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부채청산 넘어 사회화 필요
사회화와 민주적 통제만이 해법
경제위기 속에 실업급여로 연명하던 스페인의 한 장애여성이 자신의 장기를 온라인에 내놨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책은 경제위기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현대 자본주의 형성기의 금, 은본위제부터 파생금융 상품이 판치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서술한 뒤 두 저자는 나름의 대안도 내놨다.
뭐니뭐니해도 이 책의 최대 성과는 2008년을 기점을 또 다른 생존방식으로 진화한 신자유주의를 정확히 짚어낸 점이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는 200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적 금융 거품을 일으켜 부채를 확대하면서 위기를 은폐해왔으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뒤엔 부채를 줄이기 위해 부채 전쟁에 뛰어들었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중대한 변화를 맞고 있다. 이 부채 전쟁은 공평하지 않다.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실수로 빚어진 부채를 가난한 이들에게 일방으로 떠넘기고 있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과거 가진 자들이 국민경제 참여자 모두가 만든 ‘이익을 사유화’해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손실을 사회화’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저자들 중에는 학부 때 경제학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두 저자는 석사도 박사도 전문연구가도 아니다. 20여 년을 진보운동의 현장에서 버텨온 관록이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부채를 둘러싼 전쟁 중’이라는 탁월한 혜안을 제시했다. 저자들은 분석과 해석에 머물지 않는다. 이 책 마지막 두 장은 생산, 재생산, 신용부문의 사회화를 통한 신자유주의 극복 대안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천 사례들도 소개한다.
2008년 촛불은 역동적이었다. 그러나 그 역동성은 거의 전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에 머물렀다. 촛불에서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문제는 후순위였다.
“90년대 이후 시민운동 세력이 주도한 ‘경제민주화’가 경제의 민간화와 주주자본주의를 강조해 결국 신자유주의에 봉사한 것을 우리는 애석한 우연이나 실수로 여긴다. 과연 그럴까? 민주화로 대통령 욕도 하고 정치적 비판과 행동도 한결 자유로워졌는데 이상하게도 삶은 갈수록 더 불안정하고 막막하기만 하다.”(추천사 중, 김규항)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고 재벌공화국을 만든 것은 개혁의지의 후퇴나 애석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개혁이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라는 김규항의 추천사는 양념이다.
다음은 2008년 이후 세계 도처에서 부채의 축소를 둘러싸고 벌어진 <부채전쟁>의 주요 내용이다.
2012년 11월 12일 척추장애가 있는 스페인의 한 여성이 월세가 없어 쫓겨날 지경이라며 자신의 장기를 온라인 경매에 내놨다. 스페인은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 못지않은 최악이다. 그녀는 실업수당으로 달마다 426유로(58만원)를 받지만 월세가 400유로라 밥조차 먹을 수 없었다.
국가가 진 빚을 털기 위한 전투에서 모든 국민이 똑같이 희생하는 것 아니다. 부도에 몰린 그리스에서 재벌들은 자기 돈을 안전한 독일은행에 옮겼다. 우리 저축은행 사태 때도 VIP 고객들은 거래 중단전에 이미 돈을 뺐다. 전 세계에 정말 돈이 없는 것일까. 돈의 규모만 보면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풀렸다. 그러나 실제 발행된 달러는 채 1억 달러가 되지 않는다. 각국 은행들은 전 세계 총통화량의 5%만 실제 돈으로 찍어냈다. 95%의 돈은 신용창조로 만들어졌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의 세계화와 경제위기라는 두 개의 무기를 들고 등장했다. 전 세계 파생금융상품의 2010년 말 기준으로 1,200조 달러(132경원)까지 거대해졌다. 한국의 파생금융상품은 2010년 말 기준 30조~60조 달러(6경 6천조 원)에 달한다. 1990년대 들어 환율과 외환을 이용한 공격이 빈번했다. 첫 번째 희생양은 유럽이었고 두, 세 번째는 멕시코와 아시아 국가들이었다. 미국의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와 뒤이은 미국 경제위기는 바로 파생금융상품의 폐해를 직접 보여준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 때문에 국가 간 환율전쟁이 격화됐다. 미국은 제로 금리까지 이자율을 낮추고 양적 완화를 통해 달러를 무차별 공급했다. 부채 전쟁의 승자와 패자는 분명했다. 양적 완화로 단물을 빨아 먹은 것은 결국 미국의 상위 1%에 해당하는 금융자산가와 대기업 임원들이었다. 미 국세청에 따르면 상위 1% 평균 연봉이 2009년 98만 달러에서 2010년 112만 달러로 14% 증가했다. 미국의 상위 1%에 속하는 120만 가구의 소득은 2009년보다 5.5% 늘었다.
반면 하위 40%에 속한 1억 4,600만명은 빈곤층이나 저소득층으로 소득 변화가 거의 없었다. 지니계수는 2011년 0.463으로 1967년 이후 빈부 격차가 가장 컸다. 미국의 지니계수는 우간다나 카자흐스탄과 비슷하다. 2011년 미국의 실질 빈곤율은 16.1%로 조사 이해 최대치를 갱신했다. 4,970만 명이 최저임금 이하로 생활하는 빈곤층이었다. 미국에서 주택을 압류당한 사람들은 1천만명에 육박했다.
