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기억을 모두 찾아보기엔 너무 짧았던 2박3일, 기행단의 여정을 사진으로 되짚어봤다.
첫째날 - 관덕정, 이덕구 묘, 안세훈 묘, 제주 항일기념관
▲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던 경찰서 터. 이 발포와 6명의 희생이 4.3의 도화선이 됐다 |
관덕정 광장은 4.3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 3.1절 기념식이 열린 곳이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만들어져 관민이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열거나 죄인 신문을 하던 곳으로 사용됐다. 해방이후 건국준비위원회도 관덕정에 처음으로 간판을 걸었다.
1947년 3.1 기념대회에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였으나 경찰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에 항의하던 군중들에 경찰이 발포,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 4.3 항쟁의 첫 도화선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일파만파 커져 공무원은 물론 경찰까지 참여한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 파업과 저항에 미군정과 경찰이 고문과 압제로 대응한 것이 4.3 항쟁으로 이어졌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로 정부가 4.3의 잘못을 시인했다. 이후 평화기념관이 지어지고 평화공원이 조성됐으나 항쟁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평가보다는 서두른 봉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 또한 제기된다. 4.3을 여전히 ‘항쟁’이라 부르지 못하는 백비가 가장 적확한 예일수도.
무장군 사령관 이덕구는 29년 사살돼 관덕정에 그 사체가 전시됐다. 그의 가족들도 대부분 총살되거나 연행됐다. 그의 할머니의 묘비는 토벌군에게 훼손돼 반토막만 남았다. 살아남은 이덕구의 친인척들도 연좌제에 묶여 힘겨운 삶을 이어야 했다.
안세훈의 묘는 귤 과수원 한가운데 묘비도 없이 놓여졌다. 묘비를 세웠다가 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탓이다. 안세훈은 제주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남로당 제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제주의 좌익인사 중 가장 거물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묘는 이렇듯 초라하다.
둘째날 - 북촌(너븐숭이 애기무덤, 북촌초등학교, 옴팡밭, 순이삼촌 문학비), 다랑쉬 굴, 서북청년단주둔소, 터진목학살터, 속냉이골 묘역
“군인들이 이렇듯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순이삼촌의 배경인 북촌초등학교는 작은 시골학교다. 그러나 그 바로 곁은 수 백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현장이다. 음푹 패인 밭을 뜻하는 옴팡밭에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 일제히 학살당했다.
1991년 12월 제주 4.3 연구소 증언조사팀에 의해 다랑쉬굴이 발견되면서 4.3 항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당시 굴에는 10구의 시신과 그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생활용품들, 고무신, 허리띠 등이 발견됐다. 특히 유골위에 허리띠가 그대로 걸쳐져 있는 모습은 죽은상태 그대로 살이 썩어 백골만 남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당시 목격자는 토벌군이 불을 피우고 입구를 막아 사람들을 질식사 시켰다고 증언했다. 현재는 굴의 입구가 막혀있다. 당시 발굴된 굴의 모습은 4.3 평화박물관에 그대로 재현돼 있다.
해방이후 서북청년단의 무소불위 권력은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성산면과 인근 구좌면 지역주민들을 툭하면 잡아가 고문하고 총살했다. 그 장소로 성산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 사용됐는데, 이 때문에 당시 성산리 주민들은 날마다 시체를 목격하고 치우는게 일상이었다. 당시 터진목 부근에서 보초를 서던 경찰 한 명은 서북청년단의 학살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입이 삐뚤어졌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 서북청년단 주둔소 |
사진의 주둔소는 성산초등학교 옛터로 제주 전역에 이 같은 주둔소가 널려있다. 대부분 학교에 주둔해 사용했다.
송령이골은 49년 1월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매장된 곳이다. 구덩이를 파고는 사체를 버리다시피 방치해 인근 주민들이 대충 흙만 덮어둔 매장상태 그대로다. 시신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대략 15구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2004년 도법스님을 단장으로 한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천도제를 올리고 방사탑을 세울때까지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됐다. ‘노동자역사 한내’ 기행단은 이번 기행을 계기로 표지석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추진 중이다.
셋째날 - 오림반, 이덕구 산전
오림반은 항쟁 당시 무장대가 군사훈련을 진행하던 곳이다. 계곡과 숲으로 둘러쌓인 곳에 너른 공터가 갑자기 나타나는 지형으로 천혜의 요새다. 5.16도로 성판악 부근에 있다. 현재는 억새만 높이 자라나 있다.
▲ 이덕구 산전으로 향하던 길에 매여진 재능교육 노조의 흔적. 한내보다 앞서 기행을 다녀간 듯하다. |
이덕구 산전은 관광명소로 유명한 ‘사려니숲길’을 한참 들어간 후에 나타난다. (일반적인 길로는 갈 수 없다. 그야말로 밀림을 해쳐 걸으면 나타난다. 그러나 4.3 당시에는 나무가 없는 평평한 평지였다고 전해진다.)
무장군이 궤멸되기 직전인 49년 봄 이후 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주둔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무장군의 최후의 격전지로 알려졌다. 이덕구도 이 부근에서 사살(자살이라는 설도 있다)됐다.
현재도 당시 무장군이 사용하던 가마솥이나 그릇 따위가 널려있다. 사진에 보이는 동판은 제주 민예총이 4.3항쟁을 기리며 제작해 비치한 것.
▲ 한내 기행단 자료집. 4.3 뒤에는 빈 칸이다. 기행을 마친 참가자들은 4.3을 무어라 부르게 될까. |
덧,
노동자 역사 한내의 밴드 질라라비의 연주 모습. 기타는 양규현 대표가 연주한다. 사려니숲길에서 연주하며 관광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기행단은 이미 전 날, 가수 최도은 씨의 공연을 본 후였다. 최도은 씨는 즉석에서 공연을 제안 받고도 주저없이 멋진 공연으로 기행단의 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