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는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바로 거리의 삶이다. 저자가 계속해서 누각과 거리를 대립시켜 사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긍정적 사고를 관철하기 위한 지반이다. 자본주의적 도시화가 공통적인 것을 파멸시키는 형태로 진행되어갈 때, 도시공간 내의 다른 힘 즉, 되돌아오는 거리의 힘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갈수록 확장되는 도시화를 단지 묵시록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뉴욕/도시론 삼부작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의 힘, 즉 그 자체로 공통적인 부(commons)인 사람들의 집합신체다. 요컨대 운동으로서의 뉴욕에 주목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확장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세 권의 책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일 것이다.
누각과 거리는 어떻게 다른가? 저자가 누각으로 지칭하는 것은 ‘대규모 건물 및 교통기관 등의 상징적/기반적 시설’, 즉 스펙터클로서의 도시이며, 거리는 ‘사람들의 집합성과 관계성이 최대로 활성화된 상황/장소’, 즉 다중들의 삶 그 자체이다. 누각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힘이다. 우리가 뉴욕이란 도시를 생각할 때, 초고층 빌딩과 화려한 광고판 외에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면, 그건 누각의 힘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거나, 그러한 주체로 계속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9.11 이후 나타난 흐름은 바로 이러한 누각이 도시를 지배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간에, 인종관계에, 계급 간에, 젠더 간에, 사유재산과 그 밖에 벽을 세우며’, 우리를 포획하는 스펙터클이다. 그 결과, “맨하튼의 다운타운에 남아있는 것은 건축일 뿐 민중들의 사회적 상호관계성의 공간적 생산은 붕괴했다.” 저자가 내리는 이러한 진단은 9.11 이후 뉴욕의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자는 도시의 파국을 예측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뉴욕이 20세기 후반 메트로폴리스의 모델이 된 것은 자본주의와 그로 인한 개발이 엄청나게 집중된 도시 뉴욕에서, 그것에 저항하며 다른 삶의 방식들을 구축해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상호관계성이 붕괴한 뉴욕은 이제 더 이상 그 모델이 아니다. 적어도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그렇다. 대신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단일한 도시가 아니라 민중의 내부에서 일구어지는 도시네트워크이다. ‘지구상 어디에 있든 우리는 자신들의 장소(도시)와 다른 장소(도시)와의 관계를 살아가고 있다. 도시의 동일성/정체성에 관한 사고는 그 뿌리에서부터의 변환이 필요한 국면에 놓여 있다.’
세계화는 도시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도시든 다른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본의 측면에서 보면 끝없는 도시 간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상품이 된 도시는 집합적 상징자본(하비)을 구축하기 위한 장이 된다. 그것은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도시 공간의 상품화라는 회로 속으로 다양한 삶들을 가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역 주민, 예술가들의 다종다양한 활동은 지역을 새롭게 바꾸어놓지만, 그것이 가져온 지대의 상승은 새로운 가치화의 주체였던 이들을 내쫓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저자가 죽음의 도시(죽음을 향해 가는 도시)로 가리키는 양상이다.
그러나 관계로서의 도시는 새로운 가능성의 창출을 가져오기도 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스쾃운동은 이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90년대까지 뉴욕 도시운동을 주도해 왔던 스쾃은 이제 종료되었다. 강화된 보안체제와 법규로 인해 이제 스쾃은 생겨나자마자 철거된다. 대신 불법점거(squat)는 이제 점거행동(occupation)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되고 있다. 과거 특정 주체들의 운동이었던 스쾃이 점거행동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양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분산된 운동들이 점거행동을 통해 새로운 연관성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네트워크란 바로 이러한 운동들 간의 연결이 아닐까? 2011년의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아마도 지구적 도시네트워크에 대한 근래 가장 적합한 예일 것이다.
누각의 지배로 상징되는 도시화는 민중들의 삶뿐 아니라 지구라는 공통의 가능성이자 공통의 극한=한계를 위험에 빠트린다. 책에서는 비록 간헐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도시의 생태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생태학이 이야기하는 환경위기란 자연 환경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가따리가 이야기한 ‘자연 환경, 사회 환경, 정신 환경’의 세 영역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생태위기’를 뜻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공통적인 것’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코소는 ‘결정적인 인식론적 태도의 변경’을 주장한다. ‘그것은 인류/세계를 사고할 때, 더 이상 ‘대립/투쟁 모델’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립/투쟁’은 영속하지도 않지만 완전히 ‘통합/해결’되는 일도 결코 없다. 대부분 일정한 강도와 긴장이 유지된다. 또한 다른 차원에서는 언제나 ‘절충/협조/야합’이 진행되고 있다. 요컨대 불가피한 공생 상태가 어떤 토대로서 분명히 개재해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지구라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얽힘 모델’ 즉 ‘절충/협조/야합’을 보다 고도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가진 숙명적인 선행성을 토대로 하면서, 언제나 도시, 그리고 도시화란 계쟁의 상태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럴 때 중요해지는 것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자율적인 삶, 활동이다. ‘절충/협조/야합’이란 자본과의 타협 혹은 ‘온건한 탈정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 제도정치에 기대어서, 새로운 삶을 구축하는 일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 중요한 것은 얽힘의 장에서 ‘공통적인 것’의 지반을 확장해나가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얽힘 모델’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일 것이다.
지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가는 모든 삶, 활동의 기반, 즉 공통적인 것의 극단이다. 도시화가 이런 지구의 대부분을 잠식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메트로폴리스가 폭넓은 의미에서 자연이 되었다는 것을 즉, 삶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도시공간을 통해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투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대의 투쟁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조직화’와 ‘공통적인 것의 망령’ 간의 대결이다. 신자유주의는 이 망령의 대명사다. ‘유일한 대안’이라는 명목 하에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양상들, 즉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공공적 기반의 해체, 그리고 자본의 도시화로 인한 환경파괴는 우리가 서 있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때문에 이 도시에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
‘누각은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일지라도 거리의 부양가족 혹은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것이 기생충인 것은 그들의 부 자체가 거리의 집합신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 아니 그것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파괴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 우리의 삶이, 지구가 위험해지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때문에 누각에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대항하는 거리의 삶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서만 ‘도시의 생태학’이 가능해 진다. 그것은 벽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활동일 수만은 없다. 새로운 도시는 공통적인 것의 네트워크로서의 도시, 단절과 분리를 극복하는 연결로서의 도시, 그 연결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확장하는 과정으로서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
뉴욕/도시론 삼부작을 통해 잘 드러나지 않는 거리의 삶에 주목하는 저자의 글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죽음을 향해가는 도시’를 이야기하는 이 책조차도 나에겐 그러했다. 그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도시 사이로 되돌아오는 거리를 발견하는 그의 밝은 감각 때문일 것이다. 책의 말미에서 그가 과제로 말하는 또 다른 ‘거리’ 형성의 과정들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러한 거리를 구축하는 일은 역시 그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