미국 상위 1% 부유층이 전체 미국 자산의 93%를 가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3월 통과시킨 의료보험개혁법은 공적 의료보험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의료보험회사 가입을 지원하는 방식이라 공정 의료보험 확대를 바라는 미국 내 진보진영의 비판을 받고 있다.
부채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 부동산 수요층의 핵심인 35~54세 생산가능 인구 규모는 2011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있다. 하우스푸어 뿐만 아니라 ‘깡통 전세’도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7%나 된다. 대표적 부실 공기업인 한국토지주택공사만 부채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38조원을 넘었다. 일반기업이었으면 벌써 퇴출당했다. 수자원공사도 현재 13조원의 부채 때문에 하루에 이자로 12억 원을 지급하고 있다. 코레일의 부채도 숨겨진 국가 부채의 대표 사례다. 용산개발 사업 무산으로 코레일은 앞으로 부채 때문에 구조조정과 민영화라는 고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코레일 부채의 상당수는 철도청과 고속철도사업단에서 넘어온 건설부채다. 일종의 분식회계를 통해 국가부채를 떠넘긴 것이다. 16개 광역시도 산하 도시개발공사 부채가 50조원을 넘는다.
이런 엄청난 국가 부채 속에서도 한국은 수출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무역의존도(GDP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가 80%를 웃도는 기형적 경제구조다. OECD 나라의 평균 무역의존도는 29%다. 높은 무역의존도에 반비례하는 내수부문의 침체는 불안정성을 키우고 있다. 자칫 한국은 가계 부채 위기가 은행, 나아가 국가 부채 위기로 전염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8년 만에 집권한 아이슬란드의 사회민주당과 좌파녹색당의 중도좌파연합 정부는 외국예금 즉시 상환거부와 자본통제, 시민참여 헌법 제정으로 국민적 지지와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산의 110%가 넘는 가계부채를 모두 탕감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의 성공 신화는 거기까지였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2008년 도산한 은행을 국유화하고 세금으로 자본을 다시 확충하는 재자본화를 진행했다. 동시에 정부 예산을 삭감하는 긴축조치와 세금 인상을 병행해 은행 구제비용을 국민에게 부담시켰다. 이 같은 정책들로 아이슬란드 경제성장률은 높아졌지만 결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30~40% 낮아졌고 빈곤률은 24%에서 38%로 증가했다. 여기에 부동산 가격은 2010년 이래 40% 이상 폭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슬란드 집값 폭등의 원인은 정부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단행한 외국자본 유출 통제 조치 때문이었다. 빠져나가지 못한 외국예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 집값을 계속 끌어올렸다.
결국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해 30년 집권 끝에 물러났던 독립당 주도의 우파연합이 2013년 4월 아이슬란드 총선에서 4년 만에 재집권했다. 아이슬란드 사례에서 우리는 긴축재정이 서민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아이슬란드의 사례는 채권자에게 책임을 물리는 부실 청산이 경제위기 해결의 첫 출발이 될 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단순한 자본 통제와 부실 청산만으로는 위기가 언제든 반복된다.
때문에 그리스의 채무자 주도 방식의 채무불이행과 사회화 논의가 시선을 끈다. 영국 런던대 SOAS(동양-아프리카 스쿨) 라파비차스 교수는 채무자 주도의 디폴트와 유로존 탈퇴, 노동자 주도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이 주장을 수용한 그리스 급진 좌파 시리자(SIRZA)는 2012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다.
경제구조의 사회화는 생산, 재생산, 신용 세 가지 영역 모두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 부실청산을 이루고 빚 없는 사회구조를 완성할 수 있다. 생산의 사회화는 기업의 사회적 소유와 민주적 통제를 말한다. 재생산의 사회화는 주택과 교육, 의료, 연금제도, 돌봄노동 등의 사회화를 말한다. 생산과 재생산의 사회화는 빚 없는 사회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신용의 사회화는 은행과 이자의 사회화를 말한다. 은행의 사회화에서 주목받는 사례는 노스다코타 은행이다. 이 은행은 1919년 세워진 ‘주립은행’이다. 이 은행은 2008년에도 5,700만 달러의 순익을 기록했다. 이익의 상당부분은 주정부 재정 수입으로 돌아왔다. 지난 14년 동안 이 은행은 3억 4천만 달러를 주정부에 돌려줬다. 이 은행은 지역공동체 사업과 급진적 활동가들도 광범위하게 지원했다. 노스다코타은행의 주요 상품은 지역 주민과 학생을 위한 대출이다.
이처럼 공공은행의 장점이 소개되면서 공공은행 설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은행 감독권을 강화해 은행 국유화를 유도해야 한다. 중앙은행의 독립도 중요하다. 이자 수입을 환수해 모두 공공재원으로 재활용한다. 공공은행은 예금과 대출이자 없이 서비스 수수료로만 운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