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순례를 시작한 거야 9월 3일이지만 나로서는 울진순례 기간이 어디를 떠난 건 아니었다. 오늘부터야말로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서게 된다. 울진순례 기간에 쓴 일지들을 추려서 정리하는 일을 하기로 했는데 그걸 다 하고 나니 아침 여덟 시가 되었다.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짐을 꾸렸다. 이주일 동안 입고 다닐 옷가지들, 그 사이에 없으면 아쉬워질 소지품 따위. 짐을 꾸리고 집 정리를 하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나가야지 했는데 그럴 새가 없다. 안동에 네 시에 닿으려면 적어도 12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빠뜨린 것이 없는지 한 번 더 살폈다. 죽염, 효소, 껌, 전화기 충전기, 속옷, 겉옷, 양말, 수건……. 순례단이 머물고 있는 한터울 숙소에 가니 벌써 떠날 준비를 다 마쳤다. 출발이다.
평화유랑단의 꽃마차 한 대와 봉고차 한 대가 움직였고 수사님과 나는 버스를 탔다. 봉고차 한 대에 타는 사람도 많고, 저마다 짐이 많아 힘이 들 테니 버스를 타고 움직이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도 따라 나서서 수사님과 함께 버스를 탔다. 울진에서 영덕으로, 그리고 영덕에서 갈아타고 다시 영주로.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에 버스를 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영덕으로 가는 버스는 처음 타는 거라 더 낯설고 새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봐야 울진에서 죽변, 부구를 오가는 길이나 아주 닮은꼴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눈에 익지 않은 길을 가는 기분이 남달랐다. 버스는 직행이 아니어서 마을 곳곳에 서다 가다를 했고, 그럴 때마다 보따리를 인 할머니나 나무등걸 같은 손을 한 할아버지가 오르곤 했다. 창 밖으로는 대나무 숲에 야트막한 지붕이 있는 정감어린 풍경들이 이어졌고, 차 안에는 다들 볼품이 없어서 너무나 정겨운 시골 사람들이 함께 탔다.
못잔 잠을 버스에서 자며 갔다. 어느 새 영덕, 곧 안동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이번에는 차창 밖으로 계속 사과 과수원이 줄을 잇는다. 참 탐스럽게도 익었다. 볼 때마다 놀라지만 나무 한 그루에 참 많이도 열린다. 바로 따서 옷에 슥슥 닦아 한 입 깨무는 상상이 절로 되었다. 안동, 지금껏 모두 여덟 번을 갔는데 학교답사와 수학여행을 빼곤 모두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러 간 길이었다. 울진 다음 순례지가 안동이라 했을 때 나는 자동으로 조탑 마을을 떠올렸다. 시간을 내고자 한다면 못 낼 거야 아니지만 나는 내가 이번에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지금도 여전히 부끄럽고 죄송해서 인사를 드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게 삼십 일을 굶은 모습으로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은 도리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순례 지역을 정하던 9월 3일 밤부터 안동, 안동, 안동 하면서 그래도 잠깐 가 들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웠다, 했다 지웠다 하던 것을 타고 오는 버스 안에서까지 버리지 못했다. 안동 버스정거장에 내려 숙소로 걸음을 옮기는데 아, 그곳은 내가 5년 전 먼발치에서 권 선생님을 처음 뵙던 곳이다. 어린이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연수를 하던 자리. 그곳 4층에 올라가 짐을 풀었다.
울진 일정을 마치고 안동으로 가는 단식평화순례단의 꽃마차 |
거부하는 것, 복종하지 않는 것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간담회를 마련한 자리로 갔다. 그 자리에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단체 분들과 전교조 교사 몇 분, 그리고 농민회에서 일하는 분, 수녀님 두 분, 지역 시민단체에서 오신 분들, 그리고 신문 기자 한 분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금 늦어서 더 오신 분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사진으로만 보던 아는 얼굴, 교사로서 처음으로 병역을 거부하고 교직에서 쫓겨난 최진 씨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린이나 청소년 또는 성당의 신도들 또는 보통 어머니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자리에 견주어 오늘 자리는 사뭇 무겁고 딱딱한 자리였다. 자리가 마치 격을 갖추어 얘기해야 하는 회의실 같은 곳 이었기 때문일까? 문득 빛깔이나 소리, 느낌, 얼굴 표정, 분위기 같은 것들도 평화를 닮은 것들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는 좀 더 편안한 것일 거고 어깨에 힘을 빼는 것, 자연스러운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들이 좀 더 평화와 닮았을 거라고 말이다.
