행 마지막 날 방문한 이덕구 산전에서는 “길이 험하고 머니 차에 남아 있으라”던 엄마의 만류에도 꿋꿋하게 산길을 올랐다.
송시우 부위원장은 “(자기 집안의 4.3을 조사해 보라는)계기학습을 열심히 수행한 아이들은 4.3의 역사가 자신과 멀지 않음을 알고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송시우 부위원장의 말처럼 “국사 교과서에서도 단 한 페이지로 다루는 4.3”이지만 이들이 자라며 인식하고 기록하며 알아 갈 4.3의 역사는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란 희망.
기행단은 기행 둘째 날 저녁식사에서 ‘송령골 표지석’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십 수 명의 유해가 이름도 봉분도 없이 묻혀있는 곳을 다녀온 후였다. 기행 참가자들은 추진모임을 꾸리고 비용을 준비하고 일정을 토론했다. 하룻 밤만에 300여만 원에 달하는 모금이 이뤄졌고 향후의 일정도 수립됐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참가단 전원의 자발적인 제안과 동의로 만들어졌다.
이승원 사무처장은 기행 첫 날, 이번 기행을 통해 “4.3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그 성과를 조금씩 이어가가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표지석 건립은 이 사무처장이 말했던 그 계기와 작은 성과일지도.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명심보감도 ‘미래를 알려거든 지나간 일을 살피라’고 가르친다. 역사를 정확히 톺아보는 일은 그대로 지금과 내일을 대비하는 일이다. ‘노동자역사 한내’가 제주를 찾아 4.3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이번 한내 4.3 기행단의 자료집은 4.3을 정확히 명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4.3’ 뒤칸을 비워 놓았다. 마치 아무 것도 새기지 못한 ‘백비’처럼. 기행단이 해산하기 직전, 이승원 사무처장은 “이번 기행을 통해 느낀 대로 4.3을 명칭해 빈 칸을 채워넣으라”고 말했다. 시간이 더 지나 4.3이 무엇으로 불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호주머니를 털어 표지석을 세우는 사람들, 힘든 산길을 올라 꼼꼼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공부하는 청소년들, 어린 아들에게 역사의 현장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엄마,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하고 주체적인 역사를 탐구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이어진다면 4.3의 역사가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봉합되지는 않을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