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적대성과 파시즘의 정치학: 무너지는 세계, 방향의 상실과 성찰의 모색

[새책] 진보평론, 57호 (2013년 가을호, 메이데이)

피곤한 세상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한 이야기까지 신경 써야 하니 말이다. 연방준비은행 총재인 버냉키라는 사람의 ‘양적완화’에 대한 몇 마디가 세계 곳곳의 증시에 영향을 미치고 태평양 건너 한반도에서 대출과 카드빚에 기대어 살고 있는 나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

혼자 앉아서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다. 아예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잊은 듯하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서는 연신 카카오톡과 문자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울린다. 빠른 손놀림으로 답을 해야 한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제목처럼 ‘잊힐 권리’를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의 시간이 없다. 사색의 시간이 없다. 따라서 반성과 성찰의 시간도 없다. 그냥 순간순간을 밀리고 밀치면서 사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자본과 권력이 짜 놓은 격자 안에서 맴을 도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몸에 부과된 규율과 내면화된 규범이 공부하고, 일하고, 소비하게 하니 말이다. 자본과 권력에 순응하는 육체가 되어 버린 듯하다. 하지만 자본은 한순간도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문제는 ‘팔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하는 기계가 되기 위해 자본이 쳐 놓은 거미줄 안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우리의 판단과 선택을 요청하는 욕망-상품의 연쇄가 우리의 삶을 휘감아 온다. 우리 몸의 체험과 감각은 이런 욕망의 사슬을 피곤해 한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몸의 체험과 감각이 가지는 부피는 ‘경제적 인간’의 비용-편익 분석이라는 평면 위에 절단되고 파편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안으로 유폐된 몸의 감각은 우리를 조울증과 분열증에 시달리게 한다. 지금-여기로부터 오는 무력감과 피곤함,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하다는 자각에서 오는 좌절!! 어쨌든 피곤하고 지친다.

항상 누군가에 노출되게끔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스마트한’ 정보통신망은 넘쳐나는 정보로 채워진다. 말들의 홍수다. 비난, 비방, 거짓, 욕설, 신념과 열망이 사실(fact)과 뒤엉켜 실재와 가상이 헷갈리게 된다. 그래서 ‘스마트한’ 세상은 정보를 소비할 뿐 비판하거나 창조하는 데는 미숙한 전혀 ‘스마트하지 않은’ 사람들을 양산한다. 이런 세상에서 차라리 실재나 원본을 찾으려는 것은 한심하고 헛된 지난 시대의 꿈이라는 포스트모던한 경구를 믿고 싶어진다.

원본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원본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복사본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의 근거로 팩트를 말한다. 역설적인가? 그래서 우리는 가상의 세계를 쉬지 않고 떠돌아야 하기 때문에 피곤해지지만 동시에 말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며 판단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된 원본을 찾아 헤매면서 지쳐간다.

실재가 있긴 하다. 자본과 상품-화폐의 논리가 만들어 낸 추상적 공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절단되어 교환 가능하지만 우리의 몸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기억과 체험, 우리가 타자들과 맺는 관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 평면화되고 교환가능해진 시간과 공간의 추상성을 견디지 못하는 삶이 실재다. 그래서 착취당하는 몸, 분열증과 조울증을 시달리는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실재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그 실재와 대면하지 못한다. 우리의 의식은 실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말들의 유희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감각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불만으로부터 몸을 가두고 절단하는 지배와 착취의 구조적 원인으로 찾아들어가기보다는 그냥 배설하는 말들의 장난에 만족한다. 서로를 종북, 좌빨, 수구꼴통, 파시스트로 몰아 부치고 역설과 비방을 내뱉는다.

소위 보수지배세력은 이런 상황은 은근히 즐기면서 방조한다. 점잔을 빼면서 정도를 넘어서지 말라고 넌지시 타이르면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지배의 논리가 쳐 놓은 격자 안에서 ‘적’을 찾아내고 말의 공격을 퍼붓는다. 자신들의 생각만이 진리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보수와 시대착오적인 좌파 모두를 단죄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적 사이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체제의 한계를 말하고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좌파들은 언제나 비슷한 레퍼토리를 들이대며 추상과 이상의 세계를 설교한다. 그들 역시 유폐된 몸의 감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일상의 불만과 저항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몸의 저항과 체계에 대한 비판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말의 다툼은 가시적이다.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은 재미가 없다. 애초부터 대화와 소통을 할 의지조차 없다. 극단만이 부각된다. 이미 찬반만이 있다. 그래서 말의 ‘난투극’으로 재현되는 실재는 드라마보다 재밌다.

정말 ‘스마트한’ 사이버공간에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도(드러내는 용기가 없어도!) 먹잇감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다. ‘실제로 때리고 찌르는 것도 아닌데 뭐!’ 가상공간 속 게임에서 폭력은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다. 타자의 고통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이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게 된다.


진보평론 58호(2013년 가을) 이번호 특집인 “한국사회의 적대성과 파시즘의 정치학”에 실린 세 편의 글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베’ 현상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한윤형의 “한국 좌우파 투쟁의 흐름 속에서 ‘일베’를 바라본다면 ‘일베’는 기존의 좌우파와 어떻게 닮았고, 또 다른가”는 일베를 낳은 한국의 정치담론을 짚어본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일베를 저급한 쓰레기 문화로 공격하지만 사실 그들도 일베를 낳은 ‘부모’일 수도 있는 것이다. “486세대는 1987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소수 대학생 운동권에 불과했던 자신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자신들의 세계관에 대한 지지라고 믿는 착각을 저질렀다. 대중은 올드라이트의 정서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486운동권의 정서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은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은 피해자이며 그래서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은 독선을 낳았고 결국 ‘노빠’로 상징되는 맹목적 투사 집단을 만들어 낸다. 일베는 이들의 독선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대 간의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젊은 세대의 진보성에 기대었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젊은 세대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박영균이 일베를 ‘나꼼수’의 “정치의 오락화”가 불러온 “사후복수”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빠’와 ‘일베’는 “반지성주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일베현상을 단순한 기존 세대에 대한 반발, 비꼼, 풍자로 보기에 그들의 담론은 패륜적이고 천박하다. 윤보라의 “일베와 여성 혐오: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듯이 특히나 여성혐오는 혐오스럽다. 윤보라의 표현처럼 “여성에 대한 총체적 거부”가 매우 공격적으로 드러난다. 우승열패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패배감을 보상받을 수 있는 먹잇감으로서의 약자로 여성을 선택한 것이다. “성적욕망과 소비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으면서도 결혼이나 출산은 유예하는, 이 대담한 여성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베의 담론이 몹시도 불편한 것은 그 표현의 과도함뿐만 아니라 ‘된장녀’나 ‘김치년’으로 표현되는 소비주의 시대 여성의 천박함을 공격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남성우월주의적 성문화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웃음과 성을 구매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저씨들의 천박함은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이것은 일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베 같은 괴물을 탄생시킬 충분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베를 단죄하기보다는 일베를 낳은 우리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박영균의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정치학을 넘어 진보의 정치로”는 일베를 탄생시킨 우리 사회의 근저를 분석한다. 승자독식의 사회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승리를 ‘상상할’ 기회조차 부여되지 않는 조건, 교과서에서 배우는 정의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자가 되기를 부추기는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오는 좌절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젊은 세대는 일할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그 가치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자들, 소위 ‘몫이 없는 자’, ‘빈곤한 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박영균은 “잉여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필자는 이러한 좌절이 일베 또는 더 나아가 파쇼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원인에 대한 무지”라고 지적한다.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는 명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공격은 무차별적”이다. 하지만 세 명의 필자 모두 일베현상을 일베 구성원 개개인들의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일베와 파쇼적인 것 모두 “자신들의 미약한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위기 속에서 경험하는 분노와 증오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박영균은 이러한 분노와 증오를 파쇼적인 것이 아닌 진보정치의 “물리적 비판”에 근거하여 “희망의 정치”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덧붙인다.

목차

□ 특집
* 한국 좌우파 투쟁의 흐름 속에서 ‘일베’를 바라보다: ‘일베’는 기존의 좌우파와 어떻게 닮았고, 또 다른가/ 한윤형
* 일베와 여성 혐오: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윤보라
* 반지성주의와 파쇼적인 것들의 정치를 넘어선 진보의 정치로/ 박영균

□ 발언대
* 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한 제언: 일반 공동연구 지원사업의 자격 요건을 중심으로/ 신희영
□ 정세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현재/ 정원각
□ 국제
쿠데타냐 또 다른 혁명이냐, 이집트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방정식 풀이/ 최재훈

□ 일반논문
* 한국 중산층의 세대 간 경제적 자원 이전과 가족주의의 강화/ 최시현
* 1960-1980년대 일본 노동운동 내부의 헤게모니 변동/ 송경숙
* 남북한 핵무장론에 대한 비판과 비전 평화(非戰平和)운동의 과제/ 이창언

□ 정치경제학 비판
*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김정주
□ 소수자 이야기
규범적 슬픔, 젠더의 재생산: 장례식, 트랜스젠더, 그리고 감정의 정치/ 루 인
□ 다시읽기
스피노자, 야생적 별종인가 반-오웰인가?: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해석을 중심으로/ 최 원
□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고전
책임 담론이 책임질 수 없는 것(“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이순웅
□ 서평
중심을 향한 경쟁보다 변방에서 새로운 중심을 같이 만들자!: 변방 콤플렉스에 빠진 우리에게 책 ‘팔꿈치 사회’가 답하다(“팔꿈치 사회”)/ 조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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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류정정

    57호가 맞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