어젯밤 잠을 못자 몸이 무거워 그런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좀 힘들었다. 아니, 몸도 몸이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게 무겁고 딱딱해져 더 그랬을 것이다. 이라크를 떠올려 이야기를 하는 건 언제나 그렇지만 힘이 많이 든다. 기운이 바닥으로 축나는 것 같은 느낌.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간담회를 마쳤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나와 맞은편에 앉았던 농민회에서 나온 아저씨와 짧게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았다. 아마 내가 필리핀의 철군 예를 들어 말하면서 ‘한미동맹’이니 ‘미국의 압력’이니 하는 것이 절대적인 핑계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난 뒤였을 것이다. 아저씨는 그 말을 받아 말을 했다. 운동을 하는 이들은 미국을 비판하는 자리에 있지만 미국을 지나치게 절대시 하는 면에서는 미국을 숭배하는 이들하고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이다. 무언가 소통을 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단지 비슷하게 생각을 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대화를 서로 주고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안동 역 건너편 조흥은행 앞 공터에서 공연 행사를 할 때, 공연을 다 마치고 난 뒤에 아저씨가 나가 한 말씀을 했다. 내일 모레 쌀수입개방을 막는 집회에 대한 안내였다. 아! 니, 그저 안내를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올라오는 호소를 했다. 말투야 아주 어눌했지만 아저씨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아 당겼다. “쌀은 무기입니다, 쌀은 주권입니다, 식량주권을 빼앗기고 나면, 식량무기를 빼앗기고 나면 주권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쌀을 지켜야 합니다, 식량주권을 빼앗기고 나면 이라크파병반대도 없습니다.”
다 빼앗기고만 있다 하는 생각에 답답하기만 했다. 싸울 일 투성이다. 도무지 이 놈의 나라는! 하지만 머릿속에서 ‘다 빼앗기고만 있다’ 하고 생각하던 것을 곧 ‘다 팔아먹고만 있다’, ‘다 내주고 있다’ 하는 말로 고쳤다. ‘다 빼앗기고만 있다’ 하면 여기에는 우리의 분노가 오로지 ‘빼앗는’ 자, 다시 말해 오로지 미국으로만 향하게 된다. 아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빼앗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들에게 오히려 앞장서서 내주는 자들, 팔아먹는 자들이 있다. 이 나라 안에 분명히 있다. 노무현 정권. 침략전쟁을 그만 두게 하는 것도, 쌀을 지키는 것도 노무현 정권과 담판을 지어야 하는 일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최진 씨. 내가 그이를 안 건 올 봄. 병역거부를 선언하며 쓴 글이 나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이가 거부하는 것은 군대이고 전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의 마음 안에 있는 폭력과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소중한 일상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이는 교사라는 신분을 잃게 되었고 지금은 다른 병역거부자들과 마찬가지로 수감을 기다리고 있다. 긴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이와 나눈 몇 마디 얘기에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양심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는 거부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복종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양심대로 사는 것, 평화로이 사는 것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거부해야 하고, 싸워야 한다. 모든 게 거꾸로 되어 있다. 온통 거꾸로다.
무서운, 그리고 부러운, 비참한
불안하다, 불안하다 하더니 사드르 시티와 팔루자에는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민간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기막힌 기사와 함께 나란히 놓인 것은 이어지는 철군 행렬. 태국 군 전원 철수 예정, 우크라이나 군 점차 철수, 폴란드 군 일부 철수, 네덜란드 군 내년 3월 철군. 무서웠고, 부러웠고, 비참했